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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뜻밖의 재회 (73/121)

72화. 뜻밖의 재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는 보자는 심정으로, 매들린은 홀츠먼 앞에 앉았다. 그런 그녀 앞에 남자가 대뜸 술에 취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패배자예요.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어쩐지 들어서는 안 될 내밀한 무언가를 들어버린 것 같았다. 매들린은 난데없는 남자의 고백에 살짝 당황했다. 

“이사벨 얘기죠?”

매들린으로서는 둘이 같이 있는 장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조합이었다. 능글맞고 가볍고 피상적인 홀츠먼과 이상주의적이고 혈기 넘치는 고집쟁이 이사벨이라니. 

마치 태양을 주위로 천천히 멀리서 공전하는 외행성처럼 남자는 그렇게 여자를 멀리서 갈망했던 걸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곧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알잖아요. 우리 증조부가 노팅엄 가문의 비서 비슷한 거였다고.”

홀츠먼이 품 안에서 럭키 스트라이크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실내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 망할 볼셰비키 개자식들이 그녀를 채가게 두진 말았어야 했어요.”

“글쎄요. 그건 이사벨의 선택이었는걸요.” 

“…….”

홀츠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주제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사벨이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줬더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앞으로 나설 용기가 없었어요. 그녀 때문에 나까지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진 않았습니다. 가끔은, 나도 이런 말하는 게 싫지만….”

그가 담배를 조용히 아무렇게나 비벼껐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눈은 더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이안 노팅엄이, 아니, 이사벨 노팅엄이 차라리 완전히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요.”

진탕 취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발설하지 않았을 속마음이었다. 

매들린은 찬찬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묵은 열등감과 원한 감정, 그리고 집착을 한 데 뒤섞어 놓은 모양새였다. 

어쩌면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매들린을 부른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타인의 속사정을 너무 많이 엿본 기분이었다. 금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리를 떠야 했다. 그녀는 천천히 협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손안에 쥔 모래처럼 빠르게 빠져나가요. 홀츠먼 씨.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세요.”

그녀는 잊지 않고 숄을 챙겨갔다. 

* * *

수업 후 특별 강연 일정이 공지되자 교실은 조용한 흥분의 도가니였다. 매들린은 필기구들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간호대학교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기회이니 다들 참석하라며 공지가 내려왔다. 학기의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고, 이제 정말 호텔 일도 그만둬야 할 성싶었다. 그래야 병원 실습도 가고, 더 공부도 할 수 있을 터였으니까. 모아둔 돈이 좀 있었으니 생활이 걱정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는 건 다른 곳에 있었다. 

이안이 이사벨을 만나러 갔다면, 그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가 당장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무슨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난 괜찮으니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매들린”

그녀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같이 수업을 듣는 동기 캐롤라인이었다. 캐롤라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매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들린, 교수님 이야기 들었죠?”

“어. 네.”

“강의실로 가요. 건물이 다르니까 빨리 가야 안 늦을 것 같아요.”

부랴부랴 학생들을 따라 이동한 강의실은 커다란 원형극장 같았다. 커다란 칠판을 가운데로 두고 기다란 책상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매들린과 캐롤라인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의대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척척, 다들 노트와 펜을 꺼내놓았다. 매들린도 서둘러 따라 했다. 머리가 온통 남자와의 문제로 혼란스러워서, 정작 강연자 이름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미리 공지가 되었을 텐데도 한심하게 집중하지 못한 거다. 매들린이 조용히 캐롤라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캐롤, 선생님 이름이 뭐라고…”

그때였다. 앞문이 열리고, 웅성이던 좌중이 정적에 잠겼다. 문가에서 호리호리한 형체 하나가 걸어들어왔다. 일정하고 오차 없는 정확한 보폭이었다. 중절모를 벗은 남자가 안경을 고쳐 쓰더니, 연단에 손을 올렸다. 멀리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예상보다 젊은 모습이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나, 중년의 남성을 예상했었는데, 의외였다. 그는 몇 번 목청을 가다듬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사무적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라고는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옆에서 캐롤라인이 팔꿈치로 매들린의 옆구리를 찔렀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정말 영국인이시네요.”

