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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궁금하지도 않아 (55/121)

54화. 궁금하지도 않아

매들린이 시계를 놓고 침묵하자 엔조는 초조해진 나머지 미간을 찌푸렸다. 계속해서 물잔에 손이 갔다. 

매들린 로엔필드. 파산한 집안을 먹여 살리려고 미국으로 왔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이미 그녀가 몰락 귀족 출신이고, 사랑의 도피를 하다가 잘 안 풀린 거라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고 남았다. 동네 가십의 수준이란 게 거기서 거기였지만.

물론 엔조 라오네 주니어가 그런 뜬소문 따위를 새삼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제기랄. 솔직히 터놓고 말해, 눈앞의 여자한테 슬픈 사연이 없는 게 더 이상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비밀과 수심이 가득 어린 저 처연한 옆얼굴만 보면 세상 모든 금은보화를 다 가져다 놓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가 웃게 할 수 있다면.

매들린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결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원래 차던 시곗줄을 풀었다. 그리고는 엔조의 선물을 새로이 손목에 찼다. 

엔조의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오. 당신 손목에 딱 맞네요.” 

“고마워.”

시계를 쳐다보던 그녀가 몸을 돌려 손가방을 뒤졌다. 그녀가 작은 식탁 위에 상자를 올려뒀다. 

“네 선물에 비하면 내거는 너무… 약소해 보이는데. 네가 선수를 쳐버렸어.”

엔조가 재빨리 선물을 풀어봤다. 

넥타이와 커프스링. 나름 살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비싼 걸 고르기는 했지만, 지금 차고 있는 시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안이 준 시계 같은 수공예품은 아니었으나, 꽤 비싼 축에 드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매들린의 선물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약소하건 간에 엔조의 얼굴이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했다. 미소가 아주 숨김없이 만개했다. 

“와.”

그가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 남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감동인데요.”

너무 기뻐하니까, 오히려 매들린 쪽에서 좀 멋쩍은 감까지 있었다. 

“아냐. 네 덕분에 이곳에서… 살아남은 거야. 안 그랬으면 나는… 생각도 하기 싫네.”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채 차가운 뉴욕의 거리에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오싹한 일이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힘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맥도먼드 식료품점의 바닥을 쓸고, 하루에 열두 시간씩 물건을 정리했다. 부드러웠던 손이 거칠어졌고 몸은 메말라갔다.

생기 넘치던 소녀의 얼굴도 변했다. 그녀에겐 어느덧 ‘맥도먼드네 얼음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물론 별명의 당사자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다음번엔 우리집에서 식사해요. 여기보다 더 끝내주는 라오네의 스테이크를 선보일 준비가 되었으니까.”

“아무렴. 기대하지.”

그 초대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에, 매들린의 속이 복잡해졌다. 

귀족의 신분에서 낙오되었다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타인의 마음을 알아채는 눈치가 생기니까 말이다. 몸에 밴 우아함을 버리고 얻은 대가였다. 

* * *

수지에게 쓰는 편지는 네 장이나 됐다. 매달 교화소로 부치는 편지에는 답장이 아주 드물게 돌아왔다. 비뚤비뚤, 철자가 전부 틀린 편지에는 감옥 내 시시콜콜한 일상이 수두룩하게 적혀있었다. 새로운 수형자들은 전부 재수 없다, 네가 보고 싶다, 큰오빠는 여전히 수전노냐… 등등. 

이사벨에게도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디 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스페인의 후작부인이 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소문에 의하면 정신병원에 감금되어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매들린은 이안 노팅엄의 됨됨이를 믿었다. 

그가 제 동생에게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벨은 어딘가 안전한 곳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실낱같은 믿음을 부여잡은 채 놓지 않았다. 

* * *

알프스의 험준한 자연은 남자에게 위안이 되었다. 눈 앞에 펼쳐진 하얀 언덕과 구릉지. 서리 낀 안개. 제 발치에 조용히 앉아있는 사냥개까지. 낭만주의적 풍경. 

케이프가 덧대어진 코트를 입은 남자는 지팡이를 짚은 손에 힘을 주며 자세를 폈다. 그의 탁한 눈동자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향한 어떠한 경이나 감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로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그의 침묵을 방해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그레고리 홀츠먼이 서 있었다. 서글서글한 낯빛의 미국인. 아주 어린 시절부터 둘은 서로를 알아 왔다. 홀츠먼의 아버지인 조제프 홀츠먼은 노팅엄 가문의 재산관리인이었다. 

홀츠먼이 노팅엄 대신 달러를 벌어오면, 노팅엄은 그 달러를 런던의 은행에 넣고 관리했다. 

