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구명줄
병상에서의 해후는 안타깝게도 길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매들린을 진찰하러 의사와 간호사가 나타나는 통에 이안은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줬다.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지만, 문제없어야 할 겁니다.”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협박 같잖아요. 왜 괜히 선생님들 부담스럽게 그러세요…”
찌릿. 이안이 째려다 보는 통에, 매들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일단 다친 내가 죄인이지. 죄인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이안이 천천히 나가고 난 뒤, 의료진들은 침착하게 매들린의 상태를 점검했다. 아직 복부가 무척 아팠지만, 모르핀을 더 맞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의연히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나요?”
“사흘 됐습니다.”
침착한 얼굴의 의사가 대답해줬다. 의사가 진찰하는 사이 간호사가 매들린의 환자복을 조심스럽게 들춰, 환부를 확인했다.
“역시 전 총에 맞은 거죠?”
“…치명적인 곳에 맞은 건 아닙니다.”
맞기는 맞았나 보군. 아무리 빗맞았다지만 마피아들의 토미건에 맞고도 살아남은 게 신기했다. 계단에 굴러떨어지고, 총알 세례를 당하고도 살아남다니. 아무튼, 질기고도 질긴 목숨이었다.
아니. 질긴 건 매들린의 목숨이 아니라 이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려는 자신을 건져낸 것이 이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꼭 붙든 큰 손이 그 증거였다.
“보기 흉한가요?”
매들린이 간호사에게 말을 걸었다. 흉터가 남는 것 자체에는 큰 유감은 없었지만, 괜히, 남자가 알면 슬퍼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괜찮아요. 크게 더 흉지거나, 곪는 일은 없을 거예요, 주기적으로 붕대를 갈아주면 돼요.”
보기 흉하지 않다는 거짓말은 안 한다. 매들린은 이해했다. 자신도 간호사였으니까. 간혹 크게 다친 병사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면 곤혹스러웠었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로엔필드 양. 지금 당장 말을 계속하기엔 피곤할 수 있으니까, 부디 휴식을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말입니다. 의사의 당부에 매들린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불안해서 계속 말을 걸고는 있었지만, 지치고 괴롭고, 은근히 배도 고팠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눈꺼풀을 다시 닫았다.
* * *
…아마 뉴욕 전체에서 수배할 수 있는 가장 비싸고 좋은 병실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정말 여러 가지로 남자에게 막대한 신세를 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살짝 씁쓸했다.
하지만 병실의 쾌적함이 씁쓸함과 미안함을 압도했다. 매들린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눈길 닿는 모든 곳이 깨끗하고 아늑했다. 게다가 1인실이라니. 이런 병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솔직히 월시 부인의 하숙집보다 호화로웠다. 개인 전담 의사와 간호사들이 챙겨주는 세심한 간호도 있었다.
깨어난 지 며칠이 더 지나고, 매들린은 이제 일어서서 병실 안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안이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지만 않는다면 좀 더 걷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저를 무슨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지켜보고 계시네요.”
“…총을 맞다 기절해서 죽다 살아난 환자 보듯이 하고 있네만.”
“…. 사실적시가 지나쳐요. 역시 신랄하시네요.”
“환자는 한 사람으로 족하지 않소. 부부가 다 같이 아프면 그것도 보기 애처로우니 말이야.”
“…….”
부부라. 분명 부부라고 했어. 매들린이 씨익 ‘또 걸렸다’는 미소를 짓자,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 끝이, 아니 귀 전체가 불그죽죽해졌다. 몇 번 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찌푸린 그가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그렇단 이야기야. 다쳐본 사람으로서 말하지만, 상처 입는 게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요. 평생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 앞으로는 조심-.”
“그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이틀 사이에 골백번은 더 들었어요.”
“그런가? 아직 모자란 것 같군, 천 번은 더 말해야 인이 박일까.”
잔소리 듣는 걸 즐기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안의 기세가 다시 돌아온 게 다행이었다. 눈을 떴을 때 본 창백한 얼굴의 이안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잊지 못할 슬프고 괴로운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매들린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돌아다니다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의자에 앉아있었고, 지팡이는 아무렇게나 벽에 기대 세워둔 채였다.
그녀가 다가가자 남자의 입매가 질끈 다물렸다. 가끔 매들린은 남자가 자신을 편하게 생각하는 건지, 여전히 제 옆에서 긴장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렴 좋았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남자의 화상 입은 쪽 얼굴을 쓸었다.
남자가 큰 개처럼 그 손길에 기대는 것을 느끼며 매들린이 나직이 말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지금 당장은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어. 나는 지금 욕심이 많아서, 당신이 내게만 집중해줬으면 좋겠거든.”
그 말을 하며 남자가 눈을 치켜떴다. 부리부리한 눈매는 다소 도발적으로, 순종적으로도 보였다.
“욕심쟁이네요. 바라는 것도 너무 많고.”
“애초에 거기에 먹이를 주기 시작한 건 당신 아니었나? 이런 걸 보통 자신이 자초했다고 하지, 아마.”
오. 이제 제법 받아치시네. 매들린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이안의 이마에 입술을 쪽, 가져다 댔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자신을 상대하던 이안이 단단하게 돌처럼 굳는 것을 느끼며 매들린은 이마에 입술을 대고 웃었다.
