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백정 놈 앞에서 (76/121)

75화. 백정 놈 앞에서

“무슨 고민 있어?”

“수지. 요즘 가게는 괜찮아요?”

“응. 외상 해달라는 사람들도 없고, 다들 인심이 괜찮네.”

우려와 달리 수지는 카운터를 잘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요즘 이상한 사람들은 안 오고요?” 

혹시 갈까마귀 무리들이 맥도먼드 식료품점을 들쑤시거나 하는 일이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별로? 노숙자들이 구걸하러 오기는 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지가 카운터를 쳤다. 

“아. 이상한 놈들이 기웃거리기는 했어. 분명히 짭새 느낌이 나더라고.”

“경찰요?”

“응응. 그자들이야말로 주위에 뭐 이상한 게 없었냐고 묻던데. 내 생각에는 최근에…그 소매치기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음. 그래요? 조심해야겠네요.”

아일랜드 거리의 치안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는 뉴욕 경찰이 갑자기 소매치기를 잡자고 탐문 수사를 벌일 리 만무했지만 벌써 수지의 아메리칸 드림을 깰 이유는 없었다. 별일 없으면 가볼게요. 매들린이 빵 몇 개를 사들고 떠나려는 때, 수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네?”

“매들린. 뭔가 힘든 일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를 엄청나게 속상하게 하는 남자친구와, 마피아인 것 같은 전 남자친구 말고는 딱히 문제는 없네요.’ 매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기운 내고!”

“수지도요!”

가게 문을 열고 거리에 나서니, 어쩐지 주변의 공기는 음울했다. 아일랜드 거리 특유의 활달함은 없고 사람들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매들린은 월시 부인의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갔다.

이안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약간의 연민이 뒤범벅된 마음을 추스르느라 머릿속이 혼란했다. 남자가 자신이 누군가와 있을 때마다 무섭다면, 그건 무엇인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뜻이었다.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야. 역시 내가 미국으로 와버려서인가. 그래도, 그걸로 사과하기에는 너무 엉뚱한데. 생각해보자고. 그 사람은 옛날부터 그렇게 좀, 의심이 많았어.’ 그렇게 한참을 잡다하다면 잡다한 고민으로 시름 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님, 믿으세요. 곧 새천년이 열립니다.” 

등 뒤에서 키 큰 신사 하나가 그녀에게 전단지 하나를 건넸다. 

“괜찮아요.”

매들린이 전단지를 받고 고개를 숙였다. 

등 뒤에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이 총부리라는 걸 눈치챌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오른쪽에 주차된 차에 타.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네 뒤통수에다 구멍을 놔줄 테다.”

남자는 일단 전단지를 건네, 매들린의 악센트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 타깃은 정해져 있었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딱딱한 무언가가 진짜 총인지 장난감인지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거리로 빵 봉투가 나뒹굴었다. 남자가 이끄는 방향에 차가 한 대 주차되어있었다. 

억지로 밀쳐져 뒷좌석에 앉은 그녀는 ‘억’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가는 동안 소리 지르기만 해봐,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줄 테니까.”

“워. 워. 맥도웰. 진정하라고.”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아일랜드 악센트.’

이 사람들은 아일랜드 쪽 마피아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저를 미행하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나. 

“하긴. 백정 놈 앞에서 죽여줘야지. 그래야 분이 조금이라도 풀리겠어.”

“맥도웰, 여자 앞에서 나불대지 마.” 

미친. 납치범들이 나누는 짧은 대화를 바탕으로 상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지금 저 아일랜드 마피아들은 갈까마귀의 경쟁 조직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갈까마귀에게 원한이 있던가. 그래서 엔조와 친분이 있는 자신을 인질로 삼을 요량인 거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엔조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닥쳐. 얌전히 따라오기만 하라고. 너도 알았을 거 아니야, 네 남자친구의 더러운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지.”

남자가 매들린의 손목을 바라보며 깔깔거렸다. 

“이런 비싼 시계를 걸치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라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던?”

“제발-.”

“애원은 그만.”

남자가 이번에는 총구를 매들린의 관자놀이에 겨눴다. 매들린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하자.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한다. 

뒷좌석의 창문은 지금 까맣게 칠해져 있었고, 앞창을 통해 보이는 경치로는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해도, 지금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하긴. 백정 놈 앞에서 죽여줘야지.]

이 말로 미루어봤을 때, 놈들은 자신을 미끼로 이용해서 엔조를 데려올 방편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엔조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였다. 

그가 자신을 구하러 올까. 매들린은 회의적이었다. 이들이 멋대로 오해하고 있지만, 일단 자신과 그는 애인도 아니었거니와, 매들린은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 그리고 왠지 엔조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승냥이 굴로 걸어 들어갈 만큼 머리가 안 돌아가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씩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가장 그럴싸한 시나리오는 매들린 혼자 죽는 것뿐이었다. 엔조가 거절하거나,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놈들이 해코지를 할 터였다. 그렇게 끝이 나겠지. 

돌고 돌아 이역만리에서 또 개죽음이라니, 이 또한 대단한 일이었다. 이렇게 인생을 꼬기도 쉽지 않은데, 그걸 해냈다. 

