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이성을 놓아버린 (81/121)

80화. 이성을 놓아버린

‘미친놈.’

홀츠먼은 이안 노팅엄이 완전히 이성을 놓아버린 모습을 처음 봤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랐다. 두 번 봤다가는 황천길에 갈 것 같으니까. 총이라도 있으면 당장 자신을 쏴 죽일 기세였다.

‘모르지. 정말 죽였을지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남자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았다. 전쟁이 그를 그렇게 광인으로 만든 건지, 원래 광적인 기질이 개화한 건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핏기가 완전히 가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이안 노팅엄이 밤늦은 시간 제 집무실로 쳐들어왔다.

“음, 웬일인가?”

홀츠먼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심야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H.G 웰스라는 영국인 작가가 쓴 <타임머신> 소설을 각색한 극인데, 미래와 현재를 오가는 게 허무맹랑하면서도 묘하게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결말을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 눈앞의 웬 귀기 어린 불청객 때문에 말이다. 홀츠먼은 짜증이 나기보다는 궁금하고, 또 긴장되었다. 이안은 용건 없이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저 모습은…

절박해 보인다.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홀츠먼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안이 말했다. 

“뉴욕 경찰청장을 만나고 싶다.”

“갑자기, 무슨-.”

“매들린이 납치됐어.”

점입가경이었다. 홀츠먼은 라디오를 껐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금주법으로 마피아들이 횡행하고 전반적으로 흥청망청한 사회가 되면서 뉴욕의 치안이 최악이긴 했지만, …매들린이 왜?

하지만 제게 온 걸 보니,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저기, 백작 각하. 진정…. 아니, 진정은 안 되겠지만, 일단 좀 더 내게 정보를 줘야겠어. 그래야 무슨 일이 됐건 도울 수 있지.”

이안이 잠시 터진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마치 군대에서 상부에 보고를 하는 어투로 굵고 명료하게 사건을 전달했다. 사람이 지나치게 흥분하면 오히려 차분해진다더니, 딱 그런 경우였다.

매들린이 마피아들에게 납치라. 젠장. 그 이탈리아놈이랑 얽힌 문제가 분명했다. 엔조 라오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경까지 될 줄은 몰랐다. 뒤가 구리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마피아들과 공조 관계인 줄 알았지, 놈이 상대 일파에게 원한을 단단히 샀을 줄은….

“말했으니 이제 청장 번호 내놔. 주소도 상관없겠지.”

이안이 한숨을 쉬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뉴욕시 경찰청장이라. 홀츠먼은 재빨리 제 두뇌 속의 인명사전을 뒤졌다. 땅딸막하지만 꽤 다부진 체격의 중년 남성이 금방 떠올랐다. 홀츠먼은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경찰청장은 임명직이니, 시장을 통해 금방 연락해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홀츠먼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비열하게 굴고 있단 걸 알면서도 무시무시한 남자에게 말했다.

“내가 시장을 통해 개인적으로 부탁을 할 수 있지만, 솔직히 말해 무리한 부탁이야. 많은 수의 경찰들을 움직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

그와 동시에 홀츠먼은 멱살이 잡혔다. 남자의 동작이 어찌나 날랜지, 또 얼마나 손아귀 힘은 강한지, 홀츠먼의 길쭉한 몸이 들어 올려질 정도였다. 재활이 아니라 군대 훈련이라도 받은 건지, 다친 사람 같지 않았다.

“낭비할 시간 없어.”

“큭…윽.. 이사벨-.”

홀츠먼의 입에서 이사벨이 나옴과 동시에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잠시지만, 이안이 분노로 완전히 눈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그가 놀라우리만치 거센 힘으로 홀츠먼을 패대기쳤다.

“이사벨을 만나게 해달라? 고작 그따위 부탁으로 흥정하려는 건가.”

“…이해가 빠르군.”

홀츠먼은 발길질이나 주먹질을 예상하며 눈을 가늘게 떴으나, 이안은 묵묵부답으로 서 있었다. 그는 정확히 3초 뒤에 대답했다.

“좋다. 그게 너의 교섭안이라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얼마든지 만나게 해주지.”

“…….”

이안이 분노를 억누르려는 듯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침음했다. 분노도 낭비라는 듯, 차분한 절망이 그의 이목구비에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들린을 구해다오. 그레고리. 이렇게 부탁하마.”

그리고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예상치 못한 상대의 행동에 홀츠먼은 뿌듯하기보다 무서워졌다. 오금이 저려서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이안이 아마 살면서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게 아니었을까. 선대 백작 부부에게도 절대로 안 했을 행동이었다.

홀츠먼은 살면서 이안이 제게 무릎 꿇을 일이 생길 줄 몰랐다.

‘그닥 기분 좋진 않군.’ 홀츠먼은 곧바로 전화기를 향해 다가갔다. 무서워하거나 꺼림칙해야 할 시간도 없었다.

전화번호를 돌리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다행히 한 번에 전화를 걸었다.

지체할 수 없다. 정말로 매들린 로엔필드가 죽어버리면, 곤란해질 게 분명하니까. 또, 그녀가 말한 대로 시간은 모래알처럼 빠르게 손아귀에서 사라지니까.

* * *

정해진 면회시간이 끝나자 이안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한 손으로 느릿느릿 서류를 그러모으는 모습이 미심쩍었다. 정말 마지못해 나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굵은 눈썹이 미세하게 내려가 있고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걸 보아 살짝 풀이 죽은 것 같기도.

