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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재회 (59/121)

58화. 재회

“아…”

쇼핑백을 가득 들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남자가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한쪽에는 지팡이를 쥐고 선 그가 그제서야 매들린을 돌아보았다.

한쪽 얼굴이 불에 타 일그러졌지만, 다른 한쪽은 흰 살결, 균형 잡힌 얼굴에 번듯한 상체까지. 남자는 이전에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컸다. 어깨도 넓었고, 무언가 더 압도적인 구석이 있었다. 전쟁 직후의 그 위태로운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격차가 아득했다.

 얼굴은 더욱더 매섭고 날카로워진 듯했다. 이목구비가 잘 벼려진 칼처럼 서늘했다.

그리고 그 비수가 매들린의 심장을 그대로 살점 없이 도려낸다.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것 같다.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녀는 사냥개와 눈이 마주친 사슴처럼 그렇게 얼어붙었다.

매들린이 할 말을 잊고 입술을 하릴없이 뻐금거리는 동안 남자가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그의 머리 위로 눈이 내렸다.

계속해서, 영원히 내릴 것 같은 눈이 말이다.

* * *

“음….”

맥도먼드 내외는 분주하게 그릇을 옮기고 식탁보를 폈다. 그렇게 하면 식사 자리의 어색함이 감춰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감자 포리지에 거친 빵 몇 조각이 전부인 식사였으나 손님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묵묵히 제 앞에 놓인 식사를 해치워나갔다. 특유의 손놀림에서 귀족적인 제스처가 어쩔 수 없이 묻어났다. 맥도먼드 부부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매들린과 대화를 나누던 낯선 남자를 들인 것이 실수였을까. 남자는 자신을 이안 노팅엄이라 소개했다. 매들린의 전 고용주였고, 아는 사이였노라고. ‘아는 사이’라니. 매들린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으나, 맥도먼드 씨는 그녀가 잘못된 연애 사건에 휘말려 도망친 거라 생각했단 말이다.

‘하긴, 그럴 만할지도.’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기이했다. 기이하다는 표현이 적합하다면 말이다. 상당히 곧고 바른 풍채에 비해 다리 한쪽을 절었고, 얼굴의 일부가 화상으로 일그러져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느낌이 물씬 나서, 고딕 소설에 나오는 고성의 주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저런 남자로부터 도망친 거니?’

역시 원치 않는 정략결혼인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매들린 로엔필드는 매들린 노팅엄일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금단의 관계일지도? 상상의 나래는 계속해서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갔다.

찰스 맥도먼드는 재빨리 매들린을 곁눈질했다. 그녀는 포크질을 하는 둥 마는 둥, 잿빛이 된 낯으로 접시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둘 사이에 얽힌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심증만 더해갔다.

침묵 속의 식사는 얼마 안 가 끝이 났다.

이안 노팅엄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손목 부근을 여몄다. 완벽하게 재단된 양복은 허름한 실내와 부조화를 이루면서도 남자에게 모자람 없이 맞았다.

“노팅엄… 경께서는 이곳에는 친구의 일로 오셨다고요?”

결국, 맥도먼드 부인이 뒤늦게 말을 붙였다. 이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 건도 있고, 친구의 일도 있어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김에 이곳에 들른 건데, 결국 이렇게 결례를 범하게 되었군요. 송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야 영광이지요. 백작님의 방문이라니….”

그때 이안이 싱긋 웃었다. 진심으로 유쾌한 건지, 아니면 가장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엄숙한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리자 인상 자체가 뒤바뀌었다. 그가 매들린을 마주 보며 여상한 투로 말했다.

“정말 좋은 분들 곁에서 잘 지내고 있군요. 로엔필드 양.”

“…….”

“영국을 떠나서 잘 지내는 모습을 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노팅엄 경. 저는…”

매들린의 목소리는 어색하고 경직되었다. 이안의 빛 하나 없는 눈동자가 침잠했다. 그가 식탁 위의 식어가는 포리지로 시선을 돌렸다. 

“실례했습니다.”

이안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그럭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와 함께 수행원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서둘러 이안에게 모자를 건넸다.

