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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악취미 (57/121)

56화. 악취미

식사가 끝나고 매들린은 레몬맛 칵테일로 입가심했다. 금주법은 말뿐인가 싶었다. 가정집에서 어엿하게 술을 구비해두고 있는 광경이라니. 게다가 지하 창고에 여러 개가 더 있다며 뽐내는 조니를 보니, 궤짝으로 있는 모양이었다. 

한 잔뿐이었는데도 살짝 알딸딸해지기 시작했다. 도수가 꽤 높았다. 술이 들어가자 제이나는 이탈리아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매들린으로서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엔조의 볼이 새빨갛게 익고, 다른 형제들이 허허롭게 웃는 걸 보아 나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니나와 제이나가 매들린을 껴안았다. 포근하고 다정한 품은 매들린의 잿빛 유년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차가운 어머니의 얼굴. 그녀와 손을 잡고 호숫가를 돌던 기억 같은 것들. 그런 것들과 다른, 따뜻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매들린은 엔조와 함께 길을 나섰다. 거리의 밤은 위험하니 반드시 바래다줘야 한다는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위험한 건 정말 사실이었으니까. 

엔조가 머뭇머뭇 일전의 일을 언급했다.

“매들린. 오늘 소동이 있어서…”

“괜찮아.” 

“스카프는, 반드시 보상할게요. 비싼 거잖아요.”

…그래놓고는 배는 더 비싼 물건을 사줄 거면서. 엔조의 성정을 잘 아는 매들린으로서는 말리기도 뭐 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똑같은 걸로 사줘야 해. 꼭.”

“네. 반드시…! 어떻게서든 구해올 테니까…”

“하하.”

매들린이 손가방을 흔들었다. 어두운 거리에 가스등만이 빛을 냈고, 그 앞에서 둘의 그림자가 한없이 일렁거렸다. 

엔조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가족이 무례했다면 먼저 사과할게요.”

“전혀… 전혀 무례하지 않았어.”

비록 매들린으로서는 낯선 방식의 환대였지만, 기분 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가족을 당신이 좋아했으면 했어요.”

“…….”

둘은 매들린이 머무는 맥도먼드 식료품 백화점 여사환 기숙사 앞에 당도했다.

“고마워. 엔조.”

“…….”

엔조가 한참 동안 매들린을 바라봤다. 키스를 기대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대신 어리고 침윤된 목소리가 들렸다. 

“매들린,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고, 왜 이곳에 온 건지… 난 몰라.”

“…….”

매들린의 단정한 눈썹이 가라앉았다. 둘의 숨이 멈췄다. 

“당신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젠장… 그게 좀 초조한 것도 사실이고.”

“…….”

“하지만 괜찮아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잖아요? 뉴욕에 온 순간부터 누구든 새사람이 되는 거니까.”

“그래. 중요한 건 미래지, 과거가 아니야.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할 수 없어….”

당장 눈앞의 남자에게 마음을 바치고 싶어도, 매들린의 심장은 정작 그녀 자신에게 없었다. 재가 되어 타버렸건, 대서양 너머에 있건 간에 지금 그녀의 가슴에 붙어 뛰고 있지 않았다. 

“…뒤의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엔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얼굴이 그림자에 잠겼다. 청년의 눈 속 물기가 반짝였다. 

“잘 자요. 매들린.”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가라앉은 것처럼 들린 것은, 착각이었을 거다. 

* * *

“부자야. 라오네들. 그런 사람이 진짜 부자라고. 뭐, 좀 드센 사람들이긴 한데.”

제니 쉴즈가 화장을 고치며 중얼거렸다. 

“음.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럴 거다. 매들린은 덤덤하게 인정했다. 라오네 형제의 사업이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알 수 없었다. 

“너 같이 덤덤한 척하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

“아이고….”

매들린은 대꾸를 않기로 했다. 엔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지나치게…

밝고, 전도유망하고, 어리다. 

어려움이 있어도 굴하지 않고,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패기가 있는 어린 청년. 

매들린은 그런 엔조 라오네가 부러웠다. 열등감. 질투라고 해도 좋았다. 자신의 젊음은 그렇게 반짝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들린은 상대방을 아낌없이 사랑해보지 못했다. 근심 걱정 없이. 

매들린이 아무 말도 않자 제니가 그녀의 기운을 북돋웠다. 

“뭘 걱정해. 매디. 그 애송이를 단단히 홀려놓을 일만 남았는데.”

“엔조는 애송이가 아니야. 열두 살부터 장사를 배웠대.”

“어련하시겠어.”

제니가 또르르 눈을 굴렸다. 둘은 옥신각신하며 로비로 나갔다.