“자, 먹이 하나 더.”
“……”
“음?”
“더. 더 주시오.”
아무리 받아도 모자라. 누가 하면 낯부끄러워 죽을 말을 하며 잠자코 볼을 내어주는 이안이 어째선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볼에 간식을 하나 더 줬다. 이안이 희미하게 웃는 게 입술에 맞닿은 볼 근육을 통해 느껴졌다.
혹자는 공포심을 느낄 수도 있는 미소였으나, 그녀에게는 괜찮았다.
그러니 문제없을 터였다.
* * *
당장은 물어보지 않겠다 약속했지만, 매들린으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기절하고 난 뒤의 기억은 깡그리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엔조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이안에게 물었다가는 피바람이 불 것 같으니 참는 수밖에.
학업과 직장도 문제였다. 며칠이나 무단으로 출근을 안 했으니 짤리는 건 당연했다. 매들린은 그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쯤 되니 매들린도 이안 노팅엄이라는 자에 대한 경험치가 생긴 모양이었다.
회계부서로 간 거, 하숙집의 번쩍번쩍한 가전제품들…. 전부 남자가 설계한 계획의 일부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안이 짜놓은 거미줄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소름 돋아야 할 텐데. 어쩐지 소름 돋기보다는 차분해진다.
‘나도 같이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지.’ 남자와 함께 같이 미쳐서 빙글빙글 춤을 추는 것일지도. 안 그래도 이상한 남자가 자신의 총상으로 인해 밖에서는 얼마나 길길이 날뛸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책임감이 막중했다.
어쨌든 고요한 그의 내면에 이런 파도를 일게 한 건 바로 그녀였으니까.
* * *
이안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병실에 누운 매들린을 방문하지 않았다. 생활에는 불편함이 전혀 없었고, 모든 것이 쾌적했지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이안을 자극하지 않기로 결심한 매들린이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이안은 아예 자신의 서류를 병실로 가지고 와서 매들린 옆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중간중간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족족 답해주면서도 일을 놓지 않는 집중력이 대단했다.
지금도 그랬다.
“수지가 보고 싶어요.”
“그 붉은 머리 잡화점 여자 말하는 건가.”
“…개인적으로 소개해준 적도 없는 수지를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할까요….”
매들린이 살짝 초탈한 표정을 지으며 이안을 바라봤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던 이안이 그제야 힐끔 매들린을 쳐다봤다.
“…당신이 빨리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좋지.”
하. 기도 차지 않는다. 전쟁 전의 이안의 뻔뻔스러움이 되살아난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안의 그 미묘한 능글맞음과 치밀한 성격이 맞들어지니 논리로 이기기 힘들었다.
“연애는 첩보가 아니에요. 이안. 나는 적군의 전초기지도 아니고, 당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재무제표의 숫자도 아니라고요.”
이안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빠하는가 싶었지만,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내려놓자 입매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연애’라는 표현이 그를 무척 즐겁게 만든 건 분명했다.
‘아니. 요점은 연애 따위의 단어가 아닌데…’
이안이 매들린에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당신도 내가 맞았단 걸 인정해야 해. 잠깐, 아주 잠깐 당신을 놓친 바람에 완전히 완전히 잃을 뻔했으니까.”
“…….”
…잠깐 나를 놓친 바람에 완전히 잃을 뻔했다라.
자신에게 사람을 붙인 건 분명했다. 납치되기 며칠 전부터 등 뒤로 느껴졌던 시선이 갱들의 것인지, 이안이 고용한 사람들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이 좋다고만 할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안과 끝장을 봐서라도 그 집착증을 누그러뜨려 놨겠지만, 솔직히 말해 정말로 납치당해버린 입장에서 할 말이 많지는 않았다.
‘…통제 욕구를 완전히 확신으로 만들어버렸군.’
그래서인지 이안은 지금 자신이 매들린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내비치고, 아주 뻔뻔했다.
“좋아요. 이해했어요. 나를 구하러 그렇게 많은 경찰이 움직인 것도 당신이 먼저 손을 써서라는걸. 줄곧 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신상에 문제가 생긴 것도 금방 알았겠군요.”
“그런가? 확인해줄 수 없는 사실이군.”
그가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능청 피우지 마시지. 그렇게 한마디 쏘아붙일까 하다가도, 그녀는 먼저 할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고맙다고 해야겠어요.”
“……”
“오해하지 말아요. 나를 감시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편의를 봐주거나 그런 게 고맙다는 건 절대 아니니까요. 그저… 구해줘서 고맙다고요.”
서류에 집중하는 이안은 그 말을 듣지 못한 척했으나, 매들린은 그의 입꼬리가 이미 위로 경사져가고 있단 걸 확인했다. 철면피를 유지하지 못한 채로, 뿌듯한 미소를 만개하고 있는 그를 보니 이거 원….
귀엽다고 해야 할지, 골 때린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돌아버렸다는 증거였다.
어쩔 수 없었다. 이안은 그녀가 풀어야 할 문제이자, 마지막으로 내려온 구명줄이었다.
…그리고 그 표현에는 모순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