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마주침 (75/121)

74화. 마주침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매들린은 알링턴의 씁쓸한 표정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남자는 더는 그녀에게 묻거나 제안해오지 않았다. 놓친 것은 놓친 거였고,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에겐 알링턴은 언제나 약간의 수치심과 죄책감이 섞인 이름으로 남을 거였다. 

하지만 알링턴이 말한 것처럼 ‘그것 역시 제 몫의 후회’일 따름이었다. 다른 삶 속의 일까지 지금 삶의 다른 사람들이 같이 짊어질 필요는 하등 없었다. 

그래도,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를 지어서 다행이다. 매들린은 혼자 생각했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남자의 모습은 무척 안정되어 보였다. 전의 삶에서는 냉정하되 어딘지 권태로워 보이는 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름대로 의료인으로서의 소명의식이 그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왼쪽 골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는 오래고, 가로등이 켜져 있었지만,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할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뉴욕이었고 매들린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

-부스럭.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용수철처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검은 고양이었다. 

“아….”

어쩐지 허탈해진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저 멀리 도망친 고양이를 놔두고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때요. 즐거운 하루였어요?”

돌아봤을 때는, 해맑은 얼굴의 엔조가 서 있었다.

쓰리피스 슈트를 맞춰 입은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의 발치에는 담배꽁초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뭐야. 설마. 따라온 거야?”

“기다린 건데요. 매들린, 도대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곤란해.”

게다가 월시 부인이 이안에게 꼬치꼬치 뭐든 이야기하는 성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엔조는 더더욱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냥…”

엔조가 살짝 혼란스럽고, 속상한 표정으로 매들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이십대 젊은이였다. 그저, 치기 어리고 순진할 뿐인 미청년. 그 누가 그런 그를 도살자라거나 마피아의 두목이라고 감히 짐작하겠는가. 

매들린은 자신이 그 사실을 안다는 사실을, 절대로 티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생리적으로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자꾸만 동공이 확장되고 숨이 가빠졌다. 

“나는 그냥, 당신이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놀랐잖아. 보고 싶었으면 미리 전화로 약속을 남겨뒀으면 됐어.”

“그 하숙집 주인아줌마가 외간 남자를 질색한단 건 유명하던데요, 뭐.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신 분이던데 이탈리아인이라면 더더욱 질겁을 하겠죠.”

“월시 부인을 그런 식으로 말할 것까진 없고.”

“아무튼, 매들린. 이번 주말 바빠요? 데이트를 걸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유명하다는 오페라 극단이 여기 왔다잖아요. 그 티켓이 어쩌다 생겨서. 매들린은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아서요.”

이번 주는 딱히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엔조와 함께 무엇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거절을 할 핑계를 찾아내야 했다. 매들린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내자마자 엔조가 아랫입술을 장난스럽게 씹었다. 

“새로운 남자친구 때문에 힘든 거라면 둘이 갔다 와요. 자, 여기 티켓이요.”

“아니, 이런 걸 그냥 받을 수는 없어.”

“받아요. 어차피 내가 봐도 무식해서 못 알아먹는다니까요.”

엔조가 억지로 쥐여준 오페라 티켓은 푸치니의 <토스카>였다. 매들린이 혀를 찼다. 

“이탈리아어는 일단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이탈리아어도 오페라에서 쓰는 건 다 외국어 같다니까요.”

“그래도 받을 수 없어. 사촌 누나한테 줘.”

“말했잖아요, 걔는 오페라보다는 연극을 좋아한다니까요. 줘도 오히려 욕만 먹어요.”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했을까. 매들린은 상대가 끔찍한 마피아 두목이라는 사실을 아주 잠깐 방기했는지도 몰랐다.

“매들린.”

뒤에서 예기치 못한 제삼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월시 부인의 하숙집으로 가는 길목 앞에, 세 사람이 서 있는 광경은 퍽 부자연스러웠다. 어깨가 뒤틀린 거구의 남자 하나, 키 큰 말쑥한 남자 하나, 그리고 초조한 여자 하나. 그렇게 세 명의 사람은 이상한 비대칭의 긴장 구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오. 당신이 바로, 그 소문의 ‘애인’이시군요.”

엔조가 태연한 얼굴빛을 하나도 안 바꾸고 상대방을 바라봤다. 그가 곧바로 이안을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엔조 라오네입니다. 매들린의 친구라고 해야 할까요.” 

엔조가 악수를 청했으나 이안은 정말 무례하게도 그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그저 웬 손이냐는 듯이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엔조도 엔조 나름대로 그에 맞서 손을 거두지 않았다. 명백한 신경전의 양상에 매들린의 머리만 어지러웠다. 

“소개를 안 하시니까, 제가 짐작해야겠군요. 댁이 바로 이안 노팅엄 씨죠?”

“보통은 백작이라고 하지.”

“…….”

