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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연애 (68/121)

67화. 연애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아서.”

“네.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는데, 누구 때문에 방해받았어요.”

“미운 말은 말지.”

“하지만 난 안 밉죠?”

“당연하지. 내가 감히 당신을 어찌 밉다 하겠어?”

“하하.”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누가 들으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지도 몰라요. 정말 미운 소리는 속으로 삼켜두기로 한다. 지금은 매들린도 너무나 황송해서 웃음밖에 안 나오니까.

    

그나저나 저이가 여기 온 이유가 있을 텐데. 설마하니 그저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같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었어.”

“설마.”

“그리고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고.”

    

그럼 그렇지.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왔을 리 없었다. 그가 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냈다. 흐릿한 형체로밖에 보이지 않아, 눈을 찌푸렸으나 그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는 너무도 작아 보이던 물건이 매들린의 손바닥 위에서는 작았다. 적당하니 익숙한 무게감. 둥근 소가죽으로 된 지갑 같은 물건.

    

“이게 뭐예요.”

“열어보시오.”

    

이안이 뒷짐을 지었다. 그가 또 짐짓 시치미를 뗐다. 그의 시선 뒤편으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매들린은 조심스럽게 가죽으로 된 케이스를 열었고, 그 안에는 안경이 있었다. 그것도, 런던의 본드 거리에서 맞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안경이.

  

“이건-.”

“좋지 않은 시력으로 공부를 하는 건 무리잖소. 그뿐이니까, 사양하지 말고.”

    

남자의 그저 그뿐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예전에 맞춘 것과 똑같은 안경을 선물하는 건 꽤 큰 정성이었다. 게다가 그 안경은 수제 제작품이었다. 적어도 런던의 본드 거리에 있는 그 안경점을 다시 찾아가야 맞출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매들린은 슬몃슬몃 올라가는 입꼬리를 안간힘을 써 억눌렀다.

“안 써보나?”

남자가 보지 않는 척하면서 재촉한다. 매들린을 곁눈질하는 게 뭔가 조급한 모양이었다. 

    

“빨리 안 쓰면 큰일 나겠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는 매들린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것을 썼다. 그러자 다시 시야가 맑아졌다.

“사실 당신에게 이게 필요할까 싶기도 했어.”

“왜요?”

안경을 낀 매들린이 슬몃슬몃 웃었다.

“내 모습을 당신이 보는 게 좋기도 하지만.”

“…….”

“싫기도 하지.”

    

침윤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은 매들린이 안경을 벗었다. 그녀가 한 손으로 남자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가까이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차피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다 보여요.”

당신의 흉터, 눈가의 주름, 동공의 광채.

    

“하.”

“그러니까 그런 ‘미운’ 소리는 하지 마시죠. 기껏 선물해놓고 점수 깎이면 억울하잖아요?”

    

* * *

    

다시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돌아온 매들린은, 낡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펴둔 두꺼운 책을 다시 마주했다. 이번에는 안경과 함께였다. 남자를 만나고 나니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과 별개로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도 그럴 게, 매들린은 일하랴, 공부하랴, 연애하랴 몸이 세 개여도 모자랐다.

연애라.

    

남자를 다시 만난 지 한 달이 되었다. 남자는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호텔에서 지냈다. 호텔이 편하지는 않을 텐데, 걱정이 되는 한편으로 자기가 뭐라고 그를 걱정하고 있나 싶었다. 지금쯤 월시 부인의 매들린에 대한 평판은 나락을 기고 있을 텐데. 물론 그녀를 당장 내쫓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와줘서, 좋았어.’

    

진작에 이렇게 만났어야 했던 게 아닐까. 그냥 하찮은 연애란 걸 하면서. 매들린은 어느새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안경을 책상 구석에 벗어두고 엎드려 쪽잠을 청했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 * *

-- 더 얻게 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어떠한 형태의 사랑을, 증오를, 선의를 베풀까.

몸이 두 개여도, 세 개여도 모자란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는 삶이 쉬울 리가 없었다. 횟수로 따지면 두 번째의 삶이었지만, 이렇게 분초 단위로 숨 가쁜 삶은 처음이었다.

호텔에서는 정신없이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부산을 떨다가, 호텔을 벗어나면 곧바로 안경을 쓰고 열렬한 간호학도의 신분이 된다. 한참을 공부하다가 다 떨어진 양초처럼 지치면 털레털레 하숙집으로 돌아온다. 도착한 집에는 언제고 새로운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싱싱한 오색 빛 튤립 구근들이었다. 그것들을 건네주는 월시 부인이 너무도 아름답다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근래 탐탁지 않던 그녀의 눈초리는 언젠가부터 양순해져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아.’

깨달음이 매들린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면 그렇지. 기어코 이안이 먼저 수를 쓰고 만 것이다. 그렇게 제 ‘경제적인 사정’에 개입하지 말라고, 들켰다가는 끝이라고 엄포를 놨건만, 어떻게든 월시 부인의 품속에 돈다발을 쥐여준 게 분명했다. 돈다발이 아니라면 보석이든 땅문서든, 뭐든. 그렇게 해서 월시 부인의 환심을 산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정말….’

