84화. 선상에서(1)
매들린은 검푸른 대서양의 해수면을 바라보았다. 흰색 장갑을 끼고 코트를 두른 그녀는 누가 봐도 젊은 귀부인으로 보였다. 챙이 내려간 둥그런 모자가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귀를 가려줬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노팅엄 저택에서 보내고 싶다는 남자의 간청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내심 토할 것처럼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곳으로 가면 정말로 실감이 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남자와 결혼한다는 현실의 무게를 말이다.
그러나 미루고만 있을 수도 없는 문제였고(무엇보다 청혼을 한 건 매들린이었다!), 목표한 대로 봄에 식을 올리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 전에 어떻게 노팅엄 가문을 설득해야 할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이안은 그 걱정을 미리 일축했지만, 이전에 험담을 들은 기억이 있는 매들린은 걱정이 조금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아닌데 말이다. 당분간 그 걱정을 하느라 다른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인지 이안은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매들린이 얼마 안 가서 결심을 뒤집기라도 할까 봐, 그는 빨리 식을 올리고 싶어 했다. 일단 서류에 서명부터 하자, 정 급하면 미국에서라도 하자, 변호사나 성직자를 구해보겠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으나 갈수록 이안의 얼굴이 심각해졌고 결국 매들린은 그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이안. 여기서 다짜고짜 서류에 서명부터 하면 영국에 계신 당신 어머니께서 얼마나 서운해하고 놀라시겠어요.]
[그렇다면 놀라지 않게 미리 전보를 부쳐드리지. 그리고 별로 상심하지 않을 거야.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하실 분이니까. 상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래도 인생에 하나뿐인 결혼식인데요…. 그렇게 얼렁뚱땅할 순 없지요.]
[결혼식에 대한 낭만이 있소? 알겠어. 그러니 서류 먼저 접수하고….]
저이가 왜 저러나. 어떨 때 보면 자신보다 더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게 싫은 것만도 아니었지만. 매들린이 그를 어르고 달랬다.
[성대한 식을 원하는 건 당연히 아녜요. 그저 이런 식으로 성급하게 진행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후회? 후회라.]
그 말을 들은 이안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다시 떨어졌다. 화가 난 건지, 서운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자에게 소인배같이 ‘삐졌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안은 꽤 집요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결국, 그 불안증을 잠재우려면 같이 영국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이번에 적어도 끔찍한 뱃멀미는 없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매들린은 지금 가장 좋은 일등실에 머물고 있으니 말이다. 화물칸이랑 가까이 위치한 값싼 객실은 정말 끔찍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훌쩍이는 자신을 위로해준 동료 승객들의 온정이 더 기억에 남았다.
아무튼 두 번째로 건너는 대서양이었다. 후회가 많았다. 돌고 돌아 결국, 끝내지 못한 일들과 인연들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온정 덕분에 말이다. 맥도먼드 부부와 하숙집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왔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 수 있을까.
“생각이 많나 보군.”
남자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를 지경으로 상념에 잠겨있던 모양이다. 그가 등 뒤에서 다가오자 시야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름 정이 들었는지도 몰라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요.”
매들린은 애써 밝게 웃었으나, 그 미소에 약간의 슬픔이 드리워진 것을 남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매들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거칠지만 뜨거운 감촉이 목덜미의 여린 살을 어루만졌다.
“고작 2년 남짓 되는 시간이었지.”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당신은 여기 있어. 그러니 지금에 집중해.”
지금에 집중하란 말은, 지금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말이었다.
남자가 그렇게 여자를 자연스럽게 돌려세워 입을 맞추었다. 아무도 없었지만 나름 열린 공간이었다. 매들린이 자중하라는 듯 손바닥으로 남자의 가슴을 살짝 밀었고, 그는 천천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이렇게 거리낌 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음흠. 매들린이 헛기침하며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더 대담해질 수도 있겠지. 모든 건 당신이 하기에 달렸소.”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구미가 돈 것 같은 표정이 뭔가 좀 낯설었다. 매들린은 한 발자국 뒤로 더 물러섰다.
몸과 몸이 잠시 떨어지게 된 것이 안타까운 듯 남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렇게 애가 타서, 몸이 달아서 어찌하시려나. 매들린이 고개를 돌려 다시 바다를 바라봤다.
“저택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매들린이 애써 둘 사이의 긴장감을 해소하려 주제를 돌렸다. 위장이 묵직한 기분이 그리 편안하진 않았다.
아무튼 노팅엄 저택을 머릿속으로 그리니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그곳은 흰색 천이 둘려 있었는데, 지금은 어떨지…. 매들린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남자는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을 뿐이었다.
* * *
방을 따로 잡은 건 당연한 배려의 차원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지하자 아까의 기묘한 분위기가 떠오르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점점 사회가 개방적으로 변해가면서 자유연애라든가 남녀 간의 금제도 유명무실화되었다. 너도나도 몸부터 겹치는 게 세태였으니까. 이안이 아무리 귀족이라 할지라도 한창 시기의 젊은이인데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겠는가. 그 정도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들린은 아직 남자와 키스만 했을 뿐이었으니까. 한 침대에 몸을 누이는 건 결혼 후의 일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 생에서도 이안과 다른 방을 써왔던지라, 솔직히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 생각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음, 어쩌면 그녀는 하숙집 동생들이 놀려댔던 것처럼 연애 바보일지도 몰랐다.
