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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피크닉 (70/121)

69화. 피크닉

돗자리를 깔아놓고 여유로운 피크닉을 즐겼다. 매들린은 약간 얼이 빠진 이안을 충실하게 놀려댔다.

“이 세상에 영국인만 피크닉을 즐길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도심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그냥 너무 갑작스럽긴 하군.”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의사표명은 없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거 먹어봐요. 호텔 제과점에서 파는 계피 과자예요.”

“…….”

남자가 살짝 지체하는 사이, 매들린이 냉큼 과자 조각을 그의 입에 넣어줬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보고 욕할 수도 있단 건 알았다. 확실히 정숙한 신사 숙녀들이 훤한 바깥에서 할 짓은 아니었다!

그녀가 입은 원피스는 팔꿈치가 드러나 보였다. 부드럽고 흰 살결에 쿠키 가루가 떨어졌다.

남자가 신경 쓰였는지 손끝으로 가루들을 털어냈다. 매들린의 숱 많은 진갈색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맛은 어때요?”

“달지 않군.”

좋다는 뜻이다. 저택에서도 다과할 때면 늘 가향차가 아닌 달지 않은 커피를 마시는 이였으므로.

받기만 한 게 미안한 모양이었는지, 남자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니. 그런데 그건 고작 쿠키 따위와 비견할 게 아니었다!

손목시계인 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안이 케이스를 열자마자 매들린은 하마터면 욕을 내뱉을 뻔했다.

“미쳤어….”

프랑스에 부띠끄를 가진, 뉴욕에는 단 한 군데의 백화점에밖에 입점하지 않은 공방의 시계였다. 매들린이 일하는 호텔의 손님들이 찰 법한 시계. 사각형의 각진 모양에 복잡한 무늬의 가죽끈이었다.

“…….”

쿠키를 줬는데, 시계를 받다니. 아니, 저 남자는 시계 선물하는 게 그렇게 좋은가?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매들린이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자, 남자가 헛기침했다.

“생긴 게 별로요?”

“나는 이미 시계가. 아….”

지금은 없지. 엔조가 사준 손목시계는 어느덧 차고 다니지 않게 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잘 됐다고 생각했소. 당신 손목이 계속 거슬렸거든.”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들이 어쩐지 너무 남사스럽게 들렸다.

“그래도 이런 걸 그냥 받을 순 없어요. 겸손을 떠나서 상식적으로 너무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지금껏 남자가 제게서 뭔가를 배웠다면, 이런 무시무시한 선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날 위한 거라고 생각해 주시오.”

물론, 에두르거나 겸양을 뜻하는 표현은 아니었다. 정말 단순히 말해서, ‘순전히 내 즐거움을 위해 선물하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좋은 걸 차고 다니면 불편하고 신경 쓰이고…”

“그러면 반지는 괜찮을까.”

“……”

“모르겠어. 당신에게 무엇을 줄 수 있고, 무엇을 줄 수 없는지.”

“…….”

“답답하군.”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의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요.”

매들린이 작게 말했다. 그녀는 손에 억지로 주어진 시계를 차지 않은 채로 소중히 만지작거렸다.

“……?”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찌푸린 미간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매들린이 입꼬리를 한껏 당겼다.

“한숨 자고 생각한다구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매들린은 담요를 허리까지 덮고 쪽잠을 자고 있고, 이안은 그 모습을 줄곧 내려다보고 있었다.

매들린은 자고 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이안의 얼굴은 마치 무언가 무척 신기한 것을 보는 것 같이 무아지경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매들린이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그의 무릎 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다니.

이안은 천천히 제 왼손에 둘린 흰 장갑을 벗었다. 화상으로 울퉁불퉁한 손등과 피부 겉면이 드러나 보였다.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뿌리가 녹아 붙어있었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손톱은 녹아 없어져 있었다. 매들린은 완전히 수마에 빠져들어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어떻게 믿고. 나를 어떻게 믿고서. 이안은 중얼거렸다. 그가 그 울퉁불퉁한 손끝을 매들린의 꿀 비스켓 같은 금발 머리칼 끝자락에 살짝 가져다 댔다. 금색 강처럼 굽이치는 머리칼은 마치 스틱스의 강같이 황홀했다. 담기면 영생을 얻게 될까.

착각이란 걸 알지만, 멈출 수 없었다.

파르르. 매들린의 부드러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을 본 이안이 화들짝 놀라 손길을 뗐다. 그러나 다행히도 매들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웅얼거리는 잠투정만 할 따름이었다.

