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곳에서 영원히
--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 사이로 왈츠를 추는 사람들이 보인다. 구름은 점점 걷혀가고 호화로운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뚜렷하게 보인다. 홀은 점점 밝아지고 천장에 드리워진 샹들리에의 조명이 찬연히 빛난다. 1855년 무렵의 궁전이다.
-모리스 라벨, [라 발스]의 악보에 메모
완벽한 유리 온실 속의 시간이 흘러갔다. 매들린은 어렸을 적, 어머니가 일곱 번째 생일 선물로 사준 수정구를 떠올렸다. 동그란 유리 안에 집이 있고, 작은 소녀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뒤집으면 다시 밑의 눈가루가 날렸던 것도. 마찬가지로 가을이 겨울이 되고, 햄튼에도 첫눈이 내렸다.
비현실적인 시간 속 시간, 공간 속의 공간. 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에서 떨어진 이안이 손수 가꾼 테라리엄.
둘은 겨울 바다를 산책하고, 책을 나눠 읽었다. 밤이 찾아오고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나서는 세상 이모저모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의자에 앉아 오래오래 타닥타닥 타는 불씨를 바라보는 남자는 말수가 적었다. 하지만 그는 매들린이 던지는 모든 질문에 답했고, 그럴 때마다 고개를 돌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럴 때면 그의 귓가는 불그스름했다.
남자가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전쟁 전에도 순진하거나 여린 내면은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 이상 물러질 수 없다고 이야기했으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녹고 있었다. 얼음으로 된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매들린은 전축에 판을 걸어놓고 음악을 틀어놓았다. 햄튼 별장의 홀은 텅 비어있었다. 화려한 파티는 열리지 않으니, 오로지 둘만의 공간인 셈이었다.
홀츠먼이 툴툴거리면서 뉴욕의 아파트로 도망친 뒤에는 더 그러했다. 이안은 짐을 싸는 그를 보며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빨리 가라는 듯 부추기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여기서 더 늦으면 어두워지겠군.’이라거나,
‘내일 사무실에서 일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어.’라든지.
홀츠먼으로서는 이가 박박 갈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이없어하며 내뺄 따름이었고(‘더러워서 내가 꺼져줘야겠어.’ 한마디는 남겼다), 넓은 저택은 자연스럽게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전축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홀을 울렸다. 당대 최신 유행곡이 아닌, 느릿느릿한 왈츠였다. 전쟁 전의 음률은 우아하고 슬펐다.
멀찍이 기둥에 기대 서 있는 남자에게, 매들린이 다가갔다. 그녀는 부쩍 추워진 날씨에 답지 않게 얇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사르르, 다리에 닿는 옷자락의 감촉이 좋았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팔뚝을 잡았다.
“이안, 당신이 원하는 게 나와의 춤이라면 어때요?”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미소가 피어 올라와 만면에 가득했다. 이렇게 웃기도 하는 이였다. 시원한 이목구비가 미소로 부드럽게 변하고, 당겨진 입꼬리에 흐뭇함이 묻어나왔다.
“…미안하지만, 다리 하나 없는 남자에게 춤을 권하는 건 현명치 못하군요.”
“상관없어요. 새로운 춤을 배우면 되니까.”
우리는 천천히 발을 움직일 거예요. 당신의 의족이 내 다리를 쳐도 좋아요. 아픈 우리는 숨이 차 허덕이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은 채 남겨두기로 했다. 그녀의 목전에 차올랐다 가라앉는 모든 말들을 남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안이 살짝 입을 벌렸고,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매들린이 속삭였다.
“진중한 이안 노팅엄 씨,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손과 손이 맞물렸다. 왈츠는 충분히 느렸고, 둘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춤이라기보다는 부둥켜안은 두 사람이 서로를 지탱하는 광경쯤으로 보였다. 매들린은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남자의 넓은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남자의 심장이 대형선의 엔진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당신의 집으로 돌아갈까요?”
“…….”
남자의 심장이 더 거세게 뛰는 것이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곳에서 영원히 같이 살까요?”
“…아….”
남자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고 깊게 호흡만 하던 그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결국, 청혼에 성공하는 건 당신이군. 하긴,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무릎을 꿇을 수 없으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 거 참 별로였어요. 그리고 횟수로 따지면 당신이 한 번, 제가 두 번 한 셈이지요. 분발하셔야겠어요.”
“예고만 던진 셈이 되었군.”
“그래서, 답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소.”
“그래도 똑.똑.히 말해줘야 알아들을 것 같네요. 제가 원체 듣는 귀가 없어서, 돌려 말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남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극도의 쑥스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무한한 감동이 혼재된 눈빛이었다.
“청혼에 성공했단 말은 이미 했는데. 좋아요. 결혼합시다.”
법적인 증서에 당신과 내 이름을 새기고,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하자고.
