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햄튼의 밤(1)
‘흠. 헤이스팅스 같은 여걸에게 저런 무례를 범하다니.’
홀츠먼은 릴리안이 이안에게 치대는 광경을 눈치껏 관전 중이었다. 헤이스팅스 부인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거기에다 이안의 한숨까지.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거기서 이미 게임이 끝났을 거다. 그러나 릴리안은 굴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절박한 것일 터였다.
‘이게 다 자네가 결혼을 하지 않아서야.’
그랬으면 좀 좋아. 이런 거추장스러운 일이라곤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여자에게 사적인 관심 같은 건 안 두는 이안의 모습을 처음엔 오해도 했었었다. 혹시 전쟁터에서 혹시 성 기능이라도 불구가 되어 온 게 아닐까. 저 녀석에게도 약점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지극히 합리적인 의심을 했었단 말이다.
물론 그런 의심은 몇 개월 전 이탈리아 근교의 노천 욕장에서 깡그리 말소되고 말았다. 이안은, 음, 그러니까 지극히 멀쩡했다. 멀쩡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역시 매들린 로엔필드가 문제란 말인가. 참 순애보기도 하시지.’
사실은 순애보라기보다는 질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매들린 로엔필드라는 여자의 어떤 점이 도대체 그런 강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없었다.
웬 이탈리아인까지 집적대는 걸 보면 말이지.
홀츠먼은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고 사업에 뛰어드는 타입이었다. 얄팍한 성정과는 달리 작전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 있어서는 끈기와 철저함도 중요하다 여겼다. 그런 그인 만큼 매들린의 회신을 오래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철저히 뒷조사도 해두고 말이다.
엔조 라오네. 마피아 놈들이랑 같이 일하는 라오네 형제 중 셋째. 동북부 소고기 도매중개업으로 꽤 짭짤한 돈을 벌었다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래도 기백 하나는 대단했다.
아. 그때 샴페인의 기포가 터지듯, 한 발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잘만 하면….’
그 풋내기를 이 판에 끌어들이는 거다.
홀츠먼은 그런 부류를 알았다. 자존심이 없는듯하면서 강하고, 호승심은 그보다 더 큰 부류. 끈기 있고 머리 좋지만 태생적인 약점 때문에 더더욱 테이블 위의 판돈에 목숨 거는 부류 말이다.
그는 점잖게 쾌재를 불렀다.
* * *
엔조 라오네는 자신의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잿빛 같은 유년기를 지나자 총천연색 세상이 제 발밑에 융단처럼 깔리는 기분이었다.
구닥다리 사제 권총을 휘두르며 저를 쏴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술을 퍼먹다가 시비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가족들은 도망치듯 토스카나 마을을 떠나야 했다. 대양을 건너 뉴욕 브루클린의 비좁은 집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쪼들리는 세월을 보냈다. 엔조는 낮에는 신문을 팔고 저녁에는 불량배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렇게 형제들이 합심해서 모은 코 묻은 돈으로 정육점을 시작했다.
그 후로부터였을까, 일이 술술 잘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간 형제들이 쌓아온 신뢰 관계와 성실하다는 평판이 먹혀들어 가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납품 기한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키고, 하자 있는 물건은 취급도 안 한다는 소문은 빠르게 돌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독기가 바짝 올라와 있던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틀 자체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같은 이민자 출신임에도 맹한 건지, 바보인지, 착한 건지 알 수 없는 여자를 봤기 때문이었다. 맥도먼드네를 뭐를 믿고 저렇게 신뢰하며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건지.
물론 맥도먼드 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잠을 아껴가며 무료 노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약간의 가욋돈을 얹어주긴 하지만, 엔조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제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준다거나, 선물을 해준다거나, 웃을 때면 환하게 웃는다던가.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다른 공부까지 한다던가. 처음에는 그 여자의 순진한 모습에 반했으나 갈수록 진취적인 면모가 있단 걸 알게 되었다.
엔조 라오네는 소고기의 품질을 재빨리 판별하는 재주가 있었다. 사람은 소고기가 아니지만, 사람에게도 윤기가 나는 부류가 있다는 건 알았다. 매들린은 그런 사람이었고, 함께하면 같이 성장해나갈 수 있단 확신이 들었다. 과거에 다소 신경 쓰는 점만 제외한다면 모든 점에서 좋았다.
결혼해서 애도 있는 형들이 안다면 미친 듯이 웃어 재낄 생각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 미래를 운운한다고 말이다.
뭐. 사랑도 있고. 말주변이 없는 저로서는 발설하기 어려운 마음 같은 건 말이다. 그런 건 남에게 발설하기엔 너무 낯간지러운 이야기였다.
각설하고 남자의 행운에 대해서 더 말해보자. 엔조 라오네의 행운은 매들린을 껴안으면서 한 차원 도약했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사랑할 수 없다? 사귀어 줄 수 없다는 말은 아니잖은가. 그녀는 결국 어느 정도 시간을 가져보자는 말에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장장 1년을 넘게 공들인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슈바이처 박사도 아닐진대, 순진하게 호의만 베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행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투박한 손가락 끝으로 날렵한 편지봉투를 쓸었다. 우아한 필기체로 쓰인 편지의 시작은 이러했다.
{ 친애하는 라오네 씨.
햄튼의 밤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
* * *
“파티?”
“네. 파티에요.”
“흠….”