어쩔 수 없이 항복을 뜻하는 한숨이 비집어져 나왔다. 이런 건 그냥 모르는 척해야 하는지, 아니면 끝까지 거절해야 하는지 알쏭달쏭했다. 어쩌면 남자는 문제의식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초에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왜 자신이 월시 부인과 친분을 쌓으면 안 되는지 납득하지 못할 터였다.

“매들린. 이 튤립들, 너무 예쁜데… 어머 당장 얘네들을 꽂을 화병이 필요하겠네.”

매들린이 어색하게 멈칫거리고 있자 월시 부인이 먼저 나서서 허둥지둥 부엌으로 사라졌다. 매들린은 피곤한 몸을 벽에 기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이 되어야 하루 쉴 수 있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이틀은 쉴 수 있어야 사람 사는 것 같을 텐데.’ 물론 아직은 별세계의 일이었다. 

어찌 됐든 내일은 천금같이 귀중한 휴일이었고, 그 휴일은 이안과 보낼 참이었다. 그에게 한 주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서 종일 떠들 생각에 기대가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월시 부인의 태도 변화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 그녀를 또 작은 번뇌의 구렁텅이 속에 빠트렸다.

어쩌면 자신이 그냥 넘어갈 일을 또 부러 또 키우고 있는 걸지도. 무능한 아버지와 전생의 죽음에 대한 반작용이 자신을 이리 예민하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기엔, 그녀는 지나치게 졸렸다. 지금 자신이 전생에 있는지, 꿈결에 있는지, 현실에 있는지도 가물가물할 지경으로 지치고 잠이 왔다. 

“론필드 양. 이거 봐요. 이 컷글라스 병이면 꽤 그럴싸한 화병이 되지 않겠어요? 어머. 어머!”

월시 부인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컷글라스 병을 식탁 위에 올려뒀다. 그 뒤 벽에 기대 쭈그려 앉아 잠든 매들린을 툭툭 건드렸다. 호흡도 하고, 심장 맥박도 뛰는 걸 확인한 부인이 십 년 감수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매들린 로엔필드인지, 론필드인지 저 아가씨가 제집에서 비명횡사했다가는…

물론 하숙인 여성 중 그 누구도 잘못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으나, 매들린은 경우가 좀 달랐다.

‘으.’

그 무시무시한 남자가 제 문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프랑켄슈타인, 아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남자는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물론, 참전용사들을 응당 존중해야 함은 상식인의 도리였다. 월시 부인도 그쯤은 알았다.

아니. 애당초 그녀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침례교회에 다녔고(그래서 하숙인 여성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을 무척 걱정했다), 자선 부흥회도 참석했다. ‘몸이 불편한’ 교우들에게도 상냥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내면을 무척이나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왜일까? 말을 붙일 때는 세상 예의 바른 영국인인데, 입을 다물면 너무나도 무서웠고, 제 하숙인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게 신경이 쓰였다. 지체 높은 양반이 이곳에 사는 여자와 연애 같은 걸 한다면, 결말은 늘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길함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안 노팅엄이 들이민 수표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기 때문이다.

* * *

눈을 뜬 매들린은 자신이 소파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기절하듯 잠이 든 자신을 하숙인들이 어찌어찌 소파에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자니 너무 미안했다. 

눈앞에서 생긋생긋 웃는 로즈가 보였다.

“그 멋진 유령 기사 양반이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아쉽네요!”

로즈는 하숙인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했다. 테네시 내쉬빌에서 상경해왔고, 전화 교환수로 일하고 있었다. 숱 많은 짧은 단발이 푸들처럼 나풀거리는 게 귀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말 말아. 월시 부인이 또 기겁하신다고.”

베스가 로즈를 툭툭 치며 웃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운송업 회사의 경리였다. 주판알을 긴 손가락으로 빠르게 튕기는 재주가 있었고, 어쩐지, 이사벨을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둘 다 정말 미안. 내가 또 정신을 놓고 잠이 들어버렸네.”

“매들린. 우리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스스로를 걱정해야죠.”

베스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봤다. 주근깨 어린 얼굴이 잔뜩 진지하게 일그러졌다.

“내일은 푹 자기나 해요!”

로즈도 거들었다. 그녀의 처진 눈이 걱정으로 더 처졌다.

매들린은 어찌할 줄 몰라 입만 뻥긋댔다. 잔뜩 화난 두 얼굴 앞에서 차마 내일은 아침에 일어나서 주중의 복습을 할 거고, 점심에는 이안과 센트럴 파크에서 만날 거라는 계획을 누설할 순 없었다.

“보나 마나. 내일 그 남자와 연애를 할 생각이지요?”

베스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로즈가 눈을 굴렸다.

“일단 약속이라…”

“꽤 열렬하네요. 그래도 안 돼요. 매들린. 내일은 쉬어요. 이러다가 브루클린 어느 하숙집에서 초상 치르겠어요. 가엾은 월시 부인의 얼굴이 얼마나 새파래졌는지 모를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 전화번호 내놔요.”

“안 된대도.”

이 대 일로 일방적인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귓전을 때리는 버저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로즈와 베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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