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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농간(1) (78/121)

77화. 농간(1)

엔조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그녀가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강렬한 고통이었다. 

아프다. 

아파.

기절했는데도 아프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매들린은 어둠 속에서 울었다. 한참을 웅크려 훌쩍이던 그녀는,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완전한 공허 속에 있음을 알았다. 

‘나 죽은 건가.’

이번엔 정말로.

하지만 이곳이 사후세계라면 이토록 아파선 안 되는 일이었다. 배가 너무 아팠다. 수천 개의 쇠바늘이 위장에 꽂힌 것 같았다. 

“벌일지도 몰라.”

매들린은 자조했다. 하하. 나직하게 웃은 그녀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엔조의 품 안에서 탄환을 피하지 못하고 죽은 건가 싶었다.

…총 한 발 맞은 것도 아파 죽겠는데, 포탄에 몸이 찢긴 이안은 얼마나 아팠을까. 

당신은 그 어둠 속에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런 요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당신을 더 세게 끌어안아 줬을 텐데. 

하지만 속절없는 후회였다. 그리고 후회하기에도 이미 너무 늦었다. 

“으윽…”

[너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어.]

한참 나락으로 떨어지는 정신을 일깨운 건, 허공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음산하고, 기괴한데도 어딘가 몹시 익숙한 목소리. 그녀는 어두운 바닥을 손끝으로 더듬고 일어나, 주변을 돌아봤다. 

“누구 있어요?”

침묵.

“누구…. 거기 누구 있어요?”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그녀가 딛고 있던 바닥이 사라졌다. 앨리스처럼 끝없는 지하로 추락하고 추락해서 중력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바닥을 치고 나서야 둔해졌던 고통이 점차 다시 돌아왔다. 매들린은 소스라치며 몸을 떨었다. 추웠다. 질끈 감은 눈을 다시 뜨니, 눈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는 형체가 보였다. 매들린이 눈이 가늘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형체뿐만이 아니었다. 

기괴한 헌팅 트로피들, 칙칙한 태피스트리 융단, 어디선가 나는 타는 장작 냄새까지. 그녀는 자신이 노팅엄 저택으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담인 거지…?”

누군가의 질 나쁜 농담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녀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도 전의 일이었다. 형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화난 듯 몸을 뒤틀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가까이.

형체가 움직임과 동시에 매들린은 그가 이안임을 알았고 강렬한 기시감에 휩싸여 입을 벌렸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어.’

전 생애에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기 직전의 바로 그때였다. 손에 땀이 찼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악마의 농간이야.’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이안은 창백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나마 꾸준한 재활과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은 이안과 달리 지금 눈앞의 남자는, 뱀파이어 성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걷는 게 참으로 신기한가 보군.”

눈앞의 그가 중얼거렸다. 매들린이 눈을 계속 깜빡였다. 

다시 돌아간 건가.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다 꿈이었던 거야? 무엇이 진실인지 파악하지 못해 허둥지둥하고 있을 때, 이안은 점점 다가오며 매들린에게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창부처럼 굴면, 멋들어진 왕자님이라도 나타날 줄 알았나?”

아. 저 말을 들으니 그녀가 보고 있는 이안은 정말 전생의 그가 맞다.

지금 자신이 환상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잔인한 사후세계 속에 갇혀있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매들린은 자세를 곧추세웠다. 이안이 목발을 짚으며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처럼 뒷걸음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너무나도 보고 싶은 남자를 다시 만났다는 생각에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갱들에게 납치당하는 수모를 겪을 줄 알았더라면, 이안에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화난 얼굴의 그가 마지막으로 보게 될 그란 걸 알았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왜.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무서워 죽겠는가 보군.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역겨운 게지.”

‘내가 울고 있었나?’

그래. 매들린은 곧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얼굴을 찌푸리며 조용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울면서도 뒷걸음치질 않자, 이안이 살짝 당황한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냉정했고 어조는 음산했다. 

이안이 목발을 짚지 않은 손으로 매들린의 손목을 낚아챘다. 힘이 잔뜩 들어가 멍이 남을 것처럼 강하게 말이다. 

“그 허우대 밑에서는 어떻게 울었는지 궁금하군.”

“……”

가까이서 본 이안은 기억하던 그때와 같았다. 푹 패인 창백한 볼, 살의로 드글거리는 초록 눈까지. 하지만 여전히 그라는 생각을 하자 동요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완전히 저승으로 끌려들어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었다. 