정말 남자답지 않았다. 이안 노팅엄은 제 작위나 호칭에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매들린은 한 한 달 정도 이안을 놀려줄 거리가 생겼다고 좋아했을 터였으나, 지금은 그저 이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탈출하고 싶을 뿐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백작 같은 걸 없애려고 메이플라워 호를 탄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미국인데요. 이안 노팅엄 씨.”

엔조가 생긋 웃었다. 이안에 비하면 고작 애송이일지도 모르는 남자인데도, 온갖 험한 일을 굴려서인지 이안의 기백에 전혀 눌리는 낌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조한 쪽은 이안이었는지도 몰랐다.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무척이나 무가치하고 성가신 것을 쳐다보듯 엔조를 일별한 그가 매들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매들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학교가 끝나는 시간보다 늦어서 걱정했…”

“약속이 있었어요. 그보단 일주일 후에나 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정이 바뀌었어.”

“…….”

그놈의 일정은 몇 시간 안에 확확 바뀌는 모양이라고 쏴붙이고 싶었지만, 엔조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이안이 매들린의 손목을 붙잡으려는 때였다. 매들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러섰다. 그 순간 이안의 얼굴에서 피가 전부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이안. 하숙집에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엔조, 제안은 고맙지만, 오페라 티켓은 돌려줄게요. 보고 싶어도 도저히 보러 갈 시간이 없어요.”

매들린이 엔조의 손바닥 안에 다시 꼬깃꼬깃해진 티켓을 돌려줬다. 엔조가 살짝 이안을 곁눈질했다. 

“노팅엄 씨는 관심 있습니까? 카네기홀에서 하는 <토스카> 티켓 두 장인데-.”

“관심 없소.”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매들린, 얼굴 봐서 좋았어요. 또 봐요.”

엔조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가 매들린의 어깨를 손끝으로 살짝 쓸었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어깨가 흠칫 경련했다. 

엔조가 손을 흔들자, 롤스로이스가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차가 바뀌었다. 매들린은 자연스럽게 차 문을 열고 조수석으로 들어가는 엔조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몰아주는 롤스로이스를 탈 정도라는 건.

아무튼, 이건 위험했다. 절대로 엔조와 이안을 같은 자리에서 마주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생각이지?”

그녀의 생각의 꼬리를 자른 건 냉랭한 이안의 목소리였다. 매들린이 그런 그를 향해 돌아섰다. 

“제가 해명해야 할 일 같지는 않은데요.”

“글쎄.”

이안은 팔짱을 끼고 엔조의 롤스로이스가 사라진 도로변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글쎄…? 지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니. 정말. 이 사람이. 진짜, 너무하네. 엔조와 투닥거리던 걸 무슨 밀회라고 생각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아까 전, 알링턴 박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들었던 차분하고 단정한 감정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남은 것은 극렬한 분노였다. 

애초에 말도 없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간 건 남자였다. 전보도 딱 두 개를 성의 없이 남겼을 뿐이고, 그런데도 그는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여기서 한바탕하기 싫으니까 돌아가세요.” 

“…….”

남자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돌아가시라고요. 지금 너무 피곤해요.”

“누구를 만났지.”

“…….”

매들린의 표정이 싸늘해질 차례였다. 그녀가 이안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학교 사람이요. 같이 커피 마셨어요. 됐어요?”

“…….”

이안이 어이없어하며 씩씩거리는 매들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잃었다. 두 초록색 눈동자에서 어떤 불꽃이 일었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미안하오.”

“…….”

“나는 이런 걸 설명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어. 아까 당신과 저 남자가 같이 있는 걸 봤을 때… 젠장맞게 무서워져서.”

“왜요. 왜 무서워요.”

“모르겠소.”

그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남자는 미약한 두통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이안.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내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모르는 채로 있는 게 낫겠지.” 

남자가 이죽이며 대답했다. 

매들린은 자신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표정은 제쳐두고라도 자신의 속은 산산이 조각난 유리같이 깨져있을 거란 건 분명했으니까.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차가운 물을 뒤엎어 쓴 것처럼 무언의 깨달음이 그녀를 덮쳤다. 

* * *

이안 노팅엄은 여자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꿀과 금, 향유로 만들어진 것 같이 귀한 무언가를 손으로 직접 깨부순 느낌이었다. 매들린의 얼굴에서 배신감이 떠오르더니 이내 낙담과 포기의 감정이 스쳤다. 그녀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내일이면 후회할 소리는 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그게 다였다. 차라리 화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매들린이 악을 쓰거나 욕설을 지껄이기를 바랐는지도. 그랬더라면, 순순히 욕을 먹고 인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매들린은 그런 전술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똑똑한 여자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똑똑한 여자니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만큼 그는 순진하지 않았다. 겁에 질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서툰 배려가 당신을 더 괴롭게 만든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안은 차창 너머 명멸하는 뉴욕의 야경을 무연히 바라봤다. 네온사인과 빛나는 전구들이 서로의 무가치함을 뽐내는 광경을.

‘알려줘.’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모든 것을 알려줘.’

그는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