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둘이 함께라면
-- ‘그렇게 해서 외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에서 발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간신히 눈을 붙이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잤을까. 그녀는 다시 그 어두운 곳에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데도 익숙한 차가운 곳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피투성이 남자가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피의 비린 냄새가 더 강해졌다. 매들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이크가 아니야.
서서히 고개를 든 남자의 정체는 찰스턴 경감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총질했던 갱이었다. 아니, 그는 엔조였고 제이크였으며 또 이안이었다.
피 칠갑을 한 이안을 보자마자 매들린이 이를 앙다물었다. 본능적인 공포심에 사냥당한 사슴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건 꿈이야. 분명히 꿈에 불과할진대, 나는 왜 이렇게 괴롭나.
-매들린.
-매들린.
“이안?”
목소리를 들은 매들린이 안간힘을 써 고개를 돌렸다.
* * *
“…헉.”
매들린이 눈을 뜨자 그녀는 제 손이 따뜻하다 못해 불에 델 것처럼 뜨겁단 걸 알아차렸다. 어쩐지 병동에서 눈을 떴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감촉을 알았다. 거칠고 강인한, 귀족답지 않은 손이었다.
매들린이 천천히 붙들린 오른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안.”
“……”
말이 없다. 어쩌면 손을 붙들고 있는 사람이 이안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했다.
매들린의 붙들린 손이 자유로워졌다. 손아귀 힘이 스르르 그녀를 놔주더니, 누군가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문자는 완전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매들린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이안이겠지.’
숙녀의 방이니 하면서 자신이 직접 꾸민 곳에도 함부로 못 들어오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쑥스러움을 타 대답을 못 한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일어난 걸 확인만 하고 가는 걸 봐서는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언제 몸과 몸이 닿은 적이 있던가’라는 제법 능글맞은 말을 하는 그답지 않았다.
‘나름의 배려일 수도 있겠지. 괜히 내가 수치스러워할까 봐 –사실 수치스러워할 일은 전혀 없는데도– 모른 척하기로 했나 보다.’
나름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매들린은 조용히 모로 돌아누웠고 다시 잠을 청했다. 악몽이라도 꾸고 싶을 정도로 졸렸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 * *
다음날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이안이 식탁에 앉아있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테이블의 한쪽에는 신문을 펴두고, 아침을 먹고 있었다. 진한 커피 냄새에 매들린의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왔소?”
이안이 천천히 신문에서 시선을 떼 매들린을 바라봤다. 그녀는 단출한 드레스에 머리를 한쪽으로 묶어 늘어뜨렸다. 햇살을 뒤에서 받은 여자를 바라보며 이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매들린은 살짝 아연해졌다. 하지만 그녀가 곧 표정을 고쳐 웃었다.
“배가 안 고파서 차만 마시려고요.”
“먹는 게 좋겠어.”
매들린은 이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 앞에는 간단한 빵과 잼, 치즈가 접시에 담겨 있었다.
배가 안 고프다고 말은 했지만, 무색하게도 식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매들린이 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에 눈길이 가 있는 동안 이안이 물끄러미 그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또, 그녀가 고개를 들려고 하면 곧바로 다시 신문을 바라보았다.
매들린이 씨익 웃으면서 식사하는 것을 남자가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돌연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타이밍을 잡지 못한 남자가 시선의 방향을 잡지 못했다.
“걸렸어요.”
“…….”
남자가 살짝 인상을 썼지만 싫다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의 흉진 얼굴에 그런 표정이 제법 어울렸다.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무슨,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진 성유물도 아니고.”
“괜찮지 않아.”
“음?”
“괜찮지 않을 수밖에 없소. 납치를 당하고, 총에 맞고.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악몽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들을 겪지 않았소? 그러니 괜찮지 않을 수밖에.”
“……”
“괜히 아무 문제 없는 척하지 말고, 여기서는 편히 쉬는 게 낫겠-”
“고마워요.”
“음. 고마우라고 한 이야기는 아닌데.”
“당신도 스스로에게도 너그러워지면 좋을 것 같아요.”
“이 이상 물러질 여유가 없소.”
“그러면 적어도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면 되겠네요. 저도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할게요.”
매들린의 그 말에 말문이 막힌 이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병상에 누워서 생각한 건데, 내가 이렇게 힘든데 그때 당신은 얼마나 아팠을까 싶었어요. 나 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매들린이 허둥지둥 성급하게 이어나갈 말을 골랐다.
