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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엔조 (54/121)

53화. 엔조

“이제 그만하도록 하죠.”

“더 할 수 있소.”

“아니요. 여기서 끝을 내겠습니다.”

적막한 저택에는 짐승처럼 헐떡이는 남자의 숨소리만이 가득하다. 한쪽에는 초시계를 든 의사 한 명이, 다른 한쪽에는 수건을 든 세바스천이 서 있고 가운데에는 거대한 매트리스 위에 남자가 엎드려 있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다. 풀어헤쳐진 셔츠 옷깃 너머로 거대한 흉터가 보일락 말락 한다. 

“백작 각하. 기록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에 시작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은 버티셨어요.”

“…….”

만족할 수 없다. 맞춤형 재활은 사치재였으나 거기에는 다이아몬드 같은 반짝거림도, 질 좋은 시계만큼의 편의도 없었다. 오로지 끝없는 육체적 고통과 땀과, 괴로움만이 있었다. 이안의 강철 같이 벼려진 마음도 때로는 약하게 만들 만큼의 고통. 그러나 고통은 그가 언제나 바라는 바였다.

이안은 옆에서 사용인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고된 훈련의 끝은 또 다른 괴로움의 시작을 의미했다. 몸을 축내지 않는 한 계속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때 손님들로 가득했던, 또 환자들로 가득했던 홀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오로지 이안 노팅엄의 재활을 위해서 마련된 온갖 기구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일견 보기에는 고문 기구같이 보이는 그것은 사실 매우 값비싼 재활 도구였다. 

그렇다. 이안은 재활 중이었다. 독일과 미국에서 최고의 의사와 재활 전문가를 데려왔다. 재활을 하고 있지 않을 때면 일을 했다. 잘 정돈된 서재에서 각종 채권과 주식을 사고파는 결정을 내렸다. 대부분의 일은 가문의 재산 수탁자인 홀츠먼이 처리했으나 그는 최종결정권자로서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주식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었다. 이 미친 경주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상식 있는 자라면 당연히 미국 주식에 투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금방 꺼질 거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돈을 벌었고, 백화점에서는 신용을 마구 남발했다. 다들 그 돈으로 흥청망청 써댔다. 런던에서는 미국의 찰스턴 댄스가 유행했고 여자들의 치마는 갈수록 짧아졌으며 사람들은 도박장과 카바레에서 돈을 탕진해댔다. 이안으로서는 딱히 관심 가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어쩐지 젊은 세상에서 너무나도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한창인 나이인데도, 이미 세상을 살 만큼 산 노인이 된 것처럼 기진했다. 

그의 앙상한 몸에 근육이 붙고 활기가 돌면서 역설적으로 그런 기분은 더 심해졌다. 

거기에 더해 몸에서 활기가 돌아오자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욕구들이 그를 잔잔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곤란한 기분. 차마 그 누구에게도 토설할 수 없는 꿈의 내용들. 

여자의 부드러운 손. 하얗고 보들보들하면서도 섬세한 손가락의 결. 한숨, 비참함, 그리고 들끓는 욕망, 증오. 배신감. 

면회하는 내내 사슴처럼 바들바들 떨던 매들린 로엔필드. 

이안은 총구를 당겼다. 그녀를 용서하는 대신, 외면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대가였다. 여자는 사라졌고, 이안은 그녀를 가둘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끔찍할 정도로 안쓰럽군. 무참하게 역겹기도 하고.’

그는 땀에 젖은 몸을 뒤척였다. 의족을 끼우니 갸우뚱하던 몸이 금방 균형을 찾아갔다. 그리고 몸을 씻기 위해 곧장 운동실에서 일어났다. 

* * *

1년 뒤. 1921년. 뉴욕.

매들린은 거울을 바라본 채로 망설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분을 발라야 할지, 어떤 색의 립스틱을 발라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