물론 그 지위가 영원할지는 미지수였다. 이안은 홀츠먼을 오래 봐왔으나 한 번도 그를 친구라 생각한 적 없었고 믿지도 않았다. 둘 사이의 관계는 철저히 사업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어쩌면 잔인한 처사였다. 이안, 에릭, 이사벨 그리고 그레고리. 그러나 그레고리는 노팅엄이 될 수 없었다. 아니,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이사벨이 마음만 열었더라면 그레고리 홀츠먼은 진작에 가족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사벨은 그를 증오했고 이안도 그를 가족으로 두는 건 사양이었다. 

“시가 한 대 피겠나?”

이안이 아무 말 없이 홀츠먼을 바라봤다. 주황기 없는 짙은 갈색 머리의 남자는 지난한 산행에도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남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상의 동행인 같았다. 

이안이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홀츠먼이 그에게 시가를 건네고 불을 붙여줬다. 두 남자는 정상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런 말은 웃기지만, 자네 몸이 좋아졌어. 이제는 나보다 건장한 것 같으이.”

“…….”

“여자는 만날 생각이 없나?”

“알프스 정상에서 여자 생각이나 하다니.” 

“영국 귀족 나으리께서도 외로움은 탈 거 아냐. 그야 여자는 남자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중 하나잖나.”

“나머지 하나는 궁금하지도 않군.”

설산 기슭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이안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 끝의 시가 연기를 내뿜었다. 고급 담배에서는 재와 향신료의 맛이 났다. 

“아직도 그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 카드 게임을 참 지지리도 못하던 여자 말이야.” 

“…….”

이안은 계속 지껄여보라는 듯 홀츠먼을 무심히 쳐다봤다. 그는 타인이 자신의 생각을 읽는 걸 혐오했다. 그걸 아는 홀츠먼이 씩 웃었다. 그가 한없이 가볍고 능글맞은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명심하게. 자네도 결혼 적령기는 한참 지났는걸. 뭐, 나도 안 하고 있지만, 경우가 다르잖나. 작위가 아까워.” 

경우가 다르다라. 하기사, 책임감 없이 이 애인 저 애인 골라잡는 홀츠먼이 결혼을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일 터였다. 

“작위 같은 건 내 대에서 끝나는 게 좋겠지.” 

“그러지 말고. 내 별장으로 가서 한바탕 놀지 않겠나. 내 누누이 말하지만, 자네는 좀 더 이완할 필요가 있단 말야. 작위니 사업이니, 잠시 제쳐두고 버번위스키를 마시면서 쉬잔 말일세.” 

이완이라. 홀츠먼이 미국에서 얼마나 난잡한 파티를 벌이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파티에 갔다가는 이완은커녕 정신만 사나울 게 뻔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린 눈으로 안개 낀 협곡을 바라볼 뿐이었다. 협곡에 쌓인 흰 눈은 타고 남은 담배의 끝자락 같았다. 

* * *

뉴욕에서 최고라는 팔레 드 루와얄 호텔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다. 물론 영국 사교계의 온갖 잡다한 규칙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프랑스 출신 지배인은 아침에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내 브리핑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은 모나코 왕족이 식사를 한다, 지금 스위트룸에 퍼시픽웨스트 철도회사의 창업자가 묵고 있다, 그의 동행인 숙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할 것, 구두가 윤이 나게 닦을 것, 몸이 불편한 노신사 부부를 각별히 신경 써라. 등등. 

매들린의 시력이 나쁜 것은 메이드로서는 오히려 장점이었다. 호텔에서 일하는 웨이터, 웨이트리스들, 침구를 갈아주고 시중을 드는 메이드들은 그림자와 같아야 했다. 유명한 이라고 아는 체를 해서는 안 됐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금기시되는 행동이었다. 

매들린도 그림자처럼, 무색무취한 인간처럼 손님들 사이에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어쩐지 순종적인 표정은 연기에 도움이 되었다. 

그날은 무언가가 달랐지만 말이다. 

매들린이 차를 내는 동안 두 남녀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터번 같은 것을 둘러쓴 중년 여성과, 파이프를 꼬나문 늙은 남자였다. 남자가 커피를 내오는 매들린에게 대뜸 물었다.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매들린 로엔필드라고 합니다.”

“흠.”

남녀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연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요. 자태도 곱고, 키도 적당하고, 너무 마른 게 아쉽지만, 살이야 찌우면 되니까요.”

여자의 직설적인 품평에 매들린이 당황했다. 한 달간 일해오면서 온갖 손님들을 다 겪어봤으나 저렇게 대놓고 무례한 이는 좀처럼 없었다. 

“죄송하지만…”

“론필드 양.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로엔필드를 론필드라고 부르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게 기분 나쁜 건 아니었으나 나이는 또 왜 물어보는 것인지.

“스물… 네 살, 입니다.”

잠깐의 정적 후, 여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너무 많아…아쉽게 됐네.”

노인이 안타까운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다였다면 차라리, 괜찮을 터였다. 다음날, 동료의 난리 법석에 매들린은 다시금 피로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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