“우리 둘이 함께라면, 모든 걸 완전히 이겨내진 못하더라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하지 않을까요?”
우린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거예요, 같은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웅변조가 되어버렸다. 매들린이 살짝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스스로 다그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끄러워 다시 밥을 먹는 중,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할 때는 서류를 꼼꼼하게 읽는 게 중요하지.”
“네?”
“거래를 통해서 입은 손실은 보장해주지 않는다. 보장해준다면 어디까지, 몇 할 정도를 보장하겠다. 계약을 해지하고자 하면 이런저런 대가들을 지급해야 한다는 말들을 잘 살펴야 해.”
“……?”
“그런 사항들을 제대로 읽지 않고 서명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소. 온전히 서명자의 책임인 거지.”
매들린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뱉는 말의 무게를 명심하란 말이었소. 당신은 지금 하자 많은 상대에게 희망을 주고 있으니까.”
매들린은 살짝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이는 이 행복하게 살자는 이야기를 ‘계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안이 가지고 있는 수십 가지 전술 중 하나였으니까. 자신에게 익숙한 틀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걸까. 공연히 부끄러운 걸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하자 많은’ 사람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기분이 무척 상하는 발언이었다.
매들린의 얼빠진 침묵을 의식한 듯, 그가 작게 헛기침하더니 중얼거렸다.
“나라고 경고 따위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소. 당신의 제안을 수락하고, 영원한 미래를 약속하고, 당장에 붙들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 하지만 나에게 엮여서 당신까지 진창으로 간다면, 그래서 당신이 후회한다면, 나는 더 버틸 자신이 없소.”
아침에 듣기에는 너무 밀도 높은 고백이 아닐까 싶었다. 매들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같이 그 진창을 구르죠.”
“……”
“같이 뒹굴면 되잖아요. 그리고 자꾸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고 계신데, 당신이라도 그건 금지예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당신 같은 부류가 사기를 당하기 딱 좋아.”
그런 꼬집는 말을 하면서도, 남자의 얼굴은 달랐다. 그는 처음 보는 싱글벙글한 미소를 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뻔뻔한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그래요? 그런 기질 하나는 아버지를 닮았나 보네요. 자, 아침 식사 끝났으면, 같이 산책할까요?”
* * *
[같이 진창을 구르죠.]
아, 너무나 기쁘다. 너무나도 기쁘다. 머릿속의 악마가 속삭였다. 침침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추한 존재가 천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밤새 끙끙거리며 꿈결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여자 곁을 지켰다. 암흑 속에서 두 눈이 반짝였다. 밤이지만 어둠에 적응해서인지, 여자의 윤곽이 세세하게 그려졌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여자의 손등을 쓸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와 입술, 그리고 앓는 목소리가 자극적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지만, 딱히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보다 매들린이 자신 없는 꿈속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또, 그녀가 자신과 닮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흥분되었다.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는 자기변명을 주워섬기며 이안은 천천히 매들린의 손등과 손바닥을 쓸었다. 약간 거칠어졌지만, 원체 부드럽고 섬세한 손이었다. 그 감촉에 괜히 위장이 배배 꼬이는 것처럼 속이 불편했다.
“매들린.”
“흐윽…. 안 돼, 안 돼.”
“매들린.”
천천히 매들린이 눈을 떴다.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안?”
이안은 너무도 놀라, 손을 놓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순진한 두 눈을 바라보자 죄책감이 커져갔다.
뜬눈으로 나머지 밤을 새웠다. 내가 도대체 아픈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자책하며 아침을 들었다. 그런데 여자는 언제나 자신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갑자기 같이 행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니 이야기해대는데 평정을 찾기 어려웠다.
그런 말, 농담으로라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은 마음과,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당장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로 구속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서로 싸웠다.
결국, 중언부언 계약서니 서명이니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속 어지럽지 않게 말을 신중히 하라고. 희망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것만큼 잔인한 건 없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또 그를 고문한다.
[같이 진창을 구르죠.]
그 말에는 고집스러운 이안도 저항할 수 없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머릿속 그를 괴롭히는 악마적인 생각들이 고삐 풀린 듯 환희에 겨워 날뛰는데. 그때만큼은 그는 스스로를 벌할 수 없었고, 따스한 빛이 깊숙한 곳까지 내리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