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예상을 빗나간
다시 만난 수지는 여전했다. 걸걸한 입담도 입담이거니와, 뻔뻔한 태도와 능청스러움까지 그대로였다. 그녀가 그대로 힘을 꽉 주어 매들린을 껴안더니 자리에 앉았다.
“어때요? 교화소 동기들을 좀 더 불러 모아보는 건? 여성 미식축구팀을 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아서라. 농담이라도 그런 말 좀 하지 말고!”
맥도먼드 씨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사실 좋은 일도 아니고, 웬만하면 형을 살았던 일은 입에 올리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약간의 소동을 제외하면 화기애애하게 식사가 이어졌다. 이런저런 좌충우돌이 있었지만, 수지도 자리를 잡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출소하고 출국하는 과정이 자못 험난했는지 수지는 밥상머리에서 온갖 불평과 욕설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속의 음식을 맛본 그녀는 너무도 즐거워했다.
식사가 끝나고 수지는 맥도먼드 부인을 도와 설거지를 했다. 매들린 역시 남은 자리를 치우고 있을 때였다. 그녀 옆으로 문득 맥도먼드 씨가 다가갔다.
“매들린. 잠깐 할 이야기가 있네.”
뒤뜰로 나갔을 때는 완전히 깜깜한 밤이었다. 맥도먼드 씨는 답지 않게 초조했고 많이 힘들어 보였다. 동생이 출소해서 돌아왔으니 즐거울 일만 남은 것 같았는데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눈가가 푹 꺼진 것이, 잠을 며칠 설친 것이 분명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월시 부인께서도 안부 전해달라 하셔요. 다 잘 되어가고 있어요. 덕분에요.”
뭐. 답답한 일들도 있었지만, 맥도먼드 씨가 전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눈을 한번 느리게 끔벅이더니 말했다.
“…수지는 착한 아이야. 그런데 저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질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아…”
“나는 그런 식으로 신세를 망치는 여자애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봤네. 매들린, 내 비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어. 자네가 처음 이곳으로 온 날, 그 말도 안 되는 편지 쪼가리를 받아든 것도 그래서였네.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는 선택이었지만 말이야. 수지 같은 여자가 또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 꼴을 방관할 수 없었거든.”
“감사합니다. 지금도 늘 감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조심해. 매들린. 남자를 조심하라고. 순진한 사람들의 약한 지점을 파고들어서, 이리 떼처럼 파고들어 먹어버리니까.”
이번에는 매들린 쪽에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일전의 노팅엄 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분은 전혀 이상한 사람이 아니…”
“아니. 노팅엄 백작이 걱정되는 게 아니야. 내가 자네의 이전 삶에 대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맥도먼드 씨가 할 말을 신중하게 가만가만 골랐다.
“최근에 부둣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고 있나.”
“…마피아들끼리의 총격전이요? 사람 몇 명이 죽었다고 들었는데요.”
“총격전이라기보다는 학살이었어. 회합을 가지던 아일랜드 갱 간부들이 습격당해 전부 죽었네.”
“…….”
그런데, 그 마피아들 간의 알력다툼이 지금의 이 주제와 무슨 상관…? 매들린의 미간에 미세한 금이 갔다. 지금 맥도먼드 씨가 무슨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배후에 갈까마귀가 있단 소문이 지금 거리에 온통 자자해.”
“…갈까마귀요?”
갈까마귀라면 지난번에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무리가 아닌가. 그냥 하고많은 시정잡배들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위험한 자들이었는 모양이었다. 매들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맥도먼드 씨가 한숨을 쉬었다.
“진작 경고를 해야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뒤늦게라도 옳은 일을 할 수밖에 없어.”
“무슨 일이에요. 맥도먼드 씨…”
한참을 뻐금거리던 맥도먼드 씨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뜻밖이었다.
“엔조 라오네. 그 사람과 요즘 안 만나는 것 같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그 녀석은, 그 녀석은.”
맥도먼드 씨가 더듬거렸다. 말을 절었다. 할 단어를 고르다가,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내뱉은 단어는 결국 다음과 같았다.
“야심가야. 지나치게 야심가야.”
“야심가죠. 엔조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요.”
맥도먼드 씨가 맥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10년은 더 늙은 얼굴로 매들린을 바라보았다.
“하. 이해를 못 하는구나. 매들린, 갈까마귀의 수장은 바로.”
그가 매들린을 꼭 끌어안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가 바로 갈까마귀의 수장이야. 매들린. 엔조 ‘도살자’ 라오네가 그네들의 우두머리라고.”
