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엔조의 초대
옷을 갈아입으며 무례한 손님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제니 쉴즈와는 나름 잡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매들린의 이야기를 들은 제니가 별안간 매들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매디, 그이들이 누군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누군데…?”
“그야, 할리우드에서 난다긴다하는 제작자 루스버거 부부잖아! 넌 오늘 아주 큰 기회를 놓친 거야. 명함은 받았어?”
“아. 어차피 나이가 너무 많다던걸.”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기야, 사회적 통념에 따르면 매들린은 이미 결혼을 하고도 남을 나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은 그녀였다. 나이고 뭐고, 웃어넘기는 수밖에.
“아니! 너무 아깝다구! 나이야 속이면 되지! 조앤 크로포드도 그 나이가 아니라는 소문이 있는데! ”
제니가 발을 동동구르며 난리 법석을 부렸다.
“다음에 다시 오면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잡으라고!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결기를 보이란 말이야.”
“됐어. 제니, 그곳에 갔다가는 벌이보다 씀씀이가 많아질 거야.”
* * *
매들린이 옷을 갈아입고 호텔 밖으로 나서자 대로변에서 마리아와 엔조가 차에 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빵빵.
뒤차가 경적을 울려대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차를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뒤늦게 놀란 매들린이 허겁지겁 좌석에 올라탔다.
“이 개자식아! 빨리 비키지 못해!”
뒤에서 운전사들이 욕설을 내지르자, 엔조가 차창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응수했다.
“죄송합니다!”
그가 시동을 걸자 차체가 부르르 떨렸다. 새로 산 차에는 독한 냄새가 났다. 가죽 시트는 부드러웠다. 마리아의 반짝이는 보석 목걸이와 엔조의 새 차는 라오네의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는 증거였다.
매들린이 타자마자 마리아가 터진 댐처럼 말을 쏟아부었다.
“아무튼 제이나 고모가 매들린을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해. 아주 학수고대하고 있지.”
“아, 진짜. 마리아,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 부담스럽게.”
엔조가 팍, 짜증을 냈다. 그의 귀 끝이 새빨갰다.
“아니, 뭐. 그게 어때서? 매들린, 명심해. 여긴 아주 대가족이라고. 바글바글 대가족! 할머니가 서열이 제일 높은 것만 알아둬.”
“마리아, 하늘에 맹세하건대 지금 입 안 다물면 택시 타고 가야 할 거야.”
“으이구. 사촌 누나에게 버릇없이.”
마리아가 운전하고 있는 엔조의 어깨를 세게 후려쳤다.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본 매들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엔조는 마리아와 대거리를 하면서도 후면 미러를 통해 흘깃흘깃 매들린이 웃는 양을 바라봤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아이고, 좋아 죽네.”
“마리아. 너나 곧 형부 될 사람 정식으로 소개해 줘. 베네치아 사투리 심하던데. 그래서 우리랑 말이나 통하겠나.”
“말 돌리지 마.”
그렇게 매들린을 제외한 둘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뉴욕의 소음을 압도했다. 라오네의 집인 3층짜리 벽돌 주택에 차를 대고 나서야 둘의 언쟁도 그쳤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따스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토마토소스에 구운 치즈 냄새. 절로 군침이 도는 맛있는 냄새에 셋의 얼굴이 환해졌다.
포치 안으로 들어간 엔조가 대문의 벨을 울렸다. 그러자 안에서 우당탕탕 왁자한 소리가 났다.
“왔다! 빨리 토미 세수시키지 않고 뭐해!”
“할머니, 아직 포카치아가 말랑말랑해요!”
“조니, 그거 꺼내지 마!”
이번엔 엔조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빨개졌다.
“…….”
제 가족이 안에서 부리고 있을 추태에 절로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부리부리한 눈썹에 강한 턱을 지닌 다부진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상냥하게 변하더니 매들린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붙들었다.
“매들린, 어서 와요!”
제이나 라오네. 엔조의 어머니. 오며 가며 몇 번 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데도, 그녀는 오랜 친구를 대하는 것 마냥 매들린을 대했다. 엔조가 말했었다, 주정뱅이 아버지가 사망하고 남은 가족들을 돌본 건 어머니였다고. 그런 생명력과 강인함이 눈빛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였다.
매들린이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검은 머리의 라오네가 형제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첫째 마테오, 둘째 조니, 셋째 엔조, 그리고 막내 토미. 아들만 넷인 대가족이었다.
그런 데다가 할머니와 사촌 누나들인 마리아와 페넬로페까지 포함해 바글바글한 곳이었다.
마테오와 조니가 다소 부리부리하고 투박한 인상이라면, 엔조는 작고한 아버지를 닮아 생김새에 우아한 데가 있었다. 그만큼 형제들에게 플레이보이라며 놀림을 당한다고도 했지. 지금도 마테오와 조니는 한시바삐 엔조를 놀리고 싶어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뜻한 환대와 고소한 음식 냄새에 매들린의 긴장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가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았다. 어린 토미에게는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며 자기소개를 했다.
사슴처럼 큰 눈을 가진 토미는 넋이 나가 있었다.
“누나는 영국인이에요?”
“응. 영국에서 왔어.”
“누나는 공주님 같네요.”
