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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의도치 않게(2) (72/121)

71화. 의도치 않게(2)

이번 데이트는 햄튼에서 보내기로 했지만, 매들린은 약간 걱정스러웠다. 

사우스 햄튼의 별장은 언제나 불편했다. 전처럼 손님들로 바글바글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지나치게 화려한 외관이라든지, 과시적인 분위기는 별로였다. 주인의 성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정작 홀츠먼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서재에 도착한 둘은 자리에 앉았고, 매들린은 목에 두른 숄을 풀었다. 

“요즘 뭔가가 이상해요.”

결국, 매들린이 먼저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싸움을 걸기는 싫으나, 확실히 해둬야 할 건 확실히 해둬야 했다. 안 그랬다가는 이안은, 또 자신의 방식대로 슬그머니 경계를 흐릴 게 분명했다. 

“이상하다니.”

이안은 매들린에게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떨구었다. 오호라. 그 작은 제스처만으로도 감이 왔다. 매들린이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행운이 계속 생겨요. 누군가가 뒤에서 제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심증이 강하게 들지 뭔가요.” 

“요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나 보군.”

“그보다는, 월시 부인의 누추한 하숙집이 갑자기 호화로운 맨션이 되었다든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회계부서로 이동되었다든가 하는 일들이죠. 기분 좋다기보다는 이상한 거예요.”

“…운이 좋군. 축하하오.”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며 품속의 담배를 찾았다. 날렵하게 다가선 매들린이 담배를 쥔 남자의 손을 약하게 붙들었다. 

이안이 올려다본 매들린의 얼굴 속 눈동자는 형형했다. 

“이젠 솔직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이안.”

“……”

“월시 부인에게 날 챙겨달라고 부탁할 필요 없어요, 내 직장에도요.”

“하지만 난 그럴 권리가-.”

“있나요?” 

“내게 당신을 걱정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반문하는 이안의 말투에는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이번에는 그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즐거운 하루를 기대하던 분위기는 이내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걱정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하고 있는 건 그저 노골적인 편의 봐주기에 불과해요.”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해를 못 한다. 귀족이 주말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하듯, 이안은 자신이 선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고집스러운….”

이안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가 열에 받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매들린이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자, 좋아요, 어디 해보자고요. 그렇게 한창 둘이 대치 상태에 있던 때였다. 

“아닌 건 아닌 거예요. 솔직히 좀 민망하다고요.”

“이 정도도 민망스럽다면, 결혼은 부끄러워서 하지도 못하겠군?” 

음?

그때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정말 상상치도 못한 한 마디의 무언가였다. 약간의 짜증과 애정과 초조함이 뒤섞인 한 마디였다. 

매들린은 얼이 살짝 빠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말을 내뱉은 장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남자는 질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이 제대 직후보다 더 창백해졌다. 

“결혼이요?”

“…아냐.”

“아까 분명히 결혼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잘못 들었소.”

남자는 필생을 걸고 엎질러진 물을 담는 중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모조리 사라졌다. 이전의 미약한 짜증이나 분노도 없었다. 그저 공백. 정서적으로 꽉 막힌 평소의 이안 노팅엄 다운, 중립적인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매들린은 그런 이안 노팅엄의 무표정이 일종의 전술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지금 극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것이다.

“벌써 좀 앞서나가는 것 같지 않나요?”

“아니라고 했잖소.”

남자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했다.

“이안. 우리, 정식으로 ‘교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조롱하고 싶으면 상관없소.”

“놀리는 게 아니라…”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가 천천히 문가를 향해 다가갔다. 

-쾅.

남자가 완전히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매들린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평소처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서 남자가 화가 났고, 그래서 그가 걸어나가는 것이었다면 충분히 붙잡고도 남았다. 싸우는 것 자체가 두려운 시기는 지났다. 하지만 결혼이라니. 결혼이라니! 그 말에 당황한 건 이안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제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댔다. 

‘뜨거워.’

패닉이 서서히 물밀 듯 밀고 들어왔다. 결혼. 결혼이라니. 아니, 어쩌면 당연했다. 이안이 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연애를 하는 젊은이도 많다지만, 여전히 대다수 남녀는 연애 후 결혼을 선택했다. 

이안도 나이가 찰 만큼 찼고, 매들린은 어찌 보면 혼기가 지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남자 쪽에서 진지한 가능성을 고려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한 건 사실이었다. 다시 돌고 돌아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맞는 것일까 싶었다. 이안도 같은 이안이 아니고 매들린도 같은 매들린이 아니었지만, 겁이 안 난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나저나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는 건데.’

분명히 시작은 이안의 선 넘기였다. 그가 자꾸 매들린의 생활에 이리저리 간섭하는 걸 두고 뭐라 한 것에서부터 논쟁이 시작된 거였다,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결혼 이야기로 넘어가냔 말이다. 

“흠.”

매들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배우자의 삶에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을 철저하게 고쳐주는 수밖에.

