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스치듯 만난 인연 아니었나
매들린은 눈에 안대를 두르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밧줄이 묶여있었고 오랫동안 그렇게 있어서인지 온몸이 방망이로 맞은 것처럼 아팠다.
갑자기 엔조의 별명이 도살자라는 게 떠올랐다. 이안이 전쟁터에서 겪었던 광경이 어떤 것이었을지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세상이었다.
매들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냥당하는 쪽이었다. ‘도살자’같이 그럴싸한 별명을 가지려면 몇백 번의 회귀로도 부족할 게다.
거기에 대해서 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열일곱 살의 봄일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의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요행도 세 번은 바랄 수 없는 법이니까.
“여자가 힘이 없네.”
“상관없어. 숨 붙어있는지만 확인해.”
마약이나 관세를 피해 밀수한 물품들을 하역하는 스태튼아일랜드의 외진 부둣가였다. 눈이 가려져 있어 정확한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었다. 적어도 매들린은 자신의 최후 풍경은 눈에 담고 싶었다.
툭. 툭. 차가운 총신이 기분 나쁘게 매들린의 머리를 건드렸다.
“엔조의 여자 취향도 나쁘진 않네.”
“왜 앤디. 저런 요조숙녀가 타입이야?”
“아니. 재수 없어서 싫어.”
“이봐, 다들 집중해. 곧 놈들이 올 거라고.”
“놈들이라니. 분명히 혼자 오라고 해뒀어. 도살자 새끼가 한 놈이라도 더 끌고 오면 여자 머리에 총구멍을 내줄 거야.”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실없는 소리를 늘여놓던 자들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착착. 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매들린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감각은 없었지만, 매들린은 직감적으로 총이 제 머리에 겨눠져 있단 건 알았다.
“뭐, 어떻게 되든 간에 저 여자는 죽은 목숨이지만.”
입에 수건이 둘려 있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몇 번이고 말했다. 자신과 엔조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러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만큼 복수에 눈깔이 뒤집힌 것이리라.
‘엔조는 바보가 아니다.’
혼자 오는 무리수를 감행하진 않을 거야.
지척에서 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곧장 총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 안대 풀어. 적어도 애인이 뒈지는 꼴은 직접 봐두라고 해.”
* * *
안대가 떨어졌지만 어둠이었다. 주변의 바지선과 강 너머 야경이 최소한의 시야를 밝혔다. 매들린은 버석한 눈가를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 앞에 토미건을 든 남자 두 명, 뒤에 몽둥이를 든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저만치에서부터 롤스로이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아일랜드 조직원들은 경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매들린의 가슴이 철렁였다.
설마.
아니다. 엔조는 바보가 아니다. 얼마 보지도 않은 여자를 위해 제 목숨을 버릴 사람은 아니다.
롤스로이스가 멈춰 섰다.
“일단 쏘지 마.”
우두머리격으로 보이는 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운전석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남자였다. 중절모를 쓰고 멋들어진 인사를 하며 나타난 것은,
“안녕.”
엔조였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두 손바닥을 들어내 보였다.
“우리 친구들, 약이 많이 올랐네. 그래도 그렇지 말이야. 사람을 봐가면서 건드려야지. 무리수를 두셨어.”
“하하. 사람을 봐가면서 건드리다니. 사람을 대낮에 죽이고 다니는 도살자놈이 할 소리냐.”
“아니. 나는 건드려도 무방한데 말이죠.”
엔조의 능글맞은 어조가 갑자기 착 가라앉았다. 그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의자에 묶여있는 매들린을 가리켰다.
“저 여자는 정말로, 정말로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이거든.”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들이 덜컥이는 소리가 났다. 매들린은 거의 혼절할 직전이 되었고, 네 명의 갱들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욕설이 귓전을 두들겼다. 매들린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극한의 무력감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인가.
-손들어라. 뉴욕 경찰이다. 손들어라.
“저 미친 백정 새끼가 짭새를 불러들였어!”
“젠장!”
뒤에 선 갱 한 명이 매들린이 묶여있는 의자를 발로 찼다. 매들린은 그대로 의자와 함께 꼬꾸라졌고, 거친 바닥에 볼이 다 쓸렸다. 아팠지만, 고통보다는 토 나올 정도의 공포심이 그녀를 장악했다.
“미친 건가! 경찰을 불러들이면 너도 뒈지는 건 마찬가지야!”
“어허. 다들 진정 좀 해.”
엔조가 여유롭게 웃었다. 매들린은 갱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일어나는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마피아들끼리의 회합 장소에 갑자기 경찰이 난입하다니. 엔조가 경찰을 끌어들였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엔조가 손을 들자, 총을 든 경찰들이 일제히 총을 내린 것이었다. 일사불란한 지휘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저 사람들은 내가 쏘라고 하면 쏠 거야. 마찬가지로 너희들이 쏘면 발포한다. 간단하지? 자. 이 자리에서 바로 협상하자고. 너희들이 멍청한 짓거리만 안 하면, 한심한 목숨 정도는 부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
“개소리 지껄이지 마! 경찰들이 왜 네놈 말을 듣는지부터 설명해!”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갱들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완벽한 동요. 수십 정의 총이 몸에 겨눠지는데 생리적으로 무서울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갱들의 허점을 발견한 게 즐거운 듯 엔조가 비웃었다.