“응…, 거기다 둬요….”

꿈속에서도 일하는 중일까. 그곳에서라도 편히 쉬고 있음 좋으련만. 측은한 마음과 불퉁한 심사가 동시에 일어났다.

일.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다.

아. 천천히 남자의 입이 벌어진다. 그가 손끝으로 매들린의 윤곽을 그려냈다. 그녀의 둥근 눈매,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콧날까지. 그리고 손길을 잠시 멈추고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역시, 월시 부인에게 웃돈을 얹어줘서라도 하숙집의 하수도랑 난방시스템을 손봐둬야겠노라고. 그리고 문 사이로 잠깐 보이던 그 계단. 역시 너무 낡고 위험해 보이지 않던가.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안 되니까.

* * *

잠깐이나마 쪽잠을 자고, 졸린 눈가를 비비며 같이 쿠키를 병에 담은 차에 적셔 먹었다. 이안은 살짝 초조해 보였으나 전체적으로 만족한 듯했다. 이상한 사람. 데이트 상대가 만나는 내내 잠만 자면 화가 날 법한데도 그는 불평 한마디 없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즐거운 여흥이라도 보낸 것처럼, 잔잔한 흥분의 기운이 그의 교묘하게 뒤틀린 입가에 가라앉아있었다.

“아.”

매들린은 어쩐지 어색한 감촉을 감지하고는 제 왼 손목을 바라봤다. 천연덕스럽게 채워져 있는 손목시계를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는 동안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겠다고는 안 했어요.”

“물어봤소만.”

“제가 괜찮다고 대답했던가요.”

“아마도.”

“아마도가…무슨 뜻이죠?”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저 사람이 이미 사버린 걸 어쩌겠나. 일터나 학교에서 차고 다닐 엄두는 못 내겠지만 말이다. 결국, 수용해버렸다. 그 광경을 다소 흐뭇하게 지켜보던 이안이, 좀 더 자신감을 드러냈다.

“당신에게 주고 싶은 게 더 많소.”

“학교라든가?”

“뭐. 그거야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들어줄 수 있지. 고려해보시오.”

“이안. 말은 정말 고맙지만, 우리는 아직 교제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요.”

“세상에는 만난 지 하루 만에 평생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않소.”

“중매로 인한 정략결혼이라. 그것참 듣도 보도 못한 놀라운 일이네요.”

매들린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지자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 주제를 계속 밀고 가는 건 위험했다. 그는 학습효과가 빠른 편이었고, 매들린에 한해서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에게도 이제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당신의 고집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군.”

“조금만 기다려달라구요. 나 혼자 힘으로 하나라도 끝내고 싶은 거예요.”

그쯤은 이해해줄 수 있잖아요? 볼멘 목소리라기보다는 틱틱거리는 장난기로 중화시켜본다. 매들린의 은근한 눈빛을 마주한 이안이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하지만 내 제안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있소.”

뉘엿뉘엿 해거름이 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는 제 비즈니스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아 했다. 매들린이 몇 번 추궁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변함없이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 얼버무렸을 뿐이었다. 

“내 일은 그리 재밌지 않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이안은 내 일이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지.”

그가 담담하게 웃었다.

궁금하단 단순한 말로 자신의 통제 욕구를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남자였다. 그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게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요?” 

내일부터 일해야 하니까! 매들린이 부러 기운찬 목소리로 말을 하자, 이안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자신도 귀족이었어서 아는 바이지만, 그는 아직 주중과 주말이라는 개념이 낯선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며칠간은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법칙인가 싶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두 그렇게 일을 하며 먹고 사는걸.

‘그러는 자기는 쉬는 날 없이 일하면서.’ 속으로 몰래 한번 남자를 꾸짖어본다. 매들린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사실 자신보다 몇 배는 덩치 큰 그를 부축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꺼이 매들린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계속 그곳에서 지낼 거요?”

“왜요. 월시 부인이 어때서요?” 

‘당신이 그녀에게 뇌물을 주고, 이리저리 멋대로 조종하는 걸 알아요.’ 하지만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었다. 선물도 선물이거니와, 잠도 자서 그런지 매들린은 느릿하게 기분 좋은 상태였다.

“그저, 좀 불편해 보여서.”

“별로 불편하진 않아요. 이스트사이드에 비하면 치안은 별로지만, 낮에 돌아다니면 그렇게까지는…”

“…….”

그렇게까지는. 이라는 말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린듯했다. 그가 중절모를 쓰며 헛기침했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겠군. 요즘 치안이 안 좋은 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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