이번에는 손쉽게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 * *

별장의 정문 앞에는 롤스로이스가 주차되어있었고, 운전사 한 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를 댁에다 직접 바래다 드리라 하셨습니다.”

“감사해요.”

매들린은 착잡한 마음 반,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마음 반을 안고 차의 조수석에 탔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것이, 엄청나게 조여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3층의 창문에서, 한 그림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 * *

그녀는 이 싸움이 다른 때보다 오래 갈 거라 예상하였으나,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내심, 이안이 져주리라 기대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 감정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 줄 알았으면, 나는 정말 오만하고 멍청한 사람이군.’

한 번 죽었어도 배우는 게 없으니. 매들린은 눈을 천천히 끔뻑였다. 

그녀는 그렇게 손에 전보 메시지를 쥔 채로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영국으로 돌아감. 곧 연락하겠음. 이안 }

전보는 간명했다.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이안 노팅엄은 영국으로 돌아갔다. 매들린을 남겨두고 갔다. 

무슨 긴급한 일이라도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말도 없이 간 거지.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쏠린 감정의 무게추는 언제나 다른 한쪽으로 다시 기울기 마련이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상대방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매들린은 밀려오는 시원섭섭한 감정에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정적으로 꽉 막힌 데다가 말주변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란 건 알지만, 결혼이라는 폭탄을 던져놨으면 매듭은 지어놓고 가야 할 것 아냐.” 

에라이.

전보 쪽지는 책상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다. 역시 그날 돌아서면서, 거절당했다고 느낀 걸까.

[조롱하고 싶으면 상관없소.]

윽…. 그렇게 생각한 거라면, 남자가 지금 어딘가로 ‘도망친 거라’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들린으로서는 억울했다. 조롱이 아니었다. 그저, 놀란 것일 따름이었다. 

딱히 싫지만도 않았고.

돌고 돌아 그와 다시 결혼이라는 관계로 묶인다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 그의 프러포즈를 받으면서 느꼈던 역함은 이제 없었다. 그저, 불안감. 한없는 불안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전보가 하나 더 도착해 있었다. 

{ 숄을 두고 갔더군요. 찾아가세요. H가. }

별장의 주인인, 홀츠먼이 쓴 전보인 게 틀림없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매들린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안과 언성을 높인 날, 사우스 햄튼 홀츠먼의 저택에서 숄을 벗어두고 챙기질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가지세요, 하기에는 너무 비싼 숄이었다. 

휴양지, 거기까지 또 어느 세월에 가냐 싶었다. 그냥 들렀다 가기도 그렇고, 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편으로 보내줄 수도 있을 텐데 싶었지만, 어차피 놓고 간 건 자신이었으니까. 

‘어쩌면….’

아니면. 매들린은 가만히 생각했다. 이 메시지 밑에는 숨겨진 뜻이 더 있을 수도 있었다. 홀츠먼이 사람 쓸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숄 같은 건 언제든지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안이 영국으로 떠난 이때, 매들린에게 친히 전보를 부쳤다.

뭔가, 해줄 이야기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 * *

결국, 숄을 가지러 간 것은 전보를 받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녀는 홀츠먼의 별장에 가지 않을 핑곗거리를 어떻게든 꾸며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호기심은 언제나 매들린의 발목을 붙잡을 터였다. 

며칠 휴가계를 내고 방문한 사우스 햄튼의 거리는 한산했다. 휴가철이 아닌 휴양지의 모습이 그렇듯 고적하고 황량한 느낌이었다. 매들린은 천천히 길을 거닐다가 크림색 석조 주택 앞에 다시금 섰다.

그녀가 이안과 말다툼을 했던 바로 그 장소, 그 방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홀츠먼이 이미 위스키를 기울이고 있었다. 셔츠는 팔뚝까지 걷어붙인 채였고 발은 다른 소파에 걸쳐져 있었다. 얼굴은 불콰한 것이 이미 몇 잔을 더 마신 모양이었다. 

매들린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자 그가 밝고 경쾌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숄은 저기 저 협탁 위에 고이 뒀으니 가져가요.”

“뭐죠?”

“…전보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꽤 비싸 보이는 물건인데 놓고 간 것 같아서 알려준 것뿐이에요.” 

“아. 당신이 고작 숄 때문에 저에게 전보를 치는 수고를 들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데요.”

“허 참. 내가 얼마나 친절한 사람인데, 이안의 여자친구인 건 알지만 말이 너무 심하군요.”

“이안의 여자친구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그냥 아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에요.”

“흠.”

홀츠먼이 조용히 위스키를 내려놓았다. 그가 물끄러미 매들린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재치있게 빛났을 푸른 눈동자가 잿빛이었다. 

“보아하니 이안이 당신에게 언질도 안 하고 떠난 모양입니다.”

“약간의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사벨을 만나러 갔을 겁니다.”

“아.”

홀츠먼이 몸을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대었다. 그가 틀어놓은 전축에서 유행가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시간 있으면 이야기 하나 듣고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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