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이곳에서 나랑 같이 (63/121)

62화. 이곳에서 나랑 같이

돌아오는 내내 둘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간호사는 왜 하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아서.”

“…착하다는 말하면 건방진가. 신기하긴 하네요.”

“난 착한 사람이 아니야. 간호사라고 해서 다 착한 건 아니야. 나이팅게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매들린이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노팅엄 저택에서 그녀는 일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환자들을 꼼꼼히 몇 번이나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안의 편지가 더디게 오는 날들은 더욱더 심했다.

어느 날 오츠 부인이 그녀에게 경고했다.

[매들린. 환자에게 매달리면 안 돼요. 명심하세요.]

그때의 기억이 씁쓸한 모래알처럼 그녀의 입가에 맴돌았다.

“잊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직면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이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남을 돕는다는 느낌. 진득하게 쌓이는 육체의 피로, 정신적인 소모가 필요했다. 그러나 간호사는 성직자가 아니고, 일을 한다고 해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답지 않게 엔조에게 진지한 이야기까지 해버렸다만, 평소라면 농담으로 응수했을 남자는 침묵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고귀한 일은 고귀한 일이니까요. 마찬가지로 나쁜 일은 나쁜 일이고.”

“……”

“나도 노력하고 있어요. 질 나쁜 녀석들, 사람 가지고 협박하는 녀석들이랑 선 긋고 제대로 우리 형제들의 힘으로 일어서려고 방법을 찾는 중이에요. 당신은 안 믿겠지만.”

“……”

“이름도 바꾸려고요. 젠장.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기엔 너무 쪽팔린데…, 엔조 대신 토니, 어때요?”

“토니야말로 진짜 이탈리아인의 이름 같은데….”

“……”

“엔조. 정말 그런 이유 때문에 이름을 바꾸려는 거야?”

“돈을 아무리 벌어도. 그 돈으로 강을 메우고 황금으로 된 신전을 지어도, 올라갈 수 없는 한계가 있어요. 아니 애초에 그런 돈을 만지지 못하고 늘 삼류 깡패 놀이나 하는 이유는 다 그런 데에 있죠…”

말을 잇지 못한 그의 눈에서 일견 화염 같은 것이 타올랐다.

“난 최고가 되고 싶어요. 누군가가 내 길을 막으면, 돌아서라도 갈 거예요.”

“……”

“그리고 당신은 내가 본 것 중의 제일이에요. 그런 당신 앞에서 떳떳해지고 싶어.”

‘그리고 당신은 내가 본 것 중의 제일이에요. 라니….’

어떤 점에서.

매들린은 놀랍기보다는 한없이 남자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매들린은 최고라는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첫 번째 인생은 우스꽝스러운 희비극이었고 작금의 두 번째 인생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일단 감옥에 간 것 자체가 그렇게 썩, 훌륭하진 않으니까. 

물론 그게 유감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는 매들린 로엔필드의 세속적인 성공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그녀는 그런 점에서 세상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엔조 라오네가 철없는 짝사랑 중이라는 심증만 굳어지는 중이었다.

“미안해.”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해가 진 브루클린의 거리는 점점 쌀쌀맞아졌다. 초봄의 추위는 여전했다.

“왜요. 왜 생각은 안 하고 거절부터 하는 거예요.”

호소하는 목소리를 들은 매들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야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으니까.”

“당신을 좋아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요. 삶의 좋은 것들을 왜 누리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좋은 것들을 누리려고 하지 않는다니?”

“자 봐요. 지금 노을, 아이들의 웃음소리, 저기 핀 허접한 꽃 같은 거. 지금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고 거머쥘 수 있을 때 거머쥐어야죠. 당신은 젊고, 나도 젊고. 이 순간을 같이 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

“솔직히 난 당신의 과거를 잘 모르지만, 하지만 옛일에 얽매여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건 납득할 수 없다고요.”

“지금 눈 마주치고 있잖니….”

매들린이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생기로 약동하는, 오로지 현재와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청년의 얼굴에서는 가공할 만한 집중력이 느껴졌다. 

“그 백작인지 공작인지 하는 자식이랑 잘 될 생각 하는 건 아니죠?”

“무슨 소리야…!”

매들린이 처음으로 평정을 잃었다.

“그렇담, 내게 기회를 줘요.”

엔조가 한 손으로 매들린의 장갑 낀 손목을 부드러이 감싸 쥐었다. 매들린이 끙끙거리며 안절부절못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잘할게요. 정말 잘할게요. 매들린이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간호사가 되고 싶건, 비행기 조종수가 되고 싶건. 환갑이 되어서 에버레스트 등반을 하러 간다 해도 좋아요. 오히려 같이 가면 좋죠.”

의도했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남자의 그 말에 매들린의 속이 일렁였다. 위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엔조의 얼굴이 햇빛을 난반사하는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일렁였다.

깊이 사귀었지만, 단편적으로만 알았던 사람의 모든 면을 갑자기 너무 많이 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남자의 숨이 가빠졌다. 

