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또 다른 방문객
“그 자식 뭐예요.”
결국, 엔조 라오네가 먼저 이렇게 말할 지경이면, 사태가 원체 심각한 걸지도 몰랐다. 이탈리아 동네까지 이야기가 퍼진 거니까. 엔조야 이곳저곳에 워낙 발이 넓으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는 차분하게 물어봤지만, 눈빛은 채 갈무리되지 못한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치기 넘치는 질투심과 호승심이 그 안에서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매들린은 그를 바라보며 쌀쌀맞게 응수했다.
“지난 고용주.”
“…그 사람이 괴롭혀서 이곳으로 온 거예요?”
“어. 완전 악덕 고용주였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도 시원찮은 사람이었지.”
“장난하지 말고요.”
“정말 그뿐이야. 엔조. 내 편의를 봐준 사람이야. 예전에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했었다고 했잖아. 그곳 병원의 소유주였어. 됐니? 그 사람이 도와준 덕분에 많은 걸 배웠다고.”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아일랜드 거리에 나타나니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지나가는 김에 들렀대.”
“그 말을 믿어요? 혹시 그 작자가 무슨 짓이라도 하면….”
지금 남자는 퍽 끈질기게 굴고 있었다. 그 원인이 불안감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웬 백작이니 하는 작자가 나타나더니 매들린과 무언가가 있다는 뉘앙스까지 풍기는데, 자존심상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거다.
이해가 가는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매들린은 눈앞의 젊은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보다 훨씬 몸집도 큰 데다가 짙은 눈썹의 남자다운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매들린 앞에서나 이렇게 전전긍긍하지 밖에서는 벌써부터 사람 부리는 법을 아는 어른이었다.
매들린은 그가 번듯한 자신만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쉽게 그려졌다.
‘얼마 안 가면 크게 될지도 모르지.’
그에게는 가정적인 아내와 충직한 아들들, 귀여운 딸이 필요할 거다. 매들린이 제이나 라오네에게 며느리로서 합격점을 받은 것도 리틀 토미를 살갑게 치료해줘서였다. 그 생각을 하면 어쩐지 속으로 살짝 거부감이 이는 것은 왜일까. 이유를 딱 짚어낼 수 없었지만, 그랬다.
“저기, 엔조. 지금까지 나를 도와준 건 고마워. 이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길이 없을 거야. 하지만 노팅엄 경…. 아니, 노팅엄 씨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건 삼가줘. 내게는 고마운 분이라고.”
“…….”
엔조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볼 안의 살을 씹는 듯 얼굴이 움푹 패었다.
“서로가 가장 힘들 때 곁에 있어 준 친구 같은 존재고, 내가 모신 분이야. 그뿐이야. 다들 호들갑 떨고 있는데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였지.”
매들린은 진심이었다. 이안 노팅엄이 객관적으로 좋고 나쁜 사람이냐를 떠나서, 이런 식으로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고, 그를 저버린 건 매들린 쪽이었다.
둘은 침묵 속에 길을 걸었다. 엔조는 매들린을 식료품점 바로 앞까지 배웅하고 나서야 제 갈 길을 갔다. 실내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연말 음식을 차리려는 사람들이 몇몇 있는 한편으로, 부자연스럽게도 키 큰 남자 한 사람이 수상할 정도로 오래 절임 코너에 서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호텔에서 봤던…, 지배인 옆에 있던 형상을….
가까이 다가가고 나서야 명확해졌다. 그는 바로 그레고리 홀츠먼이었다.
“안녕하세요. 매들린 로엔필드 양.”
“…….”
이제야 퍼즐이 전부 짜 맞춰지는 것 같았다. 이안이 어떻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았는지 알 수 있었다. 호텔에서 일하던 매들린을 홀츠먼이 먼저 봤던 것이다. 그가 이안에게 알렸겠지.
“이곳에는 웬일이신가요.”
매들린이 그에게 무뚝뚝하고 공격적으로 질문했다.
“피클 좀 사려고요.”
“절임 음식에 관심이 있으신 줄은 전혀 몰랐는데요.”
“스테이크보다야 하겠습니까. 그나저나 꽤 육류 쪽에 조예가 있으시더군요.”
그가 매들린을 향해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엔조 라오네와의 관계를 묻는 건가. 어쩌면 매들린이 너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홀츠먼은 언제나 기분 나쁜 사내였다.
멀끔한 영화배우 같은 안면에 환한 미소까지, 그는 전체적으로 얄팍한 포드 T형 자동차의 외관 같은 인상을 줬다. 미국제이고, 아름답고 눈부시지만 겉과 달리 속은 알 수 없는 남자.