그러나 자조도 잠시, 끔찍한 절망과 후회가 그녀를 덮쳤다. 이안과의 마지막이 그렇게 되어버리면 죽고 나서도 후회할 것 같았다. 사후세계와 영혼을 떠난 문제였다. 

젠장맞게 무서워졌다.

관자놀이에 닿아있는 차가운 금속성의 촉감이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계속 울면 진짜 쏴버릴 거야.”

내가 울고 있었구나. 매들린은 눈물을 멈추었다. 그녀는 울다가도 언제나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능했던 기술이었다. 

게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쉽다. 이미 한번 해본 일 아닌가. 

* * *

“매들린요? 아까, 빵 두 개를 사서 갔는데요.”

수지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재수 옴 붙게 웬 영국인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러나 남자는 무척이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젠장.”

“죄송하지만 혹시 왜 매들린을 찾으시는 건지 여쭐 수 있을까요, 손님.”

“제 애인입니다.”

“아… 네….”

재수 없는 영국인이라는 말을 취소해야 하나 마나 갈등이 일었다. 남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좌불안석이었다. 살짝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데도 마구 상점을 돌아다니면서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카운터로 바짝 붙더니, 수지에게 을러댔다. 

“주인을 불러주십쇼.”

“죄송한데, 제 오라버니는 지금 낮잠 시간…”

“급한 일이니까, 당장!”

“…네?”

수지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이안이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약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속박되어온 구속이었다. 신사이자 남자이자, 백작이자, 어른으로서. 

그런 그의 머릿속에서 뱀 같은 목소리가 사근사근 속삭였다. 

-알고 있었잖아. 그녀를 놔두는 순간, 버러지 같은 놈들이 꼬이기 마련이라고. 결국, 네가 잔뜩 쥔 손아귀 힘을 풀 수 없는 거라고. 

* * *

라오네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평범한 정육점처럼 보이지만 안에는 돈 세탁실, 번듯한 회계 사무실이 차려져 있는 곳 말이다. 그곳으로 들이닥치자마자 이안을 향해 토미건 몇 개가 겨누어졌다. 

이안은 사무실 안쪽에서 엔조의 회계사들이 돈을 세고 있는 광경을 바라봤다. 엔조는 가운데의 의자에 왕처럼 앉아있었다. 그가 이안을 확인하자 뒤의 수하들에게 고갯짓했다. 

“아는 분이야. 총 내려.”

“매들린 어디 있어.”

“미안한데, 형씨.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네요. 더군다나 의처증은 제 관할 분야가 아니라…”

“개수작하지 마.”

이안이 웃었다. 저런 덜떨어진 양아치 버러지들이 설치는 게 우스웠고, 살의가 일었다. 자신에게 귀족적인 무언가가 남아있다면, 저런 인간 이하의 쓰레기들에 대한 혐오라 할 만했다. 그 증오를 엔조도 비슷하게 읽어내는 모양이었다. 

“우스워요? 형씨나 저나 피차 비슷하다고 보는데요. 달러를 세탁하는 데에 지위고하가 있었군요?”

이안이 뭐라고 되받아치고 싶어도, 지금은 그런 말다툼을 할 시간이 없었다. 거두절미하기로 했다. 

“본론으로 가지. 몇 시간 전, 아일랜드 거리에서 남자 한 명이 매들린을 억지로 차에 태우는 광경을 누군가 목격했다.”

“뭐라고?”

엔조가 일어섬과 동시에 사무실에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회계사들이 돈 세는 걸 멈췄다.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심지어, 이안조차도 말을 하지 않았다. 엔조가 몸을 돌려 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기랄.”

“받아.”

침착하게 말은 했지만, 이안도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저 이탈리아 마피아도 모르는 일이라면, 경우의 수는 하나로 좁혀졌다. 

엔조가 받아들었고 수화기를 귀에다 가져다 댔다. 

한참 듣던 엔조가 조용히 말했다. 

그가 살짝 발랄한, 그러나 소름 돋는 톤으로 말했다. 

“형씨. 내가 형씨를 어떻게 잔인하게 죽이기 전에, 죄 없는 사람은 얌전히 풀어주지 그래요? 그 여자는 나와 관계없다고.”

전화는 끊긴 게 분명했다. 엔조가 수화기를 곧장 바로 패대기쳤기 때문이었다. 

“젠장! 젠장!”

“누구야.”

이안은 지금 엔조의 분노는 조금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엔조가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퍼거슨 잔챙이들이야. 젠장. 부둣가의 일로 악에 받쳐서는-.”

“언제, 어디서 만나기로 했나.” 

마피아 놈들 내력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고작 그따위 일로 매들린이 얽혔다는 걸 생각하면 화가 나 미쳐버릴 것 같으니 생각조차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

“닥치고 말하기나 해.”

이안은 지금 엔조와 말다툼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 엔조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다다다 쏘아붙였다. 

“부둣가, 새벽 2시.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꼭 무슨 일이 생기면 짭새를 부른단 말이야. 이번에 그러잖아? 그러면 매들린은 죽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