그는 문을 열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수행원이 맥도먼드 씨의 뒤로 수표 다발을 건넸다. 그걸 본 매들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참을 수 없는 기분에 그녀가 곧장 밖으로 나갔다. 

코트도 입지 않고 문밖으로 나가자 주택가에서 차에 타려는 이안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확인한 걸까. 매들린 로엔필드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 

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거짓이었던 것 마냥 구는 건 괜찮다. 하지만… 

매들린이 성큼성큼 걸어가 차의 뒷문을 닫으려는 손길을 막아냈다. 그녀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맥도먼드 씨에게 웬 수표예요?”

“식사 값이야.”

이안은 매들린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소리야. 한눈에 봐도 거금을 쥐여줬으면서.’

감자 포리지가 그 정도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이곳에는 왜 온 거냐고요. 내가 힘들어하는 거, 비참하게 사는 거 구경하고, 즐기러 온 거예요? 그런 거라면 굳이 이곳에서 하지 않아도 되었어요….”

아일랜드인 거리에서 둘의 실랑이를 쳐다보는 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매들린은 남자에게 사력을 다해 쏘아붙였다. 앞으로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면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다시는 그가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끊듯이 뱉어냈다. 

“당신이 화를 낼 염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빈정거림이 역력한 어조였다. 

“어차피 당신은 내 호의를 거절했어. 난 내 뒤통수를 친 사람을 다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아.”

“…….”

“이건 그러니까 마지막이라고 해두고 싶군. 다시는 당신을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남자의 싸늘한 초록 눈을 보자, 매들린의 심장이 창자 밑으로 꺼지는 것처럼 추락했다.

그런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 남자의 눈에 은근한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그 역시 그녀를 뿌리쳐야 한다는 걸 떠올렸다. 정말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가 결국 눈을 감고 망연히 고개를 숙였다. 반듯한 콧날과 옆얼굴이 두드러졌다.

하…. 그가 결국 긴긴 천년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단 한순간도 말이야. 보고 싶은 적이 없었나?”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으나 짐작할 수 있었다. 

“……”

“없었던 걸로 알겠네.”

“이안.”

“약속하겠어…. 당신을 다시는 귀찮지 않게 하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숨소리는 물론,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가운데서, 이안이 창백한 얼굴로 나직이 속삭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오. 매들린.”

* * *

맥도먼드네에서 더부살이하는 매들린 ‘론필드’가 사실 영국의 지체 높은 ‘백작’과 연인관계였다가 집안의 반대로 인해 영국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온 거리에 자자했다. 길거리에서 잠시 이안을 봤던 사람들이 꾸며낸 낭만적인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에 때맞추어 아일랜드 마을을 소소하게 달구어냈다.

설상가상으로 맥도먼드 부부는 무언의 긍정으로 이야기를 더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키 크고 한쪽 다리를 살짝 저는 훤칠한 백작의 이미지는 모두의 상상 속에서 점점 신화화되었다. 게다가 그가 영국 최고의 부자인 멜테버른 공작에 버금가는 부호라는 소문까지 더해지자 매들린은 그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은근한 미소를 짓거나 적대적인 눈초리를 보냈다. 후자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일랜드 사람이 어찌 영국 귀족을 좋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나마 맥도먼드 부부의 인망이 좋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매들린은 어차피 어느 쪽도 바라지 않았다. 더 넓은 세계로 도망쳐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좁은 어항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안은 약속했던 것처럼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정말 괜찮은 거였을까. 매들린은 마지막 순간에 제 앞에서 고개를 떨구던 남자를 생각했다. 고통과 묵직하게 피어오르는 욕망 같은 것들이 그녀의 몸을 진동시켰다. 그를 품 안에 안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녀가 알고 배워왔던 모든 상식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그에겐 내가 없는 게 나아.’

매들린은 옥살이까지 한데다가 가진 것 하나 없는 여자였고 이안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피어난 강철의 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나설 권리가 있었다. 아니, 그건 의무였다. 지난 생에서 이안이 망가진 건 어쩌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었으면 그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었을 거야.’

해묵은 죄책감과 고통이 그녀의 의식을 거대하게 짓눌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을 보내면서 새해를 기원하는 것 따위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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