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농간(2) (79/121)

78화. 농간(2)

매들린의 볼이 축축했다.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굳이 멈출 정신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윽….”

남자가 아픈 신음을 입술 사이로 내뱉더니 고통을 참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가 아픈가. 매들린의 눈물이 그제야 멈췄다. 그녀가 재빨리 남자를 살폈다. 협심증? 다리에 마비라도 온 건가? 아니면, 포탄 증후군…?

목발에 온몸을 기댄 남자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가 갑자기 무릎을 굽히더니 몸을 웅크렸다. 몸체가 워낙 커서 커다란 산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들린도 놀라서 같이 무릎을 꿇었다. 

“아파요? 정말 심하면 진정제를….”

“…그만.”

매들린이 남자의 손을 더듬어 짚었다. 

“의사를 불러야-.”

“싫어. 그냥.”

그냥 이렇게. 나를 안아줘. 매들린, 나를 안아. 

그렇게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매들린은 조심스럽게 몸을 굽혀 웅크린 남자를 껴안았다. 그의 너른 등을 양팔로 다 감쌀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일단은. 

이안은 제 얼굴을 매들린의 왼쪽 어깨와 목 사이에 묻었다. 그렇게 얼마간 껴안고 있었을까, 남자의 바들거림도 멈추었고, 매들린은 자신의 어깨가 축축해진 걸 느꼈다. 

남자가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이 주마등이라거나, 죽기 전에 보는 환상이라거나, 뇌의 장난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렇게 둘이 부둥켜안는 동안 주위가 어둠으로 점점 잠식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무대의 조명이 하나둘씩 꺼지는 것처럼. 매들린이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그의 품을 떨치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매들린을 더 강한 손길로 얽어맸다. 

“가지 마.”

매들린은 자신이 움켜쥔 이안의 몸까지 점점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를 두고 가지 마. 매들린, 제발. 제발, 나를 이 추운 곳에 혼자 놔두지 마.”

낮은 목소리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듯 날것이었다. 

“이안-.”

어느덧 자신을 껴안고 있는 남자까지 완전히 어두워졌다. 남은 것은 목소리뿐이었다. 

-나를 버리지 마.

남자까지 완전히 사라지자, 매들린은 앞으로 넘어졌다. 기도가 콱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치고는 너무 슬프지 않은가. 이안과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그녀는 줄곧 이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언제나 그녀 몫의 죄책감으로 남아, 지옥의 문턱까지 함께했다.

“으윽… 흐윽…”

매들린이 짐승처럼 몸을 떨며 울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를 누군가가 불렀다. 

[잠시 화풀이를 할까 했는데, 네가 너무 슬프게 울어서 내 기분까지 잡쳤어.]

아까의 그 목소리였다. 매들린이 주먹을 쥐었다. 

“누구세요? 누구냐고요!”

고개를 떨군 매들린의 눈앞에 구두를 신은 발이 보였다. 고개를 찬찬히 들자, 그곳에는 다름 아닌 자신이 서 있었다. 고고한 얼굴의 로엔필드 백작부인이었다. 머리칼을 틀어올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우아하고 처연한 여성. 그녀는 부채 하나를 말아쥔 채 눈앞에서 울고 있는 매들린을 한껏 내려다보고 있었다. 

[놀랐어?]

“누구냐고 물었어.”

[…. 미안하지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군.]

매들린이, 아니, 매들린의 형상이 몸을 굽혔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곳의 역사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잖아.]

매들린은 자신의 형상을 한 이의 황금빛 눈을 마주치며, 본능적으로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이사벨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켈트인들이 모시는 신들의 제단 위에 지어진 성당, 그리고 그 성당을 허물고 만들어진 것이 노팅엄 저택이라 했다.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네. 하지만 이게 지금 누굴 탓할 일이 아니긴 하지. 어쨌든 내 잘못이긴 하니까.]

눈앞의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내게 제물이 떨어진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만 흥분하고 말았지 뭐야.]

이어지는 알쏭달쏭한 이야기들에 갈피를 잡지 못한 매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여자가 갸륵한 미소를 지었다. 

[요약하자면 이래. 네가 하필이면 제단이 있는 곳 바로 위에서 피를 흘린 탓에…, 내가 오해를 좀 했었어. 와! 드디어 내가 먹어치울 수 있는 공양물이구나 싶어서 집어 들었는데…]

웬걸, 제물이 아니라 그냥 운 나쁘게 굴러떨어진 어린양일 줄이야. 

[생명을 잘못 거둬들인 실수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일이 또 너무 커져 버리고 말았지. 원래 계획 대로였으면 목뼈가 부러진 너를 돌려보내 병상 위에서 천천히 죽게 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돌려보낸 시간이 안 맞아버렸을 줄이야. 너를 엉뚱한 시간과 장소로 돌려보낸 탓에 미래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어.]

“그래서 지금이라도 내 목숨을 가져갈 건가요?”