“하하.”
그런 토미를 바라보는 엔조의 얼굴에 약간의 장난기가 떠올랐다. 매들린이 그를 곁눈질하며 뭐라고 좀 해보라고 하려는 때였다. 멋쩍음을 모면할 훌륭한 핑계가 생겼다. 제이나가 모두를 불러모은 것이었다.
제이나가 서둘러 모두를 커다란 테이블로 불렀다. 건장한 사내들이 작달막한 여성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양이 신선했다.
실내는 무척이나 넓었다. 가구는 전부 새것이었고, 카펫이나 천은 전부 값비싸 보였다. 그러나 딸린 식구가 워낙 많은 데다가(심지어 사용인들까지), 갑자기 부유해진 집이 으레 그렇듯 정신 사나운 구석이 있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시끌벅적함과 생기가 기꺼웠다. 매들린이 자리에 앉고 모자를 벗자마자 질문이 쏟아졌다.
“여자 혼자 미국으로 온 게 사실입니까?”
“무섭지는 않았어요?”
“맥도먼드 씨가 잘해줘요?”
보다 못한 엔조가 그들을 제지했다.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벌써부터 호구조사들이야. 그만 좀 해.”
“오오… 엔조, 이 자식. 너도 드디어….”
“놈이 저러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형, 이거 뭘까.”
“아… 진짜.”
엔조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매들린에게 필사적으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소동을 중지시킨 건 니나 할머니였다. 그녀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정정하고 건강했다. 그녀가 푸짐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손님을 배고프게 놔둘 순 없잖니? 시작하자꾸나.”
성공한 사업가 집안답게, 라오네 집안도 사용인을 여럿 두고 있었다. 다들 이탈리아 북쪽 출신으로, 평상복에 앞치마를 두른 일상적인 차림새였다. 그들이 접시를 내오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버섯 소스로 맛을 낸 도미, 거대한 커스터드 푸딩, 전채로 먹을 포카치아, 라오네표 안심 스테이크까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먹음직한 요리들로 한 상이 부러지게 나왔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제이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부터 그녀는 계속해서 매들린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감사합니다. 이런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포크를 들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니나 할머니가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이쿠. 식전기도를 빼먹을 뻔했네.”
그러더니 라오네 가족이 일사불란하게 성호를 긋는 게 아니겠는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탈리아어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노팅엄 저택에서 식전기도 같은 걸 한 기억은 없다. 형식적으로나마 성공회 신자였던 선대 백작과 달리, 이안에게는 종교가 없었다. 전쟁 전에도 종교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우물쭈물 어쩔 줄 모르는 매들린의 손을 누군가가 살짝 잡았다 놓았다. 엔조 역시 성호경을 긋지 않은 채로, 매들린에게 눈으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 이제 먹자꾸나.”
식사가 시작되자 아까 전에 느꼈던 민망함은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다. 도미는 포크와 칼로 부드럽게 해체되었다. 흰 생선 살을 입에 집어넣으니 레몬과 향신료, 올리브의 맛이 절로 어우러져 감탄이 일어났다.
“어때요?”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부인.”
“아무렴, 내가 이 요리 솜씨로 남편을 쟁취한 거나 다름없지요.”
라오네 부인의 어깨가 절로 으쓱거렸다. 상대를 탐색하려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어 맛본 스테이크 역시 환상적이었다. 이렇게 질 좋은 고기라니. 역시 그들의 사업이 날로 번창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붉은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매들린의 입에도 잡내 하나 없이 입끝에서 살살 녹았다.
“대단하네.”
“내가 말했죠? 이번에는 엔조가 으쓱거릴 차례였다.
* * *
한참을 식사하던 때였다. 갑자기 주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어린 토미의 목소리였다. 소변이 마렵다며 자리를 비웠는데, 아이의 비명이 저편에서 들리자 제이나가 혼비백산했다. 모두가 뛰쳐들어간 자리에는 어린 토미가 상처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철철 나는 것이, 식칼을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를 찌른 모양이었다.
“…….”
모두가 의사를 부르느니 마느니, 누가 식칼을 거기에다 뒀느니 하고 있었을 때였다. 매들린이 침착하게 토미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자지러지듯이 울고 있는 토미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속삭였다.
“쉬…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녀가 아이의 손바닥 상처의 깊이를 살폈다. 깊지만 다행히 신경이 손상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피가 많이 나거나, 상처가 벌어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녀가 외쳤다.
“알코올이 필요해요. 아니, 와인 말고요.”
조니가 와인병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마테오가 대신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사이 매들린은 제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토미의 손바닥을 감았다. 붕대를 수도 없이 감아본 그녀로서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진하기 전까지 울어대던 아이도 이내 잠잠해졌다. 일체의 동요도 없는 매들린을 보고서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결국, 의사가 도착하고 나서야 모든 게 일단락되었다. 응급처치를 잘해서 다행인지, 상처가 얕지는 않다고 했다. 한바탕 일어난 엄청난 소요가 가라앉았으나 식탁 위 음식은 식은 지 오래였다.
이걸 어쩌나, 제이나가 당황하는 사이 매들린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스테이크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니나와 마리아가 마주 보며 은근하게 웃었다. 어느덧 식탁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