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크리스마스
그날도 매들린은 밤늦게까지 물건의 재고를 확인하고, 그날 맥도먼드 식료품 백화점의 수입과 지출을 장부에 옮겨적는 중이었다.
맥도먼드 씨의 배려하에 얻은 야간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맥도먼드 부부는 매들린이 계속해서 여사환 숙소에서 싸게 머무르도록 편의를 봐주었다. 여러 가지로 고맙기 짝이 없는 부부였다.
영국의 감옥에 갇힌 수지에게 꼬박꼬박 영치금을 내주고 기도도 하고, 그녀의 친구라면 묻지도 않고 도와주는 걸 보면, 퍽 다정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정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 성인의 반열에 든 사람들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열심히 해서 도와드려야지.’
그녀가 한참 등불에 의지해 주판알을 만질 때였다. 갑자기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매들린이 다급하게 가게가 있는 3층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때였다. 밑에서 웬 손아귀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맥도먼드 부인이었다.
“매들린. 지금 내려가선 안 돼. 얼른 올라가렴.”
“하지만, 부인….”
“갱들이야. 마피아들이라고.”
“네?”
매들린이 입을 가렸다.
“이탈리아… 아니, 아니야. 매들린. 어서 들어가렴. 여긴 위험해.”
부인이 서둘러 매들린을 위로 올려보냈다.
다음날 동이 트자 눈앞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보였다.
“…….”
매들린은 빗자루로 깨진 유리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가게 유리창이 박살이 났을 뿐만 아니라 진열대에 있는 식료품들이 전부 털렸다. 이탈리아 마피아 ‘갈까마귀’들의 짓이란 소문이 파다했다.
이탈리아 마피아들과 아일랜드 마피아들 간의 알력다툼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 불똥이 맥도먼드 식료품점에까지 튈 줄이야. 맥도먼드 씨가 제대로 상납금을 내지 않는다며, 아일랜드 상점들에 대한 본보기로 이런 짓을 저질렀단다.
매들린조차 속이 쓰린데 맥도먼드 부부는 어떤 심정일까. 그들은 당장의 손해보다는, 걱정 때문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갈까마귀에게 상납금을 내자니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도 큰 데다가, 아직 아일랜드 세력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였다. 마피아들은 세를 막론하고 금주법을 계기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결국, 죽어나는 건 가운데에 낀 상인들과 서민들이었다.
“…….”
“어떡하죠?”
결국에는 맥도먼드 부인이 먼저 눈물을 왈칵 터트리고 말았다.
“그들이 말한 액수를 일주일 만에 어떻게 마련해요.”
“경찰에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샐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경찰이 이 동네가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쓰는 건 알잖나.”
가게 확장을 하느라 이미 자금을 많이 써버렸다. 곧 맏아들도 대학교에 가고, 둘째 딸은 결혼까지 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납금까지 두 배로 내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매들린은 조용히 상념에 잠긴 채로 유리 조각을 마저 쓸어 담았다. 잔해 위에 작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 * *
지척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왔다. 남녀노소 국적과 인종을 넘어 다들 희망에 부푼 채로 선물 상자를 사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
엔조와의 세 번째 저녁 식사였다.
상념에 젖어 묵묵히 아티초크를 칼로 자르는 매들린을 바라보며 마주 앉은 청년이 눈을 불안스레 굴렸다.
“무슨 일이에요. 매들린. 괜찮다는 말은 마요.”
“엔조. 미안. 집중을 못 해서. 요즘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잖아.”
“그 개자식 이야기라면, 내가 언젠가는 혼을 내줄 거예요.”
엔조는 여전히 진상 손님의 이야기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매들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럴 필요 없어. 늘 있는 일이니까.”
그녀가 힘을 주어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나 억지웃음인 게 오히려 티가 나버렸다. 엔조가 매들린을 거의 다그치다시피 하며 캐물었다.
“진짜 무슨 일이에요. 매들린, 항상 씩씩한 당신이 이렇게 슬퍼 보이는 건 분명…”
“맥도먼드 씨가 힘들어.”
“아….”
갑자기 엔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매들린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갈까마귀들의 짓이라는데. 짚이는 게 있어?”
“…….”
엔조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매들린은 갑자기 묘한 직감에 사로잡혀, 눈앞의 남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한없이 순진하고 다정하기만 해 보였던 엔조는…
“엔조.”
“친하진 않아요. 하지만 말해볼 순 있어요.”
엔조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매들린이 부탁하는 거라면, 내가 직접 나설 수 있으니까.”
“위험한 짓을 하라는 건 아니야. 마피아들이잖아.”
“아니에요. 친한 사이니까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예요.”
아.
“친한 사이?”
“…….”
다정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얼음장이 되었고 긴장감이 테이블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매들린은 얼이 빠져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엔조-.”
“됐어요. 식사 끝났으니까 일어설까요?”
엔조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매들린은 눈을 내리깔고 미약한 두통을 이겨내려고 애썼다. 그래. 이제 모든 퍼즐을 스스로 짜 맞출 수 있을 법도 했다.
고급술이 궤짝으로 있던 라오네 부인의 부엌이 떠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나게 성장한 그들의 사업까지.
