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당신을 한 번 더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아!”
월시 부인이 허둥거리며 거실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런 그녀가 매들린이 깨어난 것을 보고 안도하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다시 벨이 울렸다. 월시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누구길래 그러세요, 월시 부인.”
베스가 팔을 걷어붙였다.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월시 부인의 미약한 공포에 질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보다 못한 매들린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월시 부인이 팔을 휘저어 말렸다.
“누워있어요! 절대 무리하지 말고!”
그러는 사이 버저 벨이 한 번 더 울렸다. 사신의 노크같이 어쩐지 무게감 있는 소리였다.
일어서려는 매들린과 말리는 월시 부인, 계속해서 울리는 벨. 교착 상태를 타개한 건 로즈였다. 답답했는지, 그녀가 쪼르르 현관문으로 다가간 것이다.
“누구세요?”
“…실례합니다. 월시 부인을 뵙고 싶습니다.”
“로즈!”
베스가 뒤에서 말렸지만, 로즈는 막무가내였다. 그녀가 베스에게만 들리게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베스도 조용히 해요. 드디어 우리가 그 소문의 ‘오페라의 유령’을 만날 수 있는 거라고요!”
그러나 베스가 무례하다며 로즈를 다그치기도 전에 문 건너편의 남자가 말을 이어나갔다.
“노팅엄이라면 월시 부인도 아실 겁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매들린이 로즈와 베스 사이를 성큼성큼 비집고 들어와 문을 열어젖힌 것이었다.
연인을 하숙집 동기들에게 소개하는 건 정말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자를 길거리에 마냥 서 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매들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이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와서는.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당연하게도, 이안 노팅엄이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맞닥뜨린 그의 모습은, 당연하게도, 평범하게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이라서 안심되었다.
매들린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여긴 왜 왔어요. 여자들만 사는 하숙집이라구요.”
계속 이러면 다들 자기 남자친구를 데려올지도 몰라요. 이 작은 하숙집이 복잡해질 거라고요.
“나..나는, 그저. 당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자친구라는 표현에 경악했는지 그가 보기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 왠지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체면을 다 던져버리고 이곳에 달려온 거였다.
“그냥 졸려서 잠에 든 거라구요.”
아무렇지 않은 척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대답을 듣자 잠시 멍하던 그의 눈에 다시 이지가 돌았다. 이안은 예의 그 날카롭고 모난, 성난 사내로 돌아왔다. 그가 매들린에게 잔뜩 잔소리할 태세를 발동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소.”
아예 자신들을 상대도 하지 않는 이안을 본 베스와 로즈는 공연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둘은 슬금슬금 매들린 뒤편으로 빠져나갔다. 이대로 계단 위를 올라가 못 본 척을 해줄 작정이었다.
“아. 숙녀분들의 존함은 모르지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뒤로 줄행랑을 치는 둘을 향해 이안이 가볍게 목례했다.
“헉. 진짜 귀족이네요.”
“마피아들도 저 정도 예의는 차려.”
그렇게 로즈와 베스가 숙덕거리고 희희덕거리며 계단 위로 사라지자 얼굴이 붉어진 매들린이 월시 부인을 찾으러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거센 힘이 잡아챘다.
“여기서 차 같은 거 마실 생각은 없소. 어차피 곧 갈 거야. 괜히 여기 뭉그적거리다가 당신을 놀림거리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놀림거리라니요. 차 한 잔은 괜찮아요.”
매들린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안이 싸늘하게 응수했다.
“기절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놀림거리요.”
“기절이 아니라니까요. 잠 든 거-.”
“그만두시오.”
“네?”
“일. 그리고 나와 함께 갑시다. 더 좋은 곳에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소. 학교를 원하는 거면, 내가 직접 만들어주리다.”
‘학교를 원하는 거면, 내가 직접 만들어주리다. 라니….’
고작 월시 부인에게 몰래 건네진 돈 몇 푼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 자신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진 않았다. 분노하기에는, 당장 남자의 표정은 어쩐지 너무도 간절해 보이는걸.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자신의 노력을 바보 취급하는 남자의 말을 쉬이 납득하긴 어려웠다.
“이안.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왠지 좀 더 길고 차분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매들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무턱대고 화를 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이런 게 남자의 방식이란 걸 알았다.
남자의 방식. 마치 지금껏 제 손목을 잡고 있는 저 장갑 낀 손아귀 힘처럼 요령 없고 직진밖에 모르는 그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매들린의 시선을 그가 느끼자 손에 들어간 힘이 일순 사라졌다. 공격받은 뱀처럼 순식간에 똬리를 푼다.
