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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천치 같게도 (62/121)

61화. 천치 같게도

이안은 홀로 응접실 소파에 앉아 타닥타닥 이는 잔 불씨를 응시했다. 홀츠먼은 온갖 욕설을 지껄이며 밖으로 나갔으나 그가 무얼 하고 있건 알 바 아니었다. 어떤 여자와 시시덕거리며 제 욕을 하건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그를 계속 손바닥 밑의 숯불처럼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말 사소한 문제 하나가 말이다. 

매들린의 손목에 걸려있던 시계가 그의 신경을 완전히 잠식하고 있었다. 하늘색 스트랩의 시계는 백화점에서 구입한 것으로, 사환 급여만으로는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남자인가.’

예리한 송곳이 두개골에 들어간 것처럼, 온통 그 한심한 생각뿐이었다.

매들린의 손을 다른 남자가 잡고 유유히 걸어가는 장면을 생각하면 내장의 일부가 꼬이는 것처럼 불쾌했다. 그뿐이랴. 상상 속의 남자는 매들린에게 자신이 결코 줄 수 없는 것들을 줄 터였다. 행복하고 평범한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매들린과 남자를 생각했다. 그 가족사진을 갈가리 찢어발겨도 시원찮았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행복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는가. 그는 생각했다. 자신을 저버리고, 도망까지 치고 나서는,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럴듯한 모습으로 살아간다고? 그녀가 없는 동안 이안 노팅엄은 자신을 스스로 재촉하고 몰아붙였다. 마치 자신이 조금이라도 보기 그럴싸한 존재가 되면 매들린 로엔필드가 돌아올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출소한 매들린 로엔필드가 저택으로 돌아왔더라면 그는 그녀를 기꺼이 맞이했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람들이 그녀에게 무슨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없었다. 

남자는 매들린의 방문을 위해 저택을 전면 보수했다. 현대식 가전을 들여놓고, 녹이 슬거나 곰팡이 진 곳 없이 모든 곳을 편리하게 닦아놓았다.

머저리 같은 짓이란 게 곧 분명해졌다.

매들린은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저택을 영영 떠나 바다를 건넜고,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준 시계를 차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용서할 수 없다.

보고 싶고, 뼈가 으스러지게 안고 싶은 것과 별개로 꺾인 자존심과 해묵은 원한의 감정이 그를 목 졸랐다.

이안은 자조했다. 결국, 자신이 미국까지 와서 보고 싶었던 건 매들린 로엔필드의 불행이었나. 졸렬하게도 그러했다. 그는 매들린처럼 이타적인 사랑을 몰랐다. 자신이 불행한 만큼 그녀 또한 불행하기를. 그녀를 품 안에 안을 수 없는 만큼, 그 누구도 그녀를 안을 수 없기를.

매들린이 자신을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살고 있기를.

결국, 그는 그 정도의 존재였다. 외로움에 고여서는 빠져나오지 못하는 물고기.

‘난 그저….’ 

이안은 눈을 감았다. 예리한 송곳 같은 고통이 어느새 커다란 망치가 되어 사정없이 그의 뒤통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안은 그저 매들린이 단 한 번이라도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기를 바란 건지도 몰랐다. 아니, 용서는 되었다. 그 역시 모든 사정을 알지는 못하니까. 다만 오롯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랐다. 

저택에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전부 처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을 거다. 처음부터.

아아. 나는 천치 같게도 모든 것을 그르쳤구나. 깨달음은 언제나 몽상 후에 숙취처럼 다가온다. 술기운에도 몽롱한 정신은 자책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주 깊은, 죽음 같은 잠을 잤다. 

* * *

{ 이안 오빠에게.

이 편지가 도착하는 때 즈음이면, 오빠는 대서양을 건넜겠구나. 미국은 번쩍번쩍하겠지. 하지만 그만큼 명암이 짙은 곳이란 걸 알아. 물론 이 편지에서 구구절절 내 생각이 이렇고 저렇고 따지고 싶진 않으니까 조용히 할게.

바이에른은 참으로 격정적인 동네야. 괴테와 쉴링이 글을 쓰던 고적한 도시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 매일 같이 많은 일들이 벌어져. 새로운 사상들과 인물들이 내게 마구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어. 이곳에서라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내가 하고 있는 일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물론 오빠는 단 한 가지도 부러 알고 싶어 하진 않겠지만… 이해해. 오빠같이 감정적으로 꽉 막히고 보수적인 사람이 노력이라도 한다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물론 농담이야). 