엔조의 집안은 이탈리아 마피아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얼마나 깊숙이 연관되어있는지는 모른다. 안면만 튼 사이인지, 아니면 동업자 관계인지. 하지만 어떻게든 호의적인 관계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매들린.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건지 다 알아요.”
엔조의 목소리가 자못 떨렸다.
“글쎄.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니.”
반면, 매들린은 냉정하게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이 뭔지 설명해줄 수 있어?”
“…정말…”
그 순간을, 매들린은 잊기 어려울 거다. 엔조의 장난기 어린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형언하기 어려운 분노가 서렸을 때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냉랭하고 첨예한 암살자 같은 얼굴에 매들린이 당황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먼저 일어나야겠다.”
가게 문 밖을 나선 매들린의 뒤를 엔조가 따랐다.
“화났어요?”
“아니.”
매들린은 빠르게 걸었다. 그 뒤를 보폭이 큰 엔조가 뒤따르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화났잖아요.”
“화 안 났어. 그냥 좀 당황했을 뿐이야. 그런 위험한 사람들이랑 엮여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 사람들… 아니, 젠장. 매들린. 갈까마귀들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
“믿어.”
매들린이 몸을 홱 돌렸다. 굳은 표정의 엔조 라오네는, 전혀 아이 같지 않았다. 노회한 사업가, 폭력에 둔감한 비즈니스맨이라는 인상이 두드러졌다. 살짝 충격적일 지경이었으나 매들린이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나무라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자격으로 너를 나무라겠어. 그러기엔, 넌 날 너무 많이 도와줬는걸. 그냥 걱정돼서 그래.”
“아니니까요. 나는 그 빌어먹을 마피아들과는… 젠장…”
엔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 정도 친분이라든지, 사업적인 제휴 관계가 있는 건 맞아요. 그래요, 젠장. 맞다구요. 친한 형들이에요.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니-.”
“…….”
매들린은 다시 그로부터 몸을 돌렸다. 결국, 엔조는 부정하지 못했다. 마피아. 그래. 그런 거로구나.
다음날, 갈까마귀들은 맥도먼드 식료품점을 건드리지 않겠다 연락해왔다.
* * *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소복소복 눈이 내린다. 모두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며 저마다 웃음꽃을 피운다. 매들린도 매들린 나름대로 행복했다. 엔조와 관련된 일만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감옥에서 보낸 지난 해의 크리마스를 떠올려보노라면 올해는 정말 괜찮은 크리스마스였다.
지난 생의 크리스마스들을 떠올려보자.
…이번 생에는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을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길의 저편에서 흰색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등장하자 흑인 소녀가 반대편으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뭐지…?’
“신이 내려주신 미국을 정화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KKK단에 헌금하세요!”
“…….”
매들린은 그 흰색 무리를 지나쳤다.
KKK단. 이민자들, 특히 유색인종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집단으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모금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매들린은 그들을 보면 피가 생각났고, 자연히 피투성이 고문 장면을 떠올리게 됐다. 마음속 신경 줄이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것 같았다.
지난 생에서라면 꺼림칙하지만 그러려니 넘겼을 광경이 지금은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옥살이가 어느 정도 교훈을 준 셈이었다. 그 교훈을 의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어려웠다.
‘이사벨…’
이사벨이었다면 그들을 보고 뭐라고 말했을까. 수많은 책을 읽은 그녀였다. 그녀라면 무언가 명쾌하게 답을 내려줄 것도 같았다.
‘보고 싶구나….’
옛친구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길을 걷는 사이, 매들린은 백화점 앞으로 당도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친구들과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답례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곳이었다. 아까 전의 마주침으로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와글거리는 군중 속에 파묻히다 보니 땀이 났다.
인기 많은 어린이 코너를 지나자 조금 한산해져, 숨을 쉴 수 있었다. 매들린은 맥도먼드 가족에게 줄 목도리, 커프스, 책, 장난감 기차를 샀다. 수지에게 나중에 전해줄 목걸이도 하나 구입했다.
라오네 가족을 위한 선물도 샀다. 그들에 대한 찝찝한 감정이 풀린 건 아니었지만, 그들이 편의를 베풀어준 건 사실이었다. 그 호의를 계속해서 되갚아야 했다. 라오네 부인에게 직접 전달해야지.
제니를 위해서는 립스틱을 하나 샀다.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진한 빨간색으로다가 말이다. 부지배인인 파르네 씨를 위해서는 작은 향수를. 당연히 그가 늘 뿌리는 공방의 것으로 사는 건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고 나니 거금을 지출해버리고 말았다. 매들린의 손에는 어느새 한가득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몇 개는 맥도먼드 식료품 백화점으로 부쳤지만, 여전히 매들린의 손에는 묵직한 세 개의 종이 가방이 들려있었다.
택시를 타고 아일랜드 거리에서 내렸다. 조심스럽게 눈이 쌓인 거리를 걸어가는 사이, 다시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린이 성가대들이 연습하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매들린은 천천히 맥도먼드 식료품 백화점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눈이 천천히 매들린의 발치에 쌓였다. 소복소복. 흰 눈으로 덮인 길가를 따라 불규칙한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가 발자국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두운 기둥처럼 우뚝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쇼윈도를 무연히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