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사랑인 걸까
롱아일랜드주의 사우스햄튼은 부유층들이 주로 기거하는 동네였다. 푸른 바다가 있는 데다가 맨하탄으로부터 멀지 않아 별장이 밀집되어 있었다.
뉴욕의 번잡스러움이 불편한 이안으로서는 당분간 머물기 적당한 곳이었다. 자동차들의 경적소리를 들을 때 소스라치진 않아도 뼛속 깊이 거북스러운 건 도저히 고칠 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원활하게 도보를 걷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햄튼에 줄지어있는 아름다운 석조주택들 가운데 단연 눈에 가장 띄는 것은 홀츠먼의 으리으리한 3층짜리 집이었다. 언뜻 조지안 양식으로 지어진 크림색 집은 드넓은 발코니와 아름다운 정원이 갖추어져 있었고 밤마다 다채로운 파티가 열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홀츠먼은 이안의 크리스탈 잔에 버번위스키를 따랐다.
“불법 아닌가?”
이안이 아무렇지 않게 묻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침묵했다.
“떼잉. 금주법 같은 거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백작 각하.”
홀츠먼의 유들유들한 대꾸에 다들 너털웃음을 지었다. 홀츠먼의 예일클럽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재계와 정계에서 한가락 하는 인사들로, 영국의 낯선 귀족 사내에게 지대한 호기심을 보이는 이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법 때문에 아일랜드인들, 이탈리아인들만 이득을 보고 있지. 하루하루 구슬땀 흘리며 일하는 정직한 서민들만 손해를 보고 있단 말야.”
시가를 입에 물고 콧수염을 기른 사내가 투덜거렸다. 이름이 뭐였는지 이안은 기억조차 하지 않은 자였다.
“자아, 자아. 다들 심각한 이야기는 마세. 노팅엄 경에게 미국식 환대를 제대로 보여주자고.”
“미국식 환대라. 조앤 크로포드라도 오는 건가?”
남자들이 큭큭거렸다. 이안은 웃지 않았다. 그때 벨이 울렸다. 연미복을 입은 사용인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파티의 제대로 된 시작이었다.
* * *
뒤늦게 도착한 손님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비행기 조종사라는 멋들어지게 생긴 남자, 신문 재벌인 에머스트 일가의 총수인 존 에머스트 2세, 러시아의 추방된 귀족까지.
여성들도 제각각이었지만 다들 화려하게 차려입은 건 마찬가지였다. 은사가 수 놓인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짧게 친 머리, 길게 빼올린 눈꼬리와 붉은색 입술 하며 팔색조 같았다.
그래봤자 다들 지체 높은 가문의 아가씨들일 터였다.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맞이해야 하는 게 적잖이 귀찮았으나 유년기에 받은 엄격한 예절 교육이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같은 손님 된 도리를 다해 사람들을 맞이했고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홀츠먼 씨가 싸고돌던 손님이 당신이로군요.”
누가 그렇게 이안을 맞이했다. 그는 눈을 한번 깜빡였다.
* * *
작은 파티는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홀츠먼은 눈앞의 남자와 적당히 대거리하면서도 이안 쪽을 끊임없이 곁눈질했다. 여자들은 그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아니, 비단 여성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 예일 동문들이 그에게 넋이 나가 있는 걸 보면.
“그 끔찍한 솜강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일을 하셨다면서요.”
“영웅적인 일은 아니었고, 당연히 군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정말이지, 참 애국자세요….”
게다가 이안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릴리안 해블러가 눈에 들어왔다. 연극 배우인 어머니를 닮아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에 비하면 그 매들린인지 하는 여자는… 수수하지.’
릴리안은 낯선 영국 남자에게 완전히 반해 있었다. 독신이지, 귀족이지, 돈 많지. 그런 요소들이 다 중요하긴 했으나 지금 그를 감싸는 신묘한 아우라는 모두를 도취시켰다.
낭만주의적인 소설의 주인공 같은 아우라 있잖은가. 아무튼 홀츠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차라리 이안 노팅엄이 릴리안에게 마음을 둔다면 일이 얼마나 편하게 풀릴까 싶었다. 릴리안을 부추겨서 이안을 움직일 수 있다면 노팅엄 가족 회사에서 제 위치도 확고해질 테고 말이다. 이사벨이고 뭐고 다 술술 불게 할 수 있을 거고.
‘저 여자에게 판돈을 걸 수 있으면 좋겠군.’
그는 계속해서 술이 끊어지지 않게 신경 썼다. 그리고 저녁 식사 자리를 교묘하게 바꾸었다. 이안 노팅엄 옆에 꼭 해블러가 앉도록 말이다.
파티가 끝나고 사용인들이 기민하게 홀을 치웠다. 술에 기분 좋게 취한 사람들은 쌍쌍이 비싼 차를 타고 흩어졌다. 릴리안 해블러는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으로 이안을 계속 흘끔거렸다.
이안은 그녀에게 눈길 하나 주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에머스트 영감과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서로 속삭이는 건지. 이안이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낌새를 보였다. 그가 초로의 사내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것참 안 됐군.”