내가 왜 독일을 선택했는지, 오빠가 이해할 거라 기대하지 않아… 몇 년 전 총부리를 맞대고 싸운 적국이니까. 하지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뒤에야 날아오른다는 금언을 기억해. 가장 어두워 보이는 때야말로 빛을 앞두고 있는 순간이야. 나는 그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이제 지루한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오빠는 지금 그 잘난 그레고리의 집에서 머물고 있겠구나? 돈을 좀 만지기 시작한다더니 얼마나 으스댈지 궁금한걸. 그에게 내 안부를 전해달라고는 안 할게. 아니, 절대 하지 말아줘. 그 녀석도 어렸을 때는 꽤 귀여웠는데, 점점 돈만 알더니 해괴해지고 말았단 말이지. 

새로운 곳에서는 새로운 생각들로 마음을 다스리길 바라. 대서양의 맞은편에선 적어도 지루한 인수 합병과 가족 회사의 지분에 대해서 골머리를 썩이진 말란 이야기야. 그보다 신선한 생각들을 해봐. 

여전히 매들린 로엔필드를 생각해? 원한으로든, 그리움으로든 어떤 감정으로든 말이야. 부디, 부디… 그녀를 미워하진 말아줘. 전부 내 잘못이란 걸, 오빠도 알잖아? 

안녕.

추신) 집안 노인네들이 나를 늙은 후작에게로 결혼시키려는 걸 결사적으로 막아줘서 고마워. 내가 이곳을 떠날 수 있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

* * *

맹위를 떨치던 추위의 기세가 가시고, 따뜻한 봄기운이 도시를 지펴 올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법 가벼워져 형형색색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매들린 역시 푸른 모자를 쓰고 얇은 코트를 걸친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엔조 라오네가 있었다. 그는 쓰리피스 슈트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채로 매들린을 에스코트하는 중이었다. 꽤 잘 나가는 양복점에서 차려 맞춘 옷은 남자에게 번듯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사실 매들린은 손에 든 지도와 눈앞의 길거리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있었다.

홀츠먼은 그날의 접근 이후로 두 번 다시 매들린에게 다가오지 않았고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온종일 신경이 그 둘에게 곤두선 나머지 일에 집중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둘, 특히 이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알수록 그를 떠올리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끼니를 거르는 이안, 다쳐서 끙끙거리는 이안, 고개를 푹 수그린 이안…. 그런 남자의 모습들을 상상하고는 지레 겁에 질리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잘못되면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도 될 것처럼.

어찌 되었든 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반전의 계기가 절실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간호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노팅엄 저택에서 열심히 간호사로서 훈련을 받았으나 일을 그만둔 지 오래된 지금, 모든 것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 더 심도 있는 훈련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늘 있었던 것도 사실. 그녀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대끼며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몇 년 전 간호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크게 불었다. 전쟁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간호사 면허가 신설되는 한편으로 인가를 받은 간호사 학교들이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노동운동가이자 개혁가인 조세핀 골드마크 같은 사람들이 이룬 업적이었다.

‘면허를 가지고 싶어.’

아무것도 없이 몸만 남아있는 것 같은 이런 때에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작은 증명이 절실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수소문했고, 지금 원서를 접수하러 가는 중이었다.

길을 잘 안다며 동행을 제안하는 엔조를 뿌리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매들린은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날엔 절대로 말이다. 아무리 1년이 넘게 살았다 해도 뉴욕의 거리는 복잡했고, 다시 소매치기 같은 걸 당한다면 정말 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갈까마귀가 물러선 이후로, 어쭙잖게 화해까지 한 터였다. 물론 아직은 서로 어색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엔조는 잔뜩 긴장한 매들린의 옆얼굴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늘 살짝 처연함에 물들어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독한 열의가 떠오르자 재밌는 모양이었다.

“긴장 풀어요. 그래봤자 원서의 내용을 바꿀 순 없잖아요.”

“누, 누가 긴장을 했다고 그래.”

물론 거짓말이었다. 접수처에서 자신의 범죄 이력을 알아내는 악몽을 이틀이나 연달아 꾸었다. 물론 알 방법은 없었다. 유명한 범죄자가 아닌 이상, 알아내기 힘들었으며 알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뉴욕은 불한당들의 도시였다. 

접수는 시답잖게 빨리 끝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류 전형은 아직 시작도 안 한 데다가 접수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무슨 심안이 있어서 사람을 꿰뚫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오히려 옆에 서 있는 엔조를 보고 은근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꼭 ‘아내의 꿈을 응원해주러 온 남편’을 보는 눈빛이라 기분이 묘했다.

그런 것 아닌데요. 속으로 덧붙인 말도 어쩐지 사족으로 느껴져 머쓱했다. 하지만, 서류를 한가득 내자,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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