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꿈결 같은 시작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시간도 둘 사이에서 얼어붙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할 수 없었다. 파티가 파하고 돌아가는 사람들로 대문가가 북적이자, 둘은 자리를 떠야 했다.
이안이 마지못해 사람들을 곁눈질했다. 그가 몸을 기울인 뒤 매들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은 내가 있는 곳을 알지.”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있는 곳을 알지. 나에게 돌아올 방법을 알고 있지. 그러니 반드시 돌아와야 해. 강요보다는 확언.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사라졌다. 그림자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절뚝이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매들린은 얼빠진 채로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남자가 남겨진 자리에는 깊은 상처 같은 공허만 남았다.
아. 이제 집으로 가는 택시를 불러야지. 그제야 바깥의 추위를 실감한 그녀는 자신의 팔뚝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 * *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하… 답이 없다.
혼잣말을 되뇌고 되뇌어봐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엔조 라오네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하기야,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한 관계를 결딴내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엔조가 자신을 놔두고 가버린 걸 탓하고 싶진 않았다. 그쪽에서 느꼈을 상실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상처 입은 그를 두고 이안과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지 않았던가. 죄책감이 무겁게 얹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더 어리석은 일을 하기 전에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침내 그의 집 앞에 당도하자 도로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매들린이 발걸음을 멈췄다. 예상보다 앞서 남자를 만나게 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엔조는 어쩐지 웃자란 느낌의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은 매들린에게 결코 보인 바 없었다. 그는 언제나 치기 어린 청년이었다. 기쁨과 슬픔, 욕구를 금방 드러내고 쉽게 삐지고 원하는 그 나이대의 남자. 하지만 지금 그는 마치 노회한 사업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엔조는 지금과 같은 조숙한 얼굴을 많이 할 터였다. 젊지만 어엿한 사업가가 아니던가. 그렇게 수완이 좋다던데, 매들린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남자인 게 분명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봤을까, 인기척을 느꼈는지 담배를 태우던 엔조가 매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 입꼬리를 당겨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미간을 찡그리는 것이 어쩐지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매들린이 손에 든 페이스트리 봉투를 등 뒤로 숨겼다. 엔조가 추천해준 이탈리아 베이커리 가게에서 사 온 거였다. 매들린이 다른 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엔조!”
“안으로 들어갈까요.”
“아니.”
그 말을 들은 엔조의 표정이 사정없이 무너졌다.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단호할 때에 단호하지 않은 게 더 잔인한 처사일 터였다. 상대를 희망 고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짓거리였다. 매들린이 페이스트리를 담은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지난번엔 정말 미안했어. 파티에 참석하는 거, 많이 기대했잖아. 많이 놀랐지?”
“아니에요. 매들린도 몰랐던 건데. 내가 왜 마음이 상해요…. 초대받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던 걸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던 건데. 나 같은 게 들떠가지고는. 그나저나 집에는 잘 돌아갔어요? 미안해요, 그때는-.”
“응. 잘 들어갔으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그래도 그렇게 놔두고 먼저 가선 안 됐는데. 미안해요. 젠장. 홀츠먼인지 뭔지 그 빌어먹을 놈이랑 붙어서 이길 자신이 없었어요. 비겁하게도. 그래서…”
“괜찮아. 내게 해명할 필요는 없어.”
그때였다. 엔조가 별안간 페이스트리 봉투를 매들린에게서 빼앗았다. 그가 그녀의 빈손을 제 손바닥으로 꽉 쥐었다.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하다는 건 알아요. 붙잡을 수 없단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 분해서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돈이 좀 더 많았더라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매들린도 놀랄 정도로 그녀의 어조는 냉정했다. 아마도 엔조는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과의 관계를 알았다 하더라도 별반 차이는 없을 터였다. 엔조는 여전히 분개했을 것이다. 상대적인 박탈감,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원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이안과 자신의 관계를 돈만으로 얽힌 것이라 오해하는 건 아니 될 일이었다. 청년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바로잡아야 했다.
“엔조. 너는 내가 가장 아끼고 고마워하는 동생이야.”
“매들린.”
“그이는 내가 무척이나 증오했고 사랑하는 이이고. 미안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더 확실히 널 거절했을 거야.”
“그런 거라면, 애초에 나한테 기회 같은 건 없었던 거잖아요?”
하하. 엔조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역시 눈치가 기민했다. 그것이 남자의 약점이자 강점이었다. 매들린의 굳세고 차분한 눈길을 보고 그는 제게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가요.”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을 지금 몇 번이나 하는지 알아요?”
엔조가 웃었다. 그가 담뱃재를 발로 찼다. 볼에 보조개가 푹 팼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가라고요. 매들린.”
