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햄튼의 밤(2)
“음?”
매들린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뒷짐을 진 노신사 하나가 서 있었다. 저택의 관리인이었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엔조와 매들린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관리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양 되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용무시죠?”
“주인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 순간 테이블 위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전부 매들린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밴드가 연주하는 스윙이 그나마 연회장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동행이 있는데요. 주인 되는 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요.”
매들린이 얼떨떨하게 응수하자 남자가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주인님께서는 로엔필드 양을 뵙고 싶어 하시는군요.”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분을 잘 모르는데.”
그때였다. 하나의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니. 서운하게 그러네.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사이잖아요?”
이제는 밴드도 연주를 멈췄다. 사람들은 춤을 추지 않고 멀뚱히 서서 매들린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시간이 갑자기 멈추고, 모두를 드리운 환각이 갑자기 거두어진 듯했다.
고개를 들자, 시선의 끝에는 홀츠먼이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멀끔한 미소를 걸친 채로.
“홀츠먼 씨.”
급격한 통증이 송곳처럼 그녀의 두개골을 쪼개는 것 같았다. 옅은 분홍색의 쓰리피스 슈트를 입은 남자는 동화 속의 왕자님 같은 모양새였으나 매들린에게는 악마처럼 보였다.
“당신 누구야?”
엔조가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홀츠먼을 쏘아보았다.
“라오네 씨. 당신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바로 나인데, 참 서운하군요.”
홀츠먼이 방긋방긋 웃으며 엔조를 내려다봤다. 그가 매들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엔필드 양,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했는데도 내게 연락 한 번 주지 않다니 너무한 것 아닙니까. 결국, 이런 치사한 수를 써서라도 부를 수밖에 없었어요. 라오네 씨가 이렇게 좋아하시니 뜻하지 않은 보람도 있네요.”
어금니가 절로 앙다물렸다. 엔조의 황망한 표정에 매들린의 가슴도 철렁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엔조. 잠시만 기다려요. 곧 내려올게요.”
표정이 가라앉는 엔조를 보자마자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홀츠먼은 엔조에게 초대장을 보내는 척하면서 매들린이 이곳에 오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니까, 초대장은 일종의 미끼였다.
그것도 모르고 잔뜩 들떠서 자신이 드디어 성공했다고,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던 엔조를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매들린이 그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채로 홀츠먼을 노려봤다.
“위로 올라가죠. 그래야 당신에게 실컷 화낼 수 있을 테니까.”
“아아. 무섭네요.”
말만 그렇지 전혀 무섭지 않다는 표정의 홀츠먼을 보자 더 기분이 나빠졌다.
“당신이 내 뺨을 치기 전에 먼저 안내를…”
그러거나 말거나. 매들린은 성큼성큼 앞장서나갔다. 브라스 밴드의 연주자들까지 그녀의 뒤꽁무니를 쳐다봤다.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하듯 매들린의 옆얼굴을 훑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두의 시선은 파트너 없이 혼자 남은 엔조에게 향했다.
홀로 남은 남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지독한 수치심과 열패감이 그의 척추 가장자리를 타고 솟구쳤다. 모두가 남겨진 자신을 안쓰럽게 쳐다보게 놔둘 수는 없었다. 분노와 혐오는 응당 참을 수 있어도, 동정심은 아니었다. 그는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류 사회에 대한 고약한 증오의 감정이 그의 가슴에 싹트는 순간이었다.
* * *
뒤따라가던 홀츠먼이 계단을 다 올라갈 때쯤엔 매들린의 앞에 있었다. 그는 경직된 분위기를 정리하려는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는 상관없는데, 나는 거기서 빼줘요. 말했잖아요. 이안과는 이제 끝이라고요.”
“이야기는 안에 들어가서 하죠.”
그가 앞에 와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지, 거대한 나무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에서는 축음기를 통해 잔잔한 재즈가 들려오고 있었고, 어두침침한 조명은 시가 연기로 자욱했다.
시끄러운 아래층과 달리 남녀가 도란도란 담소하는 소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매들린이 안에 들어가지 못해 엉거주춤하자 홀츠먼이 먼저 들어섰다.
“아래층은 너무 시끄럽지 않았나요. 이곳이라면 당신의 작은 목소리도 충분히 들리겠죠. 자, 이제 욕하면서 내 뺨을 치세요.”
홀츠먼이 한쪽 뺨을 자랑스럽게 보였다. 치라면 치라는 식이었다.
“장난 마세요.”
뺨이 아니라, 주먹질이 될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의 응접실은 1층보다는 작았지만 층고가 대단히 높았고, 그 때문에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고풍스러운 공간이었다. 벽을 가득 채운 조각상과 회화는 흡사 어느 왕족의 수장고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훨씬 대단했다. 미국의 물정을 잘 모르는 매들린조차 눈에 익은 인사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사람이야말로 홀츠먼의 진정한 컬렉션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상원의원, 시장, 영화배우, 그리고…. 난롯가에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단발의 금발 여성은 연예인은 아니어도 패션 잡지에 오르내리는 부호의 딸이었다. 릴리안 해블러. 유명인도 직업이라면, 그녀는 유명인이 직업이었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난로 불빛에 번들거렸다.