같이 호텔에서 일하던 제니도 그랬었다. 저렇게 일과 공부만 해서는 세상 기쁨의 반절은 놓치고 사는 거라고 말이다. 거기다 대고 기쁨은 상대적인 거라고 반박했었다. 물론 제니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내가 뭐, 그게 세상만사 모든 거랬어? 매디. 현실적인 쾌락도 엄연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점점 그 욕망이 인정받는 시대가 올 거다, 나는 그런 지당한 말을 하는 것뿐이야.]
‘흠. 역시, 내가 좀 답답한가?’
저는 역시 고리타분하고 자극에는 조금 무딘 면이 있는 건지도 몰랐다. 하기야, 전생에서 몇 년 동안 그 저택에서 살았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수도사들과는 달리 풍족한 먹을거리와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있는 삶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성한 젊은 나이의 남녀가 서로 눈에 불이 튀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바는 또 아니었다.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건 엄연히 다르니까…’
키스 한 번에 혼이 나가고 가슴이 벌렁벌렁하는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부끄럽기 시작했다. 매들린은 침대에 앉아 이마를 싸맸다. 제니와 로즈가 들으면 행복한 고민이라고 욕할 게 뻔하지만, 그녀는 제법 진지했다.
‘무섭다고.’
아직 결혼식은 시작도 안 했는데 뭘 무서워하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다. 부부 생활이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할 거다.
그리고 그녀의 몸은 지극히 ‘현실’이었다.
* * *
“하다 하다 내가 이제 자네 정신분석까지 해줘야 하나. 그런 건 뱃머리를 돌려 빈으로 가서 프로이트 박사님께 받지 그래? 자네 정도면 금방 예약 순번에 오르겠지.”
홀츠먼이 비웃든 말든 이안은 진지했다. 이곳은 거대한 배 안에 위치한 식당, 비싼 배편답게 꽤 괜찮게 꾸며놓은 곳이었다. 법적으로 배 위는 금주법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었기에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국에는 볼 일 없는 미국 부자들이 삼삼오오 술을 퍼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싫으면 네가 떠나야지.”
“약속은 지키시지?”
홀츠먼이 뭐라 쏘아붙였다가 이내 제풀에 지쳐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일단, 요즘은 모든 게 전쟁 전과 다르다고. 친구.”
“무슨 소리지?”
“고매한 귀족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전쟁 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끼리 대뜸 결혼부터 하고 그다음 관계를 쌓아나가는 고리타분한 시대는 지났단 말일세.”
“…….”
물론 홀츠먼은 이안의 프러포즈를 잘 알지는 못했다. 매들린이 한번 거절한 건 알지만, 그의 청혼이 얼마나 비참하게 박살이 났는지 몰랐다. 이안이 몹시 언짢은 듯, 그러나 조언을 듣기는 하겠다는 듯 위스키 잔을 노려봤다.
“지금도 돈 많은 옛날 부자들은 그런 식으로 살겠지만, 매들린은 뉴욕에 물이 들었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자신의 약혼녀가 미국에 물들었다는 말이 그의 무언가를 건드린 것 같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자의 면모가 있다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쿠. 홀츠먼이 한숨을 쉬었다.
“결혼 전, 신혼부부가 울적함에 빠지는 건 의외로 자주 있는 일일세. 자유가 사라지는 것 같고, 내 선택이 맞을지 고민도 하게 되고. 나 자신은 아직 자랑스러운 독신이지만, 주위에 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어.”
“헛소리군. 나는 그녀에게 모든 걸 줄 수 있…”
“이해타산을 너무 따지지 말란 소리야. 나 같은 놈에게 이런 소리 듣는 건 좀 심각한 거야.”
이안이 잠시 침묵했다. 홀츠먼은 맹렬하게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올 독설을 예상했다. 그는 귀족치고는, 아니 귀족이라서 더 사람 열 받게 비난을 쏟아부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내가 모자란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네.”
“이봐. 그런 소리는 아니…”
“나도 두려워. 그녀가 나를 끔찍하게 여길까 봐, 내가 그녀에게 모자란 사람일까 봐. 그래서 물질적으로는 아낌없이 모든 걸 주고 싶지.”
“…….”
“하지만,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 말에는 많은 감정이 함축돼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잘못인가. 젊은 부부가 서로에게 많은 걸…, 기대하는 건 당연한 일일세. 자네 약혼녀도 같은 마음일 테고.”
‘윽.’ 홀츠먼은 노기등등한 노팅엄보다 울적한 노팅엄이 더 무서웠다. 장단 맞추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듣는지 마는지 모를 이안의 초록 눈동자가 유독 어두웠다.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위스키 잔의 녹아가는 얼음을 지켜보던 그가 대답했다. 아니, 혼자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지금껏 지껄인 헛소리는 잊게. 나는 만족하고 있으니까.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