“이곳에서 말씀 나누고 싶으신가요? 절임 코너에 어울리는 대화가 되진 않을 것 같지만.”
홀츠먼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보다 많이 강단 있어지셨네요. 로엔필드 양. 좋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혼자 살아남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
“건너편에 카페가 있는 걸 확인해뒀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지요.”
* * *
싸구려 카페의 커피는 묽을 대로 묽어서 잔의 밑바닥이 훤하게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홀츠먼은 음료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로 매들린을 응시했다.
“많이 세련되어지셨네요.”
화장법도, 머리 모양도. 그의 눈이 장난기로 번들거렸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칭찬 맞아요. 신세계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당신은 이곳이 어울려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안에게 알려준 거죠? 내가 일하는 장소나, 사는 곳 전부…”
“제가 달리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입장 바꿔서 생각해요.”
“…….”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도 당신이 재밌긴 합니다. 단어를 어떻게 골라야 할까요. 이안에게 그렇게 엿을 먹인 사람은 얼마 없거든요. 존경스럽다고 해야 할까…”
직설적인 어조였지만 놀랍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은 있어요.”
“미안한 마음이라. 그 정도입니까?”
“무엇을 원하세요?”
홀츠먼이 조용히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가 매들린에게로 한 개비를 건넸다. 매들린은 살짝 주저하다가 그것을 받았다.
불을 붙이고 나니 매캐한 후추 향이 매들린의 폐부를 괴롭혔다. 콜록거리는 여자를 보는 홀츠먼의 눈빛이 치밀해졌다.
“이사벨 노팅엄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이사벨 노팅엄?
홀츠먼의 입에서 별안간 이사벨의 이름이 나오자 기묘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젠장. 당신도 모르는군….”
그가 뒤로 늘어진 채 담배를 뻐금뻐금 피웠다.
“…….”
“미국의 로자 룩셈부르크라도 될 생각인 건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한 명은 와이오밍에서 그녀를 봤다고 하고, 다른 한 명은 시카고에서 그녀를 봤다고 하고… 심지어 러시아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는 그제야 갈증이 일어난 듯 커피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레고리 홀츠먼과 이사벨 노팅엄이라니. 남자는 그야말로 이사벨이 제일 혐오할 것 같은 부류였다.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고…
“이안이 그렇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요. 동생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사람이에요.”
“흥.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이안은 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이사벨의 체포를 막은 겁니다. 그래도 당신이 잡혀들어가는 건 못 막았지만, 어쨌건 그녀를 묶어둘 수 없다고 판단한 이상, 어쩌겠습니까.”
[가둘 수 없는 영혼이지요. 이사벨은.]
한때 이안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사벨을 가두진 않았을 거예요.”
“이안을 10년도 안 본 당신이 그를 잘 알까요, 갓난쟁이 때부터 본 내가 그를 더 잘 알까요? 그는 제 혈육을 전적으로 소유물로 생각하는 한에서 아낄 따름입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니까.”
지난 생에서 이사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안의 지나친 통제와 억압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제 곁에 있어도 날 수 있노라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이안에게 물어보기는 했어요? 이사벨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고서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말로는 스페인의 어떤 고명한 후작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런 가문은 없습니다. 빼돌린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이사벨의 존재를 지워버린 거예요.”
“어쩌면 몰래 숨겨주고 있을 수도 있지요. 이사벨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거예요.”
“…….”
홀츠먼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그의 의도가 명확했다. 그는 이안이 이사벨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저도 제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라요. 어쩌면 우리가 부러 찾지 않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고요.”
“…이안의 마음을 쥐고 있는 건 당신이지요.”
매들린은 식을 대로 식은 커피를 재떨이에 쏟을 뻔했다.
“오…, 모르는 척 말아요. 당신이 모르는 척하면 정말 곤란하단 말입니다. 이안 노팅엄의 마음을 쥐락펴락하고 여전히 놓아주지 않는 욕심 많은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그가 젖힌 상체를 다시 앞으로 숙이며 매들린에게 속삭였다.
“이안 녀석은 당분간 뉴욕에 머문다고 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왜 그 공사다망하신 양반이 이곳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어요? 당신이 그의 축이요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홀츠먼이 카페의 손수건에 전화번호를 휘갈겼다.
“이사벨을 보고 싶은 건 나나 당신이나 같잖아요. 우리는 한배에 탔습니다. 당신은 이안의 상처를 달래주고 나는 이사벨을 만나고, 일거양득의 기회를 그대로 놓치지 맙시다.”
그리고 그가 곧장 일어섰다.
“전화를 기다리겠습니다.”
아주 잠깐, 매들린은 득의만면한 사내의 눈빛에서 일말의 불안함을 읽어냈다.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