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감히 짐작할 수 없는
3층짜리 크림색 석조주택은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매들린이 도착하기 전에 또 얼마나 들볶였는지 생각하면, 홀츠먼은 씁쓸한 심정이었다. 이안은 절대로 그녀에게 말하지 않을 사실이었지만, 가구를 바꾸고 천을 갈고, 샹들리에를 어쩌고저쩌고 어찌나 신경을 쓰던지.
물론 전부 사람을 시키면 되는 일이었으나, 남자는 살짝 초조해 보였다.
작업자들이 실내를 단장하는 광경을 치밀하게 바라보는 광경이라니. 노팅엄 저택의 실내 장식은 전부 선대 백작부인에게 맡겨두는 그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그저 초조해 보이지만도 않았다.
어찌 보면 들뜬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건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맹수가 포식하기 직전의, 사냥개가 사냥감을 목전에 두었을 때의 그 흥분 말이다.
아무튼, 홀츠먼은 두 사람이 뒷좌석에서 내내 속닥이며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매들린이 씨익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 이안이 눈을 접으며 웃는 것에도 단연 관심 없었다.
그보다 ‘햄튼의 밤’이 이제 영영 끝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떠들썩한 파티라거나, 음주라고는 이제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쩝. 재미없어지겠네.
* * *
매들린은 이안의 코트를 걸친 채로 차에서 내렸다. 당분간 뉴욕을 떠나 홀츠먼의 별장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범인들은 전부 잡혔으니, 하숙집에서 살아도 된다는 매들린의 미약한 권유는 묵살당했다.
[아마도…. 괜찮을걸요?]
[아마도라니. 당신 신변문제를 그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 없소.]
그렇게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결국, 그녀는 이곳에 도착했다.
“당신 짐은 이미 다 올려뒀소. 편하게 있으시오.”
뒤따라 차에서 내린 이안이 다정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매들린이 그를 향해 돌아볼 때였다.
-쪽.
이안이 고개를 적당히 기울여 매들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다. 살짝 촉촉한 소리와 함께 금방 떨어진 입술이었으나 그 무게와 감촉이 남아있어, 매들린은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로 섰다.
“흠. 흠.”
남자가 먼저 시치미를 떼며 걸어나가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매들린의 얼굴이 완전히 발그레해졌다.
‘이 사람 정말!!’
어쩌면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앞서간 남자의 귀 끝 역시 마찬가지로 달아올라 있단 걸 못 본 걸지도 모른다. 결국, 그녀는 숙맥처럼 놀라버렸다는 생각에, 잠깐 발을 구르며 분해했다.
한껏 벅차오른 심정을 발 구르기로 풀고 난 매들린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햄튼의 밤’에서 한 번 봤고, 이안과 말다툼을 한 데이트에서도 본 집이었다. 그런데 실내가 뭔가 달랐다. 뭐라고 딱 짚을 수는 없는데, 좀….
곰곰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생각하던 그녀를 일깨운 건 이안이었다. 그는 난간을 짚고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당신 방은 2층인데, 같이 올라가지.”
“이안!”
매들린이 쪼르르 이안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잽싸게 이안 뒤에 따라붙자, 그가 머쓱하게 웃었다.
“계단을 굴러떨어질 일은 없소. 익숙하니까….”
“그래도요.”
마치 어미 새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에, 이안은 공연히 쑥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무리 상처를 심하게 입어도 내색하지 않고 사람의 도움을 꺼리던 그였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 자체를 거북스러워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당장 제게 관심을 가져주는 매들린이 싫지는 않은 듯,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계단을 오를 뿐이었다.
“요즘도 재활해요?”
“그야 바빠서….”
이안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매들린의 올곧은 눈빛이 더 강렬해졌다.
“안 되겠네, 이 사람. 앞으로는 매일 같이 운동해요. 최고의 전문가를 모실 돈은 있잖아요. 돈은 그런 데에 쓰는 거예요.”
“재밌는 발언이군.”
둘이 대거리하는 모습을 1층에서 지켜보던 홀츠먼이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저거, 저거 봐라? 이안이 계단을 올라가는 꼴을 도저히 못 봐줄 지경이었다.
매들린이 걱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안은 영국을 떠나면서 노팅엄 저택에 상주하던 재활 전문가들을 고대로 데려왔으니까. 매들린이 총에 맞은 이후로 운동을 못 한 건 사실이었으나, 엄살을 부리는 지금의 모습은 기도 안 찼다.
‘저놈, 저거. 맹수인 줄 알았는데, 완전 여우가 다 됐구만.’
요리조리 갖은 술수로 사냥개들을 골려 먹는 여우마냥 교활했다. 그렇게 홀츠먼은 아주 조금, 매들린을 걱정했는지도 모른다. 저 순진한 여자가 저 모습에 다 속아 넘어갈 게 분명했으니까.