그렇게 대답한 남자가 고개를 숙였고, 매들린은 위로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살짝 떴다.
거칠고 부르튼 화상 흉터가 있는 얼굴면이 볼에 닿았고, 그다음에는 그보다 부드러운 입술이 매들린의 볼을 비볐다. 약간 핥는 것 같기도 하고. 매들린은 전에 꾸었던 늑대의 꿈을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의 흐름은 금방 끊어졌다. 이안이 매들린의 여린 입술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치 오랫동안 꿈꿔왔던 순간이었다는 듯이 절박하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뜨거운 혀와 타액이 섞이고 들숨과 날숨이 이리저리 엉켰다. 아까의 진중하고 간지러운 분위기를 일소하는 격정적인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매들린의 목덜미를 붙잡고 열렬하고도 깊게, 그러나 천천히 그녀를 몰아붙였다. 매들린은 이안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간신히 정신을 붙들었다.
결국, 한참 뒤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서야 남자가 매들린을 놓아주었다. 매들린의 흉곽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녀가 정신을 못 차리자 남자가 약간 미안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여자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부축해주었다.
가까스로 현실에 복귀한 매들린이 팔뚝으로 입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키스를 이런 식으로 이상하게…. 하는 귀족은 없을 거예요. 잘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요.”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는 키스는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난폭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살짝 낯설고 무서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싫다면-.”
“싫단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흠.”
“싫은 건 아니고, 너무 잡아먹을 듯이 구니까.”
“억울하기 짝이 없어.”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은 데다가 각고의 인내를 더하고 더하며 참아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잡아먹을 듯이 군다’는 이야기나 듣다니. 억울한 마음에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보자 매들린이 푸스스 웃었다.
* * *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동기들과 하숙집 사람들에게 매들린은 편지를 썼다. 건강이 조금 안 좋아져서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의 편지에는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그녀의 가슴에 얹혔다.
수지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말장난을 곁들였다. 맥도먼드 씨에게는 그간의 도움에 감사하며, 극진한 마음을 담았다. 물론 소정의 수표와 함께.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간의 숙식에 대한 대가는 될 거라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니, 캐롤라인, 그리고….
펜대를 쥔 손목이 뻐근해질 때쯤, 그녀는 엔조를 떠올렸다.
“끙.”
남자에 대한 마음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다. 물론 연애 감정이야 일소된 지 오래였지만, 그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고 배신감도 있었다.
제 복부의 총상이 전부 그의 잘못이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정말 실망스러웠다.
사람을 죽인 거겠지. 아니, 사람‘들’을 죽였겠지.
“…….”
마음이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때, 그 부둣가에서 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제게 오라고 말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무서운 상황이었을 텐데 그는 차분했다. 잔잔한 미소를 한 채로 매들린을 달래는 데에 집중했다.
‘내가 무서워하지 않길 바란 거겠지.’
사람은 복잡하다. 일면으로 판단할 수 없다.
매들린은 편지지를 빈 채로 놔두었다. 끝난 이야기를 굳이 붙잡고 이어나갈 수 없었으니. 대신 짐가방을 다시 열었다. 아직 행장을 다 풀지 못해서 물건들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엔조가 주었던 시계가 자리했다. 흠 하나 없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옅은 하늘색의 가죽스트랩이 약간 바란 정도.
잠시 그것을 일별하던 그녀는 케이스를 다시 닫았다.
* * *
부둣가의 납치극 이후로 경찰은 엔조를 퍽 귀찮게 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정황상 추측일 뿐이었다. 경찰들은 몇 건의 소소한 탈세 혐의를 꼬투리로 잡는 데에서 만족해야 할 게다. 그조차도 집행유예 정도로 마무리되겠지만.
그는 테이블 위에 발을 걸쳐둔 채 시가를 피웠다. 담배가 늘었다. 새벽 2시였다. 일에 열중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짙은 패배감과 모멸감을 씻어낼 수 있을 테니까. 단순히 그 상이군인 귀족 나부랭이에게 밀렸다는 자괴감이 아니었다. 자신의 악업으로 귀중한 인연을 헤칠 뻔했다는 죄책감에 가까웠다.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였다. 제 앞길에 놓인 걸림돌은 도덕이건 사회건 가뿐히 무시하는 자신답지 않았다.
[감히. 너 따위가.]
그때 그 분노 서린 백작의 표정은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졌다’라는 마음이 들지 뭔가.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처절한 사랑들을 한 거람.’
테이블 끝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꾸러미 하나가 있었다.
원형 손목시계였다.
동봉된 편지지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고, 엔조는 처음 그것을 받아들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떤 감정은 늘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엔조 라오네는 매들린을 사랑했고, 그는 그녀를 영영 놓치고 말았다.
“하.”
한 방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