제 초라한 고백이 도대체 어떤 점에서 여자를 흔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싸구려 같지 않았는가. 애새끼 같지 않았는가. 사랑은 바라지도 않으니 손만 잡아달라는 이야기나 별반 다름없었다. 한마디로 내뱉어놓고도 쪽팔린, 비굴한 동냥이었다.

매들린이 조용히 말했다.

“엔조. 나는 널 사랑할 수 없어.”

“거절은 아니네요.”

“사실…, 감옥도 다녀온 사람이야. 나는-.”

“…상관없어요. 분명히 잘못했을 사람은 아니니까.”

“잘못 저지른 거 맞아. 도대체가, 넌 상식이 없어.”

매들린의 목소리가 옅은 유리처럼 떨렸다.

“상식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가 매들린의 목을 감싸 안았다. 키스를 하려는 걸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오던 얼굴이 이내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혔다.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따뜻했다.

“과거로 돌아가는 배는 전부 불태워버려요. 이곳에서 나랑 같이 사는 거야.”

* * *

릴리안 해블러는 결국 귀찮은 패가 됐네. 홀츠먼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몰래 공수해온 발포주를 들이켜며 사태를 관망했다.

그가 매주 열기로 유명한 파티에는 언제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유럽의 고관대작에서부터 서부의 영화감독까지. 각계각층의 새로운 유명인사들이 찾아왔다.

일견 잡탕처럼 대충 섞어놓은 것 같은 손님들의 면면은 사실 오랜 시간을 들인 세심한 선정의 결과였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스피커를 독점하지 않게 하면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홀츠먼의 파티는 대부분 사람들을 만족시켰고 일부를 분개시켰다. 분노와 역겨움은 언제나 무료함보단 나은 법이니, 그의 파티는 백 퍼센트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요새 그의 ‘햄튼 나잇’은 단순한 유명세를 넘어 사교계의 열렬한 관심을 받는 중이었다. 고고한 동부 명사들이 초대장을 손에 넣고 싶어 눈에 쌍심지를 켜는 광경이 꽤 볼 만했다.

홀츠먼으로선 얼떨떨한 일이었으나 원인을 알고 나자 이내 그럭저럭 수긍할 수 있었다.

이안 노팅엄.

좌중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는 남자.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사람들의 영국인들에 대한 동경은 참 잘못되었어.’

홀츠먼은 한껏 비꼴 대로 비꼬았지만, 남자가 흥미로워 보인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둘러싼 무용담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남자의 그럴싸한 풍채, 거기에 10대 백작이라는 작위의 광휘까지 덧씌워지니 사람들은 침을 줄줄 흘려댔다.

‘하긴 10대째 평민인 이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일 법도.’

그게 당최 무슨 차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적어도 런던 사교계에서 다른 영국 귀족 나리들을 많이 접한 홀츠먼으로서는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안 노팅엄은 이안 노팅엄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봐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빈틈없고 공격적이며 냉정한 사업가였다. 폭력적일 정도로 현실적인 세계관을 용케 귀족적인 태도와 예법으로 치장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

다른 귀족들은 하나 같이 기대 이하였다. 아니, 심지어 노팅엄 가문 사람들조차 존경할 위인들이 못되었다. 굼뜨지, 허례허식 차리지. 그러면서도 돈 달라며 이안을 은근히 보챘다.

에릭 노팅엄은 한마디로 짜증 나는 애새끼였고, 이사벨은, 뭐. 이사벨은 그 말도 안 되는 이상주의만 아니면 똑똑한 여자였다. 

결과적으로 노팅엄 가문이란 자들은 거의 다 꼴같잖았다. 자신만 얽혀있는 게 아니라면 다 같이 망해버려도 상관없는 치들이었다.

‘아. 젠장.’

릴리안 해블러가 눈에 띄었다. 분명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집안의 위세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분명 홀츠먼의 사용인 중 하나가 마지못해 들였을 거다.

릴리안 해블러는 보송보송했다. 솜털은 애초에 다 빠진 성숙한 여성이었으나 무척이나 생기발랄해 보여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플래퍼 패션의 선도주자답게 한껏 치장한 모습이었다.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빼고, 입은 분홍빛으로 칠했다. 

한껏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어렵지 않게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안 노팅엄은 난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 그의 앞에 앉은 건 작고 마른 노부인이었다(물론 그녀는 미국 남부에서 가장 큰 목장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안은 얇고 긴 궐련형 담배를 자주 피웠다. 시가나 파이프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대화에 집중한 채로 궐련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놓고 있었다. 미국의 옥수수 가격과 그것이 가축의 품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이야기라니. 오랜만에 진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껏 경청하느라 그는 누군가가 제 담배를 뺏어가는 것도 몰랐다.

“노팅엄 경, 정말 흥미로운… 대화를 하고 계시네요.”

“음.”

모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웬 불청객에게 방해받다니. 적잖이 언짢아진 이안이 그답지 않게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안의 옆에 의자를 끌고 와 한 자리를 차지했다.

“헤이스팅스 부인, 부디 제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저도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