이내 시선이 닿은 다른 한편에는 키가 큰 남자가 앉아있었다. 피우지 않는 담배를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이였다. 측면만 보이는 데다가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 밑으로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의 정돈된 검은색 머리칼은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음영만으로도 돋보이는 외모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번듯한 이목구비와 강인한 턱, 그리고 분위기. 미동도 하지 않는데도, 우아하고 간결한 모습이었다.
매들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그 남자를 쳐다봤다. 안경을 쓰지 않아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었고, 알 리도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해서 그런가, 계속 뻔하게 쳐다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가 움직였다. 담배를 그대로 재떨이에 던지고, 의자에 기대어 놓은 곤색 지팡이를 쥐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매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매들린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고,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의 형체가 서서히 일어서더니, 절뚝거리며 매들린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익숙해서, 매들린은 잠시, 시간 감각을 잃었다.
* * *
이안 노팅엄은 영혼을 믿지 않았고, 영혼도 그를 굳이 찾지 않았다. 그는 텅 비어서, 욕망 없이 작동하는 기계장치 같은 이였다. 지난 삶에서 그에게는 단 두 가지 소명밖에 없었다. 회계장부 속 숫자를 늘리는 것과, 여자를 곁에 붙들어놓는 것.
그것은 그의 무덤이었다. 일과 사랑이 그의 업이요, 형벌이었다. 매들린 노팅엄은 그의 수감생활을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증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식도 없이 죽어버리면, 남겨진 매들린만 좋은 꼴이 되는 거라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어쩌면 잘 된 거지. 부부가 서로를 지독히도 싫어한대잖아? 새로 시집을 가면 남자를 골라잡을 수 있을 거야. 긴긴 독수공방 생활에 대한 보상이 되는 거지. 호호.
만약 매들린의 삶에 거대한 흉터 하나를 남길 수 있다면, 이안은 죽음까지 고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들린에게 집착하는 만큼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매들린은 막대한 유산을 안고 곧 그를 잊을 게 분명했다. 새로운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해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살았다. 때로는 가장 졸렬하고 하찮은 이유가 사람을 살게 한다.
치졸한 발상이라는 건 이안 본인도 알았다. 그는 제 손길 닿지 않는 연인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 * *
매들린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바로 앞에 이안 노팅엄이 서 있었다.
매들린의 손에 땀이 찼다.
“오랜만이네요.”
“…….”
화상 가득한 흉터 밑 눈동자가 번뜩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사선으로 젖혔다. 그녀가 중언부언했다.
“홀츠먼 씨가 저를 초대했어요. 이곳에 당신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지금이라도 가야겠네요….”
그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러나 원체 표정이 없는 남자라서인지, 매들린만이 그것을 눈치챘다. 남자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옷이 멋지군.”
“아. 네… 새로 샀어요.”
오래간만에 만나서 내뱉은 첫인사치고는 다소 싱거웠다. 하지만 매들린이 그의 얼굴을 살폈을 때 놀랍게도 그곳에는 잔뜩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채로, 손가락을 달싹거리면서 부끄러워하는 남자가.
매들린이 자신이 입은 드레스 자락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새로 산 금색 드레스는 유행에 맞게 얇고 똑 떨어졌다. 몸의 실루엣이 보일 듯 말 듯하면서도 단아했다. 게다가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이안은 매들린의 이러한 모습은 처음 봤을 터였다.
“당신의 머리카락 색과 어울려.”
아아. 이번에는 매들린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졌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답지 않은 낯간지러운 말들을 내뱉는 모양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래선 안 되지.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도,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남자도 잊을 뻔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저는 그럭저럭 잘살고 있어요.”
남자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매들린이 먼저 선수를 쳤다.
“사실 이곳엔 애인과 함께 왔어요.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꿈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녀가 속한 현실이라는 지표면 위에 다시 두 발을 디뎌야 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떠나려는 순간, 남자가 손목을 잡았다. 짜릿, 전기 충격이 가해지듯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불붙은 심지처럼 뜨거웠다.
‘그 허우대 밑에서 어떻게 울었는지 궁금하군.’
그때의 그 손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처롭고 어딘가 주저하는 듯한 손의 힘이 점점 더 굳건해졌다.
고개를 돌리면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날것의 얼굴. 절박한 얼굴. 봐서는 안 된다.
매들린이 서둘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넘어지지 않게 사력을 다하면서….
계속에서 발이 헛돌았다. 윤기 나는 대리석 계단 위의 흰 다리가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