* * *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법이다. 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은 한 삶의 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들린은 이안 노팅엄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 놀라, 몸을 떨었다. 엔조 라오네의 노회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고작 빵 봉투를 내밀며 이별을 고하려던 제 유치함을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잿빛 뉴욕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 * *
한 달 뒤.
매들린은 공부를 복습하는 중이었다. 당뇨병에 대한 노트를 끄적이며 그녀는 깊은 상심에 빠졌다. 이 병을 치료해줄 비기는 없을까.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차피 지금의 그녀는 고매하신 백작부인도 뭣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노팅엄 저택에 숨어들어왔던 남자, 제이크가 이야기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아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타인을 위해 헌신한 이들은 언제나 매들린을 매혹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헬렌 켈러. 그들처럼 유명하진 않더라도 감히 그런 삶을 따라가길 바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간호사 학교 수업은 따라가기 어렵지 않았으나 처음 듣는 내용도 많았다. 저택에서 일했을 때는 당장 투입되는 게 급했던지라 처치 위주로 배워나갔다면, 학교에서는 생물학의 기본적인 원리들과 과학 교과를 차근차근 가르쳤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었다. 예컨대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당뇨병 같은 문제라든가.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매들린이 자세를 곧추세웠다. 그녀가 책장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 시간에 누가 그녀를 찾는 것일까. 그녀는 피곤한 눈을 비볐다. 맥도먼드 씨네 사환 숙소에서 나와 근처의 하숙집에 세 들어 사는 중이었다. 집주인인 월시 부인은 점잖은 사람이었다.
“누구시죠?”
“론필드 양. 손님이 왔어요.”
“네?”
매들린이 문을 열었다. 방문 앞에는 월시 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가 매들린을 곁눈질하며 연신 헛기침했다.
“아가씨를 꼭 뵙고 싶어 하는 손님이 왔더군요.”
월시 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녀가 겁에 질려있다는 게 분명했다. 미약한 공포를 확인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안이야.’
월시 부인은 환희로 빛나는 매들린의 얼굴을 보고 의아해했다. 얌전하던 하숙인이, 저 무시무시한 남자랑 무슨 관계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제가 내려갈게요. 월시 부인.”
매들린은 계단을 총총 내려가고, 얼빠진 월시 부인만 덩그라니 남겨졌다.
아주 늦지는 않았다. 남자가 무지막지한 결례를 무릅쓰고 나타나지는 않았단 이야기다. 그렇다 해도, 여자들만 사는 하숙집에 불쑥 등장하기는 쑥스럽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니, 아무래도 좋다. 매들린은 순수하게 기뻤다. 그와 정식으로(비공식적으로 재회한 지는 그보다 좀 더 됐으니까) 재회하고 나서 매일이 꿈결과 같았다.
하지만 꿈이라기엔, 이안 노팅엄은 너무나도 구체적이다. 그의 살은 뜨겁고 무게감이 있으며 남자의 흉터는 거칠다. 촉감이 반응한다. 그의 눈물은 짜다. 그에게는 겨울의 냄새가 난다.
전 생애의 그가 희미한 유령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오감을 반응하게 한다. 매들린은 마치 예민한 지진계처럼 그를 감지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안은 문가에 서 있었다. 초대받지 못한 뱀파이어 같았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는 힐끔 보기에 완벽한 신사의 전형이었으나, 잘 모르는 사람이 가까이서 보면 공포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구부정한 거대한 몸체에, 뭔가 어두운 얼굴 한쪽, 그리고 날카로운 눈빛까지. 한낱 대학생 하숙 거리의 한복판에 마냥 서 있기에는 범상찮은 인사로 보인 탓이었다.
‘가엾은 월시 부인이 놀랄 만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이안을 나무라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특히 세입자 아가씨들의 정숙함을 누누이 강조하는 월시 부인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하지만 다섯 명의 하숙인 여성 중 그 누구도 월시 부인의 충고를 귀담아듣는 이 없었다. 다 각자 열렬한 연애에 몸을 담고 있었고, 통금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다(그나마 매들린만 지키는 축이었다). 하숙집의 모범생 매들린마저 위험한 연애에 빠져있다고 오해할 게 뻔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는 순간, 매들린은 그런 걱정일랑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남자의 무뚝뚝한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그 역시 잘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무시무시했으나, 매들린에게는 진실한 호의가 엿보였다. 그가 몸을 살짝 뒤척였다. 매들린이 그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여기까지 왜 왔어요.”
어제도 봐놓고서는. 매들린이 샐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본 이안의 얼굴이 놀라우리만치 누그러졌다. 눈매까지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