라오네는 양손으로 무거운 교본을 아무렇지 않게 옮기며 말했다. 어조에서 뿌듯함이 가시질 않은 걸 보니 무언가 대단한 파티인가 싶었다.
문득 전쟁 직전의 런던 사교계가 떠올랐다. 그 모든 격식을 생각하면 허무함이 밀려왔다. 인사를 해야 하는 순서, 빠짐없이 외워야 했던 작위와 영지의 이름들….
뉴욕의 사교계는 무엇이 다를지 몰랐다. 이곳도 전쟁을 겪으며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변하지 않는 부분들도 있겠지. 사람의 허영심이란 건 원체 안 바뀐다.
이러나저러나 눈앞에서 자랑스러움으로 두 눈에 이채가 도는 엔조를 보니, 기분이 과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노력해온 만큼 축하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티의 주최자는 억만장자라고 했다. 오로지 지역의 유명인사를 까다롭게 선별해 저택에 초대한다고 하는데, 그 리스트에 엔조가 특별히 올라간 거였다.
“축하해. 유명해진 것 같은데?”
“그래요. 드디어 사업가로서 성공한 거라고 볼 수 있다고요. 이제 좀만 있으면 저도 햄튼의 모래사장 옆에 별장 하나를 마련할 수 있…”
“됐어. 넌 너무 미래만 생각한다. 지금은 온전히 축하할 차례야.”
매들린이 엔조의 손아귀에서 무거운 책을 빼앗아갔다.
“재밌게 놀다 오라구.”
“…매들린이랑 같이 갈 건데요?”
“응?”
엔조가 짐짓 화내는 듯한 얼굴을 했다. 말해 무엇하냐는 식이었다.
* * *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금방 말을 붙여온다. 유쾌하고 발랄한 겉의 이면에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턱시도를 빼입은 젊은 남자들이 대문을 열어줬고, 체크 무늬 대리석 바닥 너머로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고 있는 게 보였다.
단발머리의 여성들은 한 손에는 칵테일 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남자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홀 중앙에는 재즈 악단이 시끄럽게 스윙을 연주하고 있었다.
엔조의 눈이 소년처럼 반짝였다. 진주의 저택이라고 불리는 곳답게 모든 곳이 우윳빛이며 옥빛이었다. 우아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금색 기둥과 문설주는 마치 투탕카멘의 무덤 속 보석들 같았다. 샹들리에는 황금 소나기처럼 보였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이 짝을 이루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20년대. 발광하는 20년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리 부르는 줄, 이곳의 사람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다 한들 크게 관심도 가지지 않을 터였다. 과거 없이 오로지 현재를 살아가고, 만끽하고, 탕진하는 데에 골몰하는 젊은 부자들의 모습은 매들린의 시야에 영원토록 각인 될 것이었다.
엔조와 매들린이 들어서자마자 낯선 사람들이 그들에게 술잔 하나씩을 건넸다. 프랑스 최고급 발포주인데 항구에서 몰래 들여오느라 주인장이 고생깨나 했다는 말이 덧붙여졌다. 한 모금의 술은 몸을 덥혔고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샹들리에에서 내리쬐는 불빛이 마치 금빛 모래바람 같았다. 여인들의 반짝이는 은색 드레스는 마치 바다의 파문 같아 이것이 현실인지 실감하기 어려웠다.
노팅엄 저택에서의 장엄한 화려함과는 달리 사람을 마약처럼 도취시키는 미국식 부의 황홀경이었다.
춤에는 자신이 없는 매들린조차 어깨가 들썩거리는 곡조였다. 들뜬 마음을 애써 추리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비단 식탁보가 있는 둥그런 테이블에는 세 사람이 이미 자리해있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그들은 전부 젊은 남녀였는데, 매들린과 엔조를 자못 떨떠름하게 맞이했다.
“처음 보는 분들이네요.”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엔조 라오네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매들린이예요.”
엔조가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명함에 적힌 글귀를 흘깃 곁눈질한 남자 둘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됐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그 ‘초대장’을 받았잖아요. 서로 자기소개는 생략해도 될 것 같은데….”
그의 옆에 앉은 여자는 까르르 종달새처럼 웃었다.
“초대장이라고 해봤자, 위층에는 못 올라가지만 말야.”
다른 남자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면서 중얼거렸다.
“왜죠? 위층에 거대 다이아몬드라도 있나요?”
언제 긴장했냐는 듯, 엔조가 다소 공격적으로 되물었다.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남자가 뭐 이런 걸 다 모르냐는 듯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주 저택의 주인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위층의 응접실로 들여요. 다들 올라가고 싶어 안달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주인 양반이 어떤 사람이길래.”
“거, 좋은 질문이군요. 이곳의 주인이 영국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정유회사 가문의 날라리 장남이란 소리도 있소. 아무도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말이야. 이런 대단한 파티를 계속해서 여는 걸 보면 뭔가 있겠지요.”
“위층으로 가려면 또 다른 티켓을 얻어야 합니까?”
그 질문에 세 남녀가 서로 눈빛 교환을 했다. 파이프를 문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가 매들린과 엔조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글쎄. 일단 당신이 무얼 하느냐에 달렸지요. 아무래도 고기 장사로는 힘들지 않겠어요?”
“…….”
노골적인 조롱에 엔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매들린 역시 그들의 경우 없는 무례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저리 공격적으로 굴 이유가 있나? 그녀가 테이블 밑으로 엔조의 주먹 쥔 손을 일단 참으라는 뜻을 담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림자 하나가 그들의 테이블에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