“난 진짜 괜찮아요. 스르르 잠이 든 거니까, 괜히 이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월시 부인께도 이런 사소한 일로 당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말씀드려야겠네요.”
남자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문장을 채 내뱉지 못했다. 나는 괜찮지 않다, 같은 말이었을까.
“…난…”
그가 숨죽였다.
“그러면 좋아요. 서로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 내일 센트럴 파크에서 만나요. 사람 속에서 서로 못 알아보는 일 없게 푸른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나갈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이. 그가 한 손에 쥔 모자를 도로 쓰며 인사를 중얼거렸다.
“내일 보는 걸로 알겠소.”
서서히 물러나는 그림자에, 월시 부인은 남모래 안도했다. 하숙집의 쌀쌀맞은 긴장감이 걷히고 어느덧 다시 평범한 온기를 되찾았다. 마치 서리 거인이 왔다 간 분위기였다. 그러나 매들린은 아까 전, 남자와의 가벼운 말다툼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확인하게 되어, 무척이나 안도 되는 구석이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 그녀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려는 건 포기해야겠어. 늦잠을 자야지.’
* * *
철문이 닫히고 이안은 잠시 낮은 계단 가에 우두커니 멈췄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남자는 그렇게 어둠 속에서 정물처럼 서 있었다. 그는 중절모를 고쳐 썼다. 어쩐지 아까 채 내뱉지 못한 말이 그의 혀끝에서 맴돌다가 툭, 떨어졌다.
“난 그냥 당신이 걱정되었어. 그래서, 당신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음. 그거였군. 남자는 제 말에 스스로 납득한 나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내일도 볼 수 있단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몸을 돌린 후 척척 걸어 나갔다.
운전사가 그의 차 문을 열어줬고 거대한 그림자는 차체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 * *
완연한 봄이었다. 꽃이 피고 만물이 생동하는 봄. 미 동북부의 봄은 다른 곳보다 좀 늦게 찾아왔으나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혹독하고 괴로웠던 뉴욕의 겨울이 완전히 가시자 사람들의 행장은 완연히 가벼워졌고,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파는 행상도 눈에 띄었다.
매들린은 하늘하늘한 옷차림이었다.
세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원피스에 챙이 있는 하늘색 모자를 썼다. 피크닉을 위한 물건들도 이것저것 챙겼다.
‘같이 나눠 먹을 과일, 쿠키랑….’
먹을 건 절대 가져오지 말라고 이안이 호언 했으나, 의리상 간식을 안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근히 매들린은 이것저것 싸들고 다니는 잡화상 기질이 있었다.
이안은 단 걸 안 좋아하니까 쌉싸래한 계피 맛이 나는 과자를 챙긴다. 그가 햇빛을 정면에서 맞지 않도록 거대한 차양이 달린 양산 두 개도 잊지 않는다. 혹여 추울 수도 있으니까 담요도 가져가고.
이 모든 준비물이 한 바구니에 담기니 제법 무거웠다. 그래도 육체노동이라면 익숙했다. 이것들을 다 들고, 지하철을 탈 순 없으니까 택시를 잡았다.
택시 운전사는 말수가 적었다. 차창에서는 신선한 봄날의 햇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요일의 여유. 그래도 적어도 이안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자못 편해졌다. 이안과 싸우지 말자. 그와 함께 삶의 기쁨을 누리자.
소정의 팁을 지불하고 나니, 센트럴 파크 초입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주말을 누리고 있었다. 런던 하이드파크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이 숨 막히는 마천루의 정글 속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이 있었다. 매들린은 숨을 들이켜고 무거운 바구니를 더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묶은 다음에 어깨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리칼이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짝 움직였다. 가벼운 몸이 마치 날아가는 새 같았는데, 나이에 비해 조숙해 보이기도, 어려 보이기도 했다.
얼마 안 가 매들린은 이안을 볼 수 있었다. 여러 명의 수행원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는 혼자였다. 그것이 불안정하거나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눈을 감고 지팡이를 짚은 채로, 햇살을 누리고 있었다.
딱 그의 몫의 햇볕을.
그것을 본 매들린은 어쩐지 가슴이 뻐근해져, 빠르게 뛰었다. 맨스필드 장미 한 송이. 창백하고, 연약하며 덧없는 생명체를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의 그는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러했다.
남자가 서서히 눈을 떴다. 장미의 꽃잎이 떨어진다.
매들린이 잠시 헤맸던 것과 달리, 남자는 곧바로 그녀를 찾았다. 마치 눈을 감았을 때부터 이미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렇게 매들린을 찾았다. 그의 시선을 받기 시작하자, 매들린은 공연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평화롭고 단단한 미소를 지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