아니, 알 바 아니었다. 이안이 매들린을 홀리건, 매들린이 사기를 당하건 말건 정말 알 바 아니니까 신경 끄는 게 상책이었다.
홀츠먼은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몰래 쟁여둔 위스키나 마실 요량이었다.
* * *
매들린은 앞으로 머무를 방에 들어섰다. 방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남자의 배려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노팅엄 저택에서 일할 때, 자신의 숙소를 생각나게 하는 배치였다. 물론 지금의 방이 훨씬 넓긴 했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 없이 따뜻한 색조의 벽지로 꾸며져 있어, 낯선 곳인데도 편한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는 그녀의 단촐한 짐을 담은 가방이 놓였다.
매들린은 방 안으로 지체 없이 들어갔다. 빈틈없이 책이 꽂힌 책장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책장 앞으로 다가서자 심장이 살짝 덜그럭거리는 기분이었다. 꽂이마다 분류가 되어있었다. 간호학, 의학, 생물학 서적으로 꾸며진 맨 왼쪽 책장과 소설로 이루어진 가운데 책장, 그리고 맨 오른쪽 책장은 역사와 철학을 다룬 책들이 꽂혀있었다.
매들린은 한참 아연하게 책장 앞에 서 있었다.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가, 조여왔다가, 한없이 콩닥거렸다. 자신이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입원해있을 때 남자가 방을 꾸미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감히….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
이안은 방문 가에 기대 서 있었다. 나름 신경 써 준비한 약소한 선물을, 매들린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켜보는 중이었다. 너무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매들린이 한참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 아픈 곳이 있는 걸까. 자신처럼 포탄 후유증 같은 거라도 겪는 걸까.
매들린의 뒷모습만 보여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뒷모습이 갑자기 이상했다. 매들린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
이제 숙녀가 머무를 방이니 함부로 들어가선 안 됐다. 하지만 작은 뒷모습이 흔들리는 걸 보자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안이 천천히 매들린에게로 다가갔다.
“매들린. 당신 괜찮-.”
“…바보 같아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애써 그 감정을 무시했다. 당장 슬피 훌쩍이는 자신의 매들린을 달래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다.
이안이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달래기 시작하자 매들린이 더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까지 했다. 그것을 본 남자는 어찌할 줄 모르며 몹시 당황해했다.
“매들-.”
“당신은 정말 바보예요. 왜 내게 이렇게 잘 해줘요?”
흐윽…. 이안이 자세히 고개를 기울여 매들린을 바라보았다. 연신 눈가를 비비는 팔을 조심스럽게 한 손으로 치워놓자 그제야 여자의 표정이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울면서 웃을 수도 있군.’ 잠시나마 꽁꽁 얼어붙었던 남자의 심장이 다시 맥동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효과가 좋을 줄 알았더라면, 더 크게 만들어 줄 걸, 그랬어. 별수 없이 도서관이라도 세워줘야겠군.”
“도서관보다 이게 좋아요. 그리고 날 울리는 게 너무 보람차고 좋은가 보죠?”
“기뻐서 우는 거라면 계속해서 울리고 싶은데.”
“…원래 이렇게 얄미운 사람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매들린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 무도회장에서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게 춤을 청하던 이안을 떠올렸다. 살짝 능청스럽고 자신만만하기 그지없던 청년의 모습을 생각하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 이안은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모든 시간의 이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그 깨달음에 가슴이 더 아팠다. 왜 이러지? 총에 맞은 후유증일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같이 돌아가면, 저택으로 가면….”
남자가 매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만을 위한 서재를 만들어주리다.”
매들린의 흐느낌이 잦아들어갔다.
몰래 이안의 서재에 침입해서 <탬벌레인 대왕>이니 하는 책들을 꺼내와 빌렸던 나날들이 있었다. 말이야 ‘당신 책도 내 책이고 장미정원도 당신 거다.’ 얼버무리긴 했지만, 사실 그녀는 책은 핑계고,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붙여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서재에 들어설 때마다 남자의 요새에 침입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곳의 모든 것은 당신 거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겁이 났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그녀는 정말 겁쟁이였다.
“…서재도 그렇고, 문설주에 달린 그 우스꽝스러운 가고일을 다 떼어버릴 생각에 벌써 흐뭇하네요.”
“진심인가? 가고일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 줄은 몰랐소. 나름 노팅엄 저택의 상징 아닌가.”
남자가 눈썹을 기울이며 놀란 척, 농담을 던졌다. 매들린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그래서 계속 울리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그는 있는 힘껏 매들린을 달래고 있었다.
“가고일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니, 정말 문제가 심각하네요.”
매들린이 씨익 다시 그녀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안도 마주 웃었다.
‘그래, 당신은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더 보기 좋아.’
…그리고 가고일을 떼어버린다 했으니, 그건 노팅엄 저택의 안주인이 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모르는 척할 수 없도록, 똑똑히 기억해두는 게 좋겠어.’
그의 치밀한 성격이 어디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