“말했잖아.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고. 그러니 당장 여자 부축하고, 풀어줘.”
“…….”
“머리가 돌아가면 지금 마피아들의 일에 경찰이 왜 개입하는지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친구들. 여자만 풀어주면 없던 일로 해준다고 했잖아. 자. 나는 관대하지만, 높으신 분들은 안 그렇거든.”
엔조가 다시 손을 올리자 경찰들이 다시 총을 겨눴다.
“젠장. 의원나리 딸이라도 되는 거야?”
“그러게 제대로 조사라도 하고 일을 벌였어야지!”
“닥쳐.”
갱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바닥에 거꾸러진 매들린이 끙끙거렸다. 바닥에 쓸리면서 입술이 터졌는지 입에서 비린 피 맛이 났다.
“풀어주면 약속은 지키는 거겠지? 개수작 부리면 같이 지옥으로 가는 거야.”
“경찰 앞에서 거짓말하진 않는다. 어차피 마피아들 구정물 싸움에 공권력이 끼어들 이유도 없다는 건 잘 알잖아?”
매들린은 땅에 뒹굴면서 엔조의 말을 들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순진한 청년이 아니었다. 비열하고 잔혹하며, 유들유들한 범죄자.
“…….”
수런수런 갱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렸다. 아까 전의 살의는 온데간데없이 당장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절박함이 생긴 것 같았다.
잔혹한 복수극을 계획했지만, 간부들이 죽고 남은 잔챙이들이라 그런지 허술함이 엿보였다. 엔조가 너무 당당하게 나오자 당황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럴수록 안심이 되기는커녕, 불안감만 커져갔다.
저런 류의 어리숙한 치들일수록 제 혈기에 치우쳐 일을 그르치는 법이었다.
“여자를 풀어줘.”
엔조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최후통첩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젠장.”
결국, 의자에 꽁꽁 묶인 손목과 발목이 풀렸다. 밧줄이 풀리고 나서야, 매들린은 자신의 몸이 멍투성이라는 걸 알았다. 밧줄로 묶인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생긴 타박상이었다.
갱들 중 하나의 부축으로 간신히 일어선 매들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본 것은 침착한 얼굴의 엔조였다.
‘왜?’
그녀는 남자에게 묻고 싶었다.
‘나와 너는 이곳에서 스치듯 만난 인연 아니었나. 아쉽기는 하지만 그 이후를 기약할 수 없는 딱 그 정도의 관계.’
‘왜 왔어.’ 하지만 그 질문을 지금 할 순 없었다. 그녀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고, 갱들은 총구를 거두지 않은 채였다.
“자. 네가 말한 대로 그쪽으로 여자를 보낼 테니, 짭새들을 치워.”
엔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말 들었죠? 다들 물러서요.”
엔조의 그 말과 함께 경찰들이 발걸음을 뒤로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매들린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의 엔조가 힘들어하는 매들린을 보자마자 갸륵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공포에 질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매들린. 이리로 와요. 한 발자국씩. 좋아. 옳지.”
내게 이리로 와요. 매들린. 엔조가 두 팔을 벌렸다.
“윽…. 아….”
매들린이 헝겊을 문 채로 끅끅 울부짖었다. 그녀도 모르는 새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라붙은 눈물 위에 또 눈물이 흘렀고, 입술은 터져서 헝겊에 피를 물들였다.
너무 오래 묶여있어서 그런지 두 발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 걸음,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등 뒤에 겨눠진 총을 등지고, 그렇게 한 걸음씩. 최소한의 용기를 내야 했다. 그래야 살아 나갈 수 있었다.
엔조는 한치의 동요도 없이 제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바르작 몸을 뒤틀며 힘겹게 걷던 매들린이 마침내 남자의 품에 풀썩 쓰러지듯 안겼다. 그의 품에서는 모순적으로 포근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때였다.
“으악!!!”
뒤에서 비명과 함께 총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천지가 요동하고 번개가 치며, 해일이 이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엔조가 강한 손길로 매들린을 품에 안아 감쌌다. 그리고, 동시에 온몸이 찢기는 격통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매들린!’
매들린은 엔조의 품속에서 정신을 잃었고, 그래서 그녀를 애타고 절박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 * *
“부둣가, 새벽 2시.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꼭 무슨 일이 생기면 짭새를 부른단 말이야. 이번에 그러잖아? 그러면 매들린은 죽어.”
당장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이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밀려오는 구역감을 간신히 참은 채로 질문했다.
“좋은 수라도 있는가 보군?”
아. 살의를 눌러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당장 여자를 품 안에 안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꼭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고 있어야 했다.
“…경찰들은 인질 따윈 상관 안 하고 당장 놈들에게 총질이나 해댈 거야. 게다가 그렇게 날래지도 못해. 아.”
중얼거리던 엔조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가 말했다.
“당신, ‘상류층’이잖아. 의원이나 주지사 정도는 움직일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렇담 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경찰나리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홀츠먼.’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내가 아는 사람을 부르지. 너도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