“이안.”

“…….” 

이안의 손아귀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한마디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들린은 전 생애에서 이안의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으니까.

“보고 싶었어요.”

“개수작까지 부리는군. 그것도 그 의사 놈팡이가 알려준 거겠지.”

이안은 냉소했지만 낮은 목소리는 점차 떨리고 있었다.

매들린이 붙잡힌 제 손목을 들어 올리자 이안의 팔까지 딸려 올라갔다. 매들린이 이안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이안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그의 압도적인 살의가 단숨에 휘발되며 엄청난 당혹감으로 변해갔다. 

“…무슨, 무슨 짓이지.”

낮은 목소리는 이제 완전한 당혹감으로 물들어있었다. 이안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매들린의 축축한 입술이 제 거칠고 흉진 손등에 키스하는 감각이 너무 낯설고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

“…….”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사람을 농락하는 것도 정도껏 해. 그래봤자 너는-.”

휴. 매들린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봤자 나는 못 벗어나는 거겠죠. 당신에게서도. 이 빌어먹을 흉가가 무너져내리는 한이 있어도 같이 깔려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 거죠?” 

죽으면 죽을수록 겁이 없어지는지, 매들린은 명경지수 같은 마음으로 남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불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겁에 잔뜩 질렸을 줄로만 알았던 매들린이 말을 쏟아내자 이안은 살짝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눈앞의 여자가 완전히 미쳐버렸나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이안,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그 말에 잠시 아연하던 표정은 이내 깨진 유리 파편처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너…”

“당신은 날 사랑해요. 인정하세요. 솔직히 그 지긋지긋한 집착이며 표현 못 하는 거며 정말 싫었지만, 아무튼 사랑은 사랑인 거니까. 날 사랑해서 이렇게까지 구는 거라면 그렇게 말하세요.” 

“내 감정은 네가 멋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장난감 총 같은 게 아냐. 그런 걸 궁금해할 필요 없어. 넌 잠자코 이곳에서 나랑 함께하면 되는 거야.”

“당신의 감정을 무기 삼으려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이렇게 말할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매들린 로엔필드, 개소리 지껄이지 마. 넌 나를 경멸하고 있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인 것도 날 모욕하고 욕보이기 위해서 아닌가? 사랑이니 뭐니 떠들어댄다고 해서 내가 쉽게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면…” 

남자는 ‘당신은 날 사랑해요’라는 말까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감정을 무기로 삼지 말라고 할 뿐이었다. 

‘결국, 인정은 못 해도…. 그래. 그게 당신의 사랑 방식이었다는 걸 이제 알아.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게 사랑이라면 사랑인 거라고 해두자고.’

“당신이 나를 먼저 놓아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알링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꾸며내고, 흔적을 만들어내고. 당신이 눈치챌 때까지 계속 그 짓을 했어요. 하지만 그걸 다 봤을 텐데도 당신은 계속 참더군요. 몇 달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지금 이렇게 폭발해버렸죠. 역시 내 짐가방을 본 거죠?”

아니면 기차표? 알링턴이 학교 입학을 약속한 편지? 무엇이든 좋았다. 매들린이 자신을 떠난다는 물증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완전히 눈이 뒤집히고 말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까.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매들린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호흡이, 그의 폐부를 오고 가는 들숨과 날숨이 느껴졌다. 남자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였다. 

공기의 흐름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노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여다 올려본 그는 기억했던 것보다 너무도 처연해서 가슴이 아팠다. 

매들린이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나는 당신이 한 번이라도 먼저 말해줬으면 했던 걸지도 몰라요. 가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그랬더라면 나는…”

“…그러면 뭐가 달라지지?”

이안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무도 쓸쓸하고 괴롭다는 듯이.

“이안.”

“그러면 뭐가 달라지냔 말이야. 당신이 누구와 놀아나건 내 곁에만 있으면 된다고 비굴하게 빌어라도 볼까. 마음은 필요 없으니까 몸이라도 있어 달라고.”

“방금 내 말 못 들었어요?”

“…….”

“난 분명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넌 정말-.”

“부정하는 게 편하면 부정하세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안. 한마디만 하면 많은 게 달라져요. 그러니 그런 말 해서 뭐가 달라지냐는 말은 취소하세요.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떠나지 말라고 해요.”

-- 내게 확신을 줘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붙들 수 있게.


…붙들 수 있었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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