에머스트 2세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완전히 떠나고 남은 저택은 황량했다. 그레고리 홀츠먼은 그 황량함이 주는 끔찍한 기분을 사랑했다. 먼지처럼 덧없기에 더 가치 있는 것도 있다. 이사벨은 별처럼 영원한 걸 꿈꿨으나, 과학자들에 따르면 별들도 빛나는 먼지 덩어리들이었다.
홀로 남은 이안이 남은 버번을 비우는 홀츠먼을 향해 빈정거렸다.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이유를 모르겠군.”
이안이 홀츠먼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라니. 이 파티를 자네도 즐기지 않았나.”
“릴리안 해블러는 지나치게 어려.”
자리를 바꿔 놓은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식사 내내 릴리안이 이리저리 말을 붙여오는 걸 무뚝뚝하게 대답하느라 성가셨겠다. 그러나 그 무뚝뚝함은 또 젊은 여자의 승부욕에 불을 지필 터. 결국 이안만 귀찮아진 셈이었다.
“…난 다 자네를 생각해서-.”
“경고하지. 더는 내 생활에 끼어들지 말게. 내가 어떤 여자를 만나건, 만나지 않건. 자네가 신경 쓸 이유는 없어.”
“매들린 로엔필드에 묶여 사는 꼴이 안쓰러워서 그래.”
홀츠먼도 모르게 이죽이는 말투가 나와버렸다.
‘그래. 잘나시고 고고한 귀족 나으리.’
빈한한 가문이었던 홀츠먼을 일으켜 세워준 게 전부 노팅엄 가문이었다.
‘그 가문을 전부 집어삼켜 소화시키는 게 내 목표야. 이사벨 노팅엄은 그러기 위한 내 첫 단추고.’
“후회할 말은 하지 마.”
이안이 소파에 앉았다. 어둠 속 그의 그림자는 끔찍하게 외로워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여위어 약해 보였다.
“매들린 로엔필드가 우리의 사업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 이런 말 용서하게. 정말 미안하지만, 자네가 결혼하지 않으면 최후엔 에릭 녀석만 웃을 판이라고.”
‘그리고 에릭은 그렇게 사업 머리가 뛰어나지 않아. 그 자식은 10년 안에 저택을 경매에 넘길 게 분명해.’
“고작 사업 때문에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해야 하나.”
이안의 말투가 술기운에 살짝 느려져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우리가 어떻게 이 사업을 일궈왔는데 그걸…”
“…첫째로, 이건 우리의 사업이 아니란 걸 명확하게 해두어야겠군.”
“……”
“두 번째로, 매들린 로엔필드는 내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해. 나는 날 저버린 사람을 다시 신용하지 않아.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
“그런 건 내 인생의 오점에 불과한 거야. 전쟁도, 그녀도 나를 변하게 하지 않았어.”
* * *
‘정말 독사 같은 인간이야.’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그의 축이요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이안은 무너져요.]
그런 현란한 말을 입에 침 하나 안 바르고 술술 나불댈 수 있는 배짱과 비위가 참으로 대단했다. 하기야. 그래서 그렇게 많은 채권과 주식을 팔아댈 수 있는 거겠지.
주식을 판다는 건 희망을 판다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주식을 살 때 회사의 현재 가치를 보는 게 아니라 미래를 보고 산다는 건 매들린도 아는 상식이었다. 다만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다가올 미래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몇 달 전 증권거래소에 주가를 표시하는 기기가 설치되고 나자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주식을 더 사들였다. 제니도 매들린 보고 빨리 장에 들어가라며 몇 가지 종목을 추천해줄 정도였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흘러들어온 돈은 모두의 시야를 덮을 정도로 넘쳐 흘렀다.
홀츠먼은 그런 떠들썩한 광란의 시대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이사벨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사벨을 만나봤자 뭐가 달라지겠어. 이사벨이랑 잘 되어보려고 저러나 본데 말이나 되는 소린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사벨이 남자를 흠씬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니, 어쩌면 둘은 나름 어울리는 한 쌍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게 한가지 있었다.
이안이 무너진다고?
[약속하겠어… 당신을 다시는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몸통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주판알을 더듬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녀를 보고 싶었다고 했다. 마치 수치스러운 고백을 하는 것처럼. 전투에서 진 검투사가 관중을 향해 목숨을 구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간 그를 껴안으려는 지나친 욕망으로, 매들린은 제 마른 몸이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 게 사랑인 걸까.
아니다. 그럴 순 없는 법이었다. 사랑은 본디 온유하고, 다정하며, 잔잔한 너울 같은 게 아니었던가. 사랑은 질투하지 않는다. 사랑은 감히 상대방을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한때 마나 노팅엄 병원에서 이안과 함께하면서 보냈던 시간은 그러했다. 부드러운 아기의 손가락같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도처에 그 둘과 함께했다.
그때의 매들린은 이안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행복까지 기원해줄 수 있었던 거다.
‘너무 오랜 시간 낯선 땅에서 떨어져 있다 보니 폭력적이거나 육체적인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거야.’
매들린은 스스로를 달랬다. 남자를 껴안거나 입 맞추고 싶다니.
아무튼 구속하는 욕망은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 지난 생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감정이었으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홀츠먼이 건네준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몇 번이고 헛손질을 거듭한 건, 순전히 손가락이 얼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