‘아니, 정말이지…. 요새 나 왜 이러는 걸까.’

총에 맞은 부위는 복부지, 머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가 귀엽다느니, 풀이 죽었다느니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드니, 이건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나마 잔재주로 면회시간을 끌려는 이안의 술책은 간호사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은은한 무표정으로 이안을 노려보는 것이, 아주 단호했다.

‘음. 간호사라면 응당 저렇게 무른 면이 없어야겠구나.’

상대가 아무리 부자여도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모습이 귀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잡생각도 이내 증발하고 말았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절모를 집어 든 것이었다. 그가 누워있는 매들린을 향해 모자챙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또 오겠소.”

“…네.”

어쩌면, 남자보다 더 풀이 죽어 보이는 건 매들린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매들린을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고작 하루뿐인데도,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남자가 저렇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니 신선했다. 아무튼 그렇게 느릿느릿 남자가 나가고, 병실에는 간호사와 매들린 둘이 남았다. 간호사, 브리지스 양은 손길이 야무지고 말수가 적었다. 젊지만 관록 있는 솜씨에, 환자의 처지에서도 안심이 갔다.

아무리 말수가 적다 해도, 매들린이 계속 말을 걸다 보니 그녀도 자연스럽게 대꾸하게 되었다. 정신없는 다인실에서는 이런 한담을 나눌 수 없을 거다.

바쁜 간호사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없으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수다를 떨면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그런 심정을 아는지 브리지스 양도 무심하게 어울려주었다.

매들린이 며칠간 대화를 통해 얻어낸 정보로, 그녀는 콜롬비아 대학교 간호학과 졸업생이었다. 그녀는 그 전설적인 간호사 매리 너팅에게 직접 사사하였다고 했다.

“여자도 교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죠.”

브리지스 양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멋있어요. 대단해요. 너팅 부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 얼마나 좋으셨을까요?”

“멋있을 것까지야.”

매들린의 반짝이는 눈빛을 받은 브리지스 양의 귓가가 붉어졌다.

“저도…. 끝까지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거리를 활보하다가 총을 맞는 통에. 매들린은 억지로 유쾌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릴 도리는 없었다.

“…부군이 반대하시나요?”

브리지스 양이 처음으로 매들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차분한 눈동자가 매들린을 향했다.

“일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더군요.”

일을 그만두면 학교를 세워준다고 했다는 말은 굳이 안 했다. 남사스럽게 들릴 게 뻔했으니까. 브리지스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부군은…. 로엔필드 양을 정말…”

사랑하고 있어요.

브리지스 양이 한참 단어를 골랐다. 사랑? 아낀다? 어떤 표현이 좋을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 어떤 표현도 적합하지 않은 듯했다. 브리지스 양은 매들린 로엔필드가 처음 병원으로 왔을 때가 지금도 생생했다.

여자는 피투성이였다. 그녀는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이안 노팅엄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얼음처럼 침착하고 기민해 보이던 남자는, 여자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무너져내렸다. 벽에 기대어 웅크린 모습이, 흡사…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안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

매들린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로엔필드와 노팅엄이라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브리지스 양은 더 캐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켜켜이 쌓인 사연의 무게를 부러 들추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지 않는 게 현명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 * *

매들린이 퇴원한 날은 가을이었다. 바깥이 쌀쌀한 나머지, 매들린은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이안이 코트를 벗어주려 했다.

“금방 차로 들어갈 텐데요.”

“지금 가장 몸이 약할 때요. 잠자코 입으시오.”

병원 문턱에서 잠깐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홀츠먼이 중얼거렸다. 늘 웃는 상이던 그조차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눈꼴 시려서, 원.”

“…….”

그 말을 들은 매들린의 얼굴이 발그랗게 익자, 이안이 홀츠먼을 노려봤다.

“그럼 보지 마.” 

늘 매들린에게 침착하고 공손한 말투를 쓰던 그가 돌변해 투박하게 대꾸했다.

“……”

아오, 진짜. 아니다, 괜한 말을 한 내 잘못이지. 그럼 그렇고말고. 홀츠먼은 혀를 찼다.

“자. 이제 별장으로 가보실까요. 밀주와 마약의 소굴 뉴욕에서 벗어나 꿈과 희망이 가득한 롱 아일랜드주로 출발!”

다분히 비꼬는 투로 외친 홀츠먼이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오늘만큼은 운전사를 자처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덕분에 두 사람의 눈꼴신 애정행각이나 목격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안과 매들린이 뒷좌석에 탔다. 차체에 쏙 들어간 매들린과 달리, 이안은 차에 구겨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다리가 원체 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둘은 계속 서로 속닥거렸다. 매들린이 장난스러운 말을 귀에다 속삭였고, 이안이 푸스스 낮게 웃었다. 그의 엄숙하던 눈가가 소년처럼 접혔다.

정말 못 볼 꼴이었다.

‘와우. 아무리 둘이 좋아도 그렇지, 나는 벽지 취급이군.’

그러나 툴툴대는 홀츠먼의 은근한 마음 한편에 따스한 기운이 지펴 올라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사벨을 두고 협상을 건 것은 미안했지만, 그도 꽤 한 고생했다. 시장에게 부탁하고, 의원들에게 사정사정하고, 경찰청장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던 것이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세요.’

술에 진탕 취한 그에게 올곧은 얼굴로 그 말을 해준 여자였다. 그녀와 제 친구(라기에는 미묘하지만)가 행복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이해타산적인 그로서는 매우 낯선 감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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