* * *

매들린의 일은 일견 고상해 보이나, 사실은 우아함이나 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나하게 제 잘난 맛에 취한 작자들이 이것저것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어야 하기도 한단 이야기였다. 그들이 찔러주는 팁을 받으면 기분이 묘하게 나쁘기도 했다. 

차를 따르는 역할일 뿐인데도 퇴근할 때쯤 되면 감정적으로 진이 다 빠졌다. 

물론 기분이 나쁘고 좋음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돈이면 기쁘게 받고, 모욕이라면 잊으면 그만이란 걸 머리로는 알았다. 

중요한 손님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해고는 따놓은 당상이다. 그리고 다들 최고의 호텔에서 일할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급여도 좋고, 지체 높은 사람들과 가까이 일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은 일이었다. 특히 지방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들에게는 꿈의 직장이었다. 

매들린으로서는 높은 급여를 제외한 장점이 그다지 와닿진 않았다. 특히 그 ‘지체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아는 그녀로선 오히려 단점에 가까운 사항이었다. 

맥도먼드 식료품 백화점에서는 가격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는 일은 있어도 제 부를 뽐내며 남을 깔보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곱게 술이나 따를 것이지, 어디서 빼고 있는 거야.”

졸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주식과 채권으로 돈을 쓸어 담은 젊은 부자들은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꽤 상대하기 사나운 부류였다.

“…….”

매들린이 입을 다물었다. 대낮부터 저리 추태를 부리는 이들을 어떻게 쫓아내야 좋을까. 곤란하기보다는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매들린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남자가 발끈했다.

“뭐야. 팁이 더 필요한 거야? 위스키 쟁여놓고 있는 거 다 알아. 차를 섞든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내오란 말이야.”

“자네, 이제 그만하게. 아이고, 죄송합니다. 술은 다른 곳에서 마시자고.”

“이거 놓게! 저 여자가 나를 업신여기잖아! 술 달라고!”

“죄송합니다. 이곳에서 술을 파는 건 불법이라서요.”

아무리 종이호랑이 같은 금주법이라고 해도 말이다. 뉴욕 최고의 호텔에서 대낮부터 버젓이 술을 팔 수야 있겠는가. 남자는 지금 범법을 부추기는 거나 다름없었다.

매들린이 남자의 동행에게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제발 저 놈팽이 좀 데리고 나가주세요.

그리고 그렇게 한참 대치하던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미지근한 물이 얼굴에 끼얹어졌다.

“아…!”

매들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식은 차의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찻물이 얼굴을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매들린이 가늘게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장내 일대 소란이 일어나자 모든 이목이 세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문가에서 수선거리는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매들린이 조심스레 고개를 돌린 곳에서는 지배인이 웬 키 큰 남자 옆에 서서 굽실굽실 쩔쩔매고 있는 게 보였다. 지배인이 중언부언했다.

“별일은 아닙니다. 아주 약간의 소란이…”

“흐음….”

아. 저 사람이 바로 그 특별한 손님인 것일까. 그러나 일단 눈앞의 일부터 수습해야 했다. 매들린은 서둘러 바닥에 굴러떨어진 찻잔을 주웠다. 미적지근한 얼그레이 찻물이 그녀의 앞치마를 물들였다.

다행히도 금세 제니와 다른 티레이디들이 와서 뒷수습을 같이 해주었다. 손님들이 밖을 나서는 동안 제니는 걸레를 가지고 와 식탁 주변을 훔쳤다.

지배인 옆에 선 남자는 한참 동안 매들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매들린은 그를 신경 쓸 일말의 겨를도 없었다. 게다가 안경을 쓰지 않아 그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홀츠먼은 눈앞의 여성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아니, 이런 낯선 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볼 줄이야. 매들린 로엔필드가 메이드옷을 입고 호텔 로비를 청소하고 있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수심 깊은 옆얼굴과 이따금 반짝이는 푸른 눈으로 기억되는 여자. 별장에서 뻔뻔한 낯을 하고 나타난 그녀를 두고 사람들 간에 말이 많았던 게 기억난다.

이안의 약혼을 걷어찬 주제에 뻔뻔하다며, 어딜 감히 기어오느냐며 분개하던 노팅엄 가문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러나 홀츠먼은 그녀가 싫지 않았다. 우선 그는 처연한 미녀를 좋아했다. 매들린 로엔필드에게는 북구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녀 때문에 쩔쩔매는 이안 노팅엄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지만 이안 노팅엄같이 자신만만한 이가 여자 앞에서는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한다는 게 재밌었다. 그 낙차가 어쩐지 흥미롭다고 해야 할까. 짜릿했다.

‘악취미겠지.’

악취미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

‘이안에게 알려줘야 하나.’

그는 순간 갈등했다.

이안 노팅엄이 여자를 못 잊어 속으로 점점 미쳐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위험하다. 결국엔 단 하나의 선택지뿐. 그는 전보를 날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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