* * *
엔조 ‘도살자’ 라오네. 그게 남자의 별명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순진무구하고 맑은 얼굴에 도살자라는 닉네임을 감히 짝지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엔조가 자신을 기만해오고 있었단 사실도 사실이었지만, 마피아의 소굴에 들어가서 따뜻하고 정다운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도 아무 눈치도 못 챈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어떻게 그는 전부 숨길 수 있었을까? 일부러 보지 못한 척 한 걸까. 월시 부인네 하숙집으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오소소 돋는 소름에 몸서리를 쳤다. 꿈 많은 젊은이인 척했으면서 뒤에서는 그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미친 짓을 저질러왔다는 이야기였다.
‘평생 말 안 했을 거야.’
무엇이 잘못인지도 몰랐을 거고. 매들린은 잠시라도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분하고 무서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녀는 불현듯 어디선가 측면으로 꽂혀오는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황급히 돌리자 시야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정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 맞냐고.
그녀는 다시 그쪽을 향해 돌아보는 대신 보폭을 빠르게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선은 따라붙는 느낌이었고, 그녀는 목덜미에 무언가가 달라붙는 느낌에 진저리를 쳤다.
간신히 하숙집으로 도착했을 때, 거실에는 하숙생들이 앉아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가운을 두른 월시 부인이 매들린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로엔필드 양. 아가씨에게 전보 쪽지가 왔어요.”
“감사합니다. 월시 부인.”
그녀는 계단 위를 타고 올라가, 그대로 방 문을 걸어 잠갔다.
{ 일주일 안으로 돌아갈 것. 이안이. }
“미안하다는 말은 없지.”
팔뚝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물을 닦아내는 거라기보다는, 눈가에 내려앉은 피곤을 쫓아내려는 습관이었다.
그녀 자신도 무엇을 원하는 건지 확실하진 않았다. 말없이 그렇게 떠나버려서 미안하다. 결혼 이야기는 찬찬히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언가를 하느라 돌아오는 게 늦어지고 있다. 이러쿵저러쿵. 전보니까 자세한 사항을 만연체로 늘어놓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저, 그가 말했으면 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기해줬으면. 자신이 적어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만이라도 짧게 언질을 주면 어디 덧나냔 말이다.
“뭘 바라니.”
하지만 속상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 * *
매들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개키고 출근할 준비를 했다. 몸이 과로와 근심·걱정, 긴장으로 무거웠다. 사무실에서도 학교에서도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붙들고 스스로를 다그쳐야만 했다.
수업이 끝나고 완전히 곤죽이 된 몸을 끌고 비척이며 교실 문을 나올 때였다. 뭔가 익숙한 형체가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매들린은 완전히 얼음이 되어 제자리에 섰다. 그 형체가 엔조가 아니라, 알링턴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야 긴장이 해소되었다.
“…….”
“매들린.”
알링턴이 중절모를 벗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 * *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를 찾아 자리한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매들린은 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은 아니었으나, 글쎄. 조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대학으로 가셨단 이야기네요?”
“네. 워릭셔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병원은 도저히 못 해 먹겠더군요. 그놈의 재정수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 정말이지 신물이 나요.”
“그렇죠. 무엇이든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게 힘들죠.”
“예를 들어 병원의 바닥을 닦을 물걸레를 사는 데에도 현실적인 고려가 필요해요. 그렇게 하나씩 타협하고 타협하다 보면 내가 만들고 싶었던 병원과는 거리가 먼 현실이 이루어지고 말죠.”
결국은,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매들린은 그런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계속 임상도 하시는 거죠?”
“하기는 하는데…사실은.”
알링턴이 말을 더듬었다.
“전쟁터에서 외과의였던 시절이 가끔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모든 게 단순하거든요.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여서. 사실, 이 뇌 안에서 무엇이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 잖습니까. 가끔은, 내가 환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한 게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늘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줄로만 알았던 알링턴은 이제 자못 부드러운 얼굴로 매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캐나다에서 인슐린을 정제하는 방법도 발명이 되지 않았습니까. 재밌는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겁니다. 오래 살아야겠지요. 의학의 발전을 목격하려면.”
“나름 희망적이시네요. 저는… 선생님.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병원에서 일하고 싶으시다면 제게 말씀 주세요. 추천서를 써드릴 수는 있습니다.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링턴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건넨 제안은 정말 고마운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딱히 호의라기보다는, 당신이 정말 유능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선생님에게도 이런 의외의 모습이 있단 걸 뒤늦게 알다니. 아쉽네요. 병원에선 솔직히 뭐라고 해야 할까, 거리감을 좀 느꼈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알링턴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회한이 뒤섞인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것 역시 제 몫의 후회로 남겠군요. 진즉 당신의 예상을 빗나가야 했던 건데.”
매들린은 약간 긴장했으나 오묘한 순간은 그뿐이었다. 그 뒤 둘은 뉴욕의 이것저것에 대해서 불평하다 자리를 떴다. 남자는 계산을 했고, 매들린에게 인사했다.
“매들린, 잘 있어요.”
그 눈빛에 아쉬움은 없었다. 다행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