[내가 왜.]

여자가 괜한 추궁을 받아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 믿지도 않는 사람의 공양물 따위는 받고 싶지 않거든. 신선한 제물이 싫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게다가 난 사람보다는 가축이 더 좋아.]

“날 돌려보내 줘요.”

[허. 도와주고 싶어도 이번 죽음은 내 탓이 아닌 걸 어쩌냐.]

눈앞의 켈트 신은 꽤 괴팍한 성정인 모양이었다. 눈을 굴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그녀의 심술궂은 표정에 매들린은 공연히 절박해졌다. 눈앞에서 남자를 잃고 나니 지금 일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절박하게 운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제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을 봐야 해요.”

[사랑 이야기라. 참 흥미롭군.] 

“내가 너무 많은 잘못을 해서, 바로잡아야 해요. 이렇게 끝날 순 없어요. 그러니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살아야 해요.” 

[…마음이 아프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하지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네 의식이 희미해진 이 틈을 타 잠시 환영을 보여주고 말을 붙이는 것 외에는.]

“윽…”

매들린이 몸을 웅크렸다. 죽음은 이렇게 외로운 것이었다. 한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 누군가와 답이 없는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괴로웠다. 

[네가 죽어버린 후의 일들이 궁금하지 않아?] 

“……”

[백작이 완전히 미쳐버려서 저택의 악명만 높아졌어. 그의 나머지 삶은 느린 자살이었지. 너와 대화를 나누겠다고 영매를 부르는 일도 있었어.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말이야. 그러다 제풀에 지쳐서 그냥…. 저택을 완전히 없애버렸어.] 

그가 제 손으로 저택을 부쉈다. 자신이 묻힐 무덤을 파헤쳤다. 

칼로 가슴을 가르는 것 같은 고통이 닥쳐왔다. 갈라진 심장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아프다. 아파. 총상보다 더, 괴롭다. 

그리고 그렇게 가슴을 부여잡고 웅크린 때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매들린.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악마도 부르면 나타난다더니, 정말 지긋지긋한 양반일세.]

“……?”

[네가 운이 억세게 좋은 여자인지, 지독하게 재수 없는 쪽인지 헷갈린다니까.]

그러는 사이 위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는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둘이 서 있는 어둠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하고 무서운 목소리였다. 매들린이 일어서서 뛰기 시작했다. 

“이안, 이안!”

이안. 나, 살고 싶어요.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요. 당신을 보고 싶어요. 매들린이 그를 불렀다. 그녀는 목이 터져라 외치며 끝없는 어둠 속을 질주했다. 그 끝에 빛이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웃었다. 금발이 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녀는 따스한 빛 속에 잠겼다. 

* * *

눈을 떴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바라본 것은 천장이었다. 알지 못하는 낯선 방에 누워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 엄청나게 길고 괴롭고, 또 애처로운 꿈을 꾼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 아…?”

목이 타는 것처럼 건조하고 입술이 버석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나오는 말들도 전부 고장 난 뿔피리처럼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그녀는 제 손이 불처럼 뜨겁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이유가, 이안 때문임을 알았다. 남자는 그녀가 누운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었는데, 매들린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매들린이 붙들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남자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완전히, 뭐라고 해야 할까. 피폐해 보였다. 지난 생애, 자신을 추궁하던 그 얼굴처럼 무서웠다. 늘 단정하던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하지만 무섭다는 생각 자체는 들지 않았다. 매들린은 어이없게도 농담을 던져,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제가 해냈어요. 제가 해냈다구요.”

쉰 목소리가 자신이 듣기에도 어색했다. 매들린이 피식, 웃었다. 제 꼴도 이안 못지않게 엉망진창일 거란 건 알았다. 

“…매들린.”

“살았다고요. 나, 얼마나 누워있던 거예요?”

“…지금…농담할 정신이 있어?”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울 것처럼 중얼거렸다. 

이안이 장갑을 미처 끼지 못한 흉진 손을 뻗더니 매들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렇게 매들린을 쓰다듬던 그가 별안간 생각이 났는지, 큰 목소리로 의사를 불렀다. 

“천천히 불러도 될 것 같은데.”

“웃기지 마. 당신 때문에 난 지옥에 있었어. 그런 주제에 여유로운 소리나 지껄이다니.”

“지옥에 갔다 온 건 나잖아요.”

“……”

“이안,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이안이 숨을 멈추었다. 그가 그렇게 그녀를 무언가 엄청나게 신기한 존재를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굵은 눈썹이 엇갈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여자야.”

“기억해요? 빗속을 뚫고 달려와서 참전하지 말라고 난리를 쳤었잖아요. 새삼스럽네요.”

“그때도 이상했지. 그런데 갈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아.”

“그래서 싫어요?”

하. 남자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가 축축한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미워하겠어. 그대는 이상해. 그리고, 또 그렇기에 사랑스럽소. 날 이렇게 웃게 만들 정도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