“그렇네요.”

심드렁하니, 그 말을 듣던 매들린이었다. 그러다 일순 전기 충격을 받은 듯,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남자가 천천히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크게 적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코넬 알링턴 박사. 

그가 칠판에 적은 제 이름이었다. 

아. 매들린은 그때부터 이미 탈출전략을 짰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침착하게 뒷문으로 향하는 경로를 탐색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아야 했던 걸지도. 하지만,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사고가 멈췄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알링턴 박사는 매들린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태연하고 무관심한 어조로 강연을 시작했다. 

“우선 바그너-야우레크의 말라리아 열 치료 사례 연구에 대해서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신경매독이 진행된 환자에게 말라리아 환자의 혈액을 주사한 결과 뚜렷한 호전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무척 경이로운 성과라고 할 수 있지요. 기전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알링턴은 차분하게 강연을 시작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신경의학계에서 최근 있었던 발전에 대해서 논하면서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매들린은 그가 말하는 내용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마주쳤을 때 느끼는 강렬한 당혹감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방에 물건을 쑤셔 넣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문득 판서를 하던 알링턴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매들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잠시 머뭇했다. 한시도 쉬지 않던 손이 멈추고, 입이 다물렸다. 냉정하던 얼굴이 잠시 얼빠진 듯 굳었다. 

매들린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 * *

강연이 끝나고 매들린은 캐롤라인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가진 것을 모두 챙겨 자리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남자가 좀 더 빨랐다. 그는 제게 사인이나 덕담을 부탁하는 의학도들을 뿌리치고 매들린을 향해 곧장 달려온 것이었다. 

“매들린.”

그의 목소리는 무척 다급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후 강연에서 딱히 동요하는 느낌은 없었는데, 그 역시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

“역시 당신이었군요.”

“오랜만이에요. 알링턴 박사님.”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들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알링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본 그는 좀 더 냉철하고 완숙해 보였다. 살얼음 같은 비인간적인 표정에서 오는 우아함도 여전했다.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요.”

“미국에서는, 무슨 일…아니, 그보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제, 괜찮은 겁니까.”

“…….”

재판과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일들을 알고 있는 것이렸다. 매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보다, 박사님. 여기는 강연 일로 오신 건가요?”

“아니요. 고작 대학생들에게 강연 하나 하려고 대서양을 넘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 아닙니까. 그보다는 친구 부탁을 들어준 것뿐입니다. 밥 한 끼 얻어먹는 대가죠.”

그가 살짝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빈정거리더니 잠깐 머뭇거리며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로엔필드 양. 맞지요?”

“네. 아직 로엔필드 양이네요.”

남자의 질문이 무엇을 함의하는지 쯤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더 남자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 매들린이 먼저 이별을 고했다. 

“그럼, 미국에서 좋은 추억 쌓고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로엔필드 양.”

“네?”

“계속 붙잡고 있는 겁니다.”

“…….”

알링턴이 조용히 덧붙였다. 

“포기하지 마세요.”

어째서인지, 그가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로엔필드 양.” 

* * *

알링턴과 뜻밖의 재회를 하고 난 지 며칠이 지나도 어수선한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다. 이안은 약속한 것처럼 답을 주지 않았다. 홀츠먼이 말한 대로 그가 이사벨을 만나러 갔다면, 이안이 유럽의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기다릴 수밖에.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이 결혼이라는 폭탄만 던지고 떠나버린 그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다가도 이내 썰물처럼 가라앉고는 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에 쉽게 고개를 끄덕일 줄 알고.”

그런 이기적이고 회피적인 태도 때문에 지난 결혼 생활 내내 고통받은 게 새삼 생각이 났다. 이안이 자신의 어쩐지 비틀린 감정 표출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그와 결혼하는 건 잘못된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하숙집 1층의 응접실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그녀를 건너편에서 로즈가 불렀다. 

“매들린, 매들린. 맥도먼드 씨가 전화를 걸었어요!!”

수화기를 받아들자 뜻밖의 소식이 날아왔다. 

수지 맥도먼드가 미국으로 온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네. 아저씨. 당연히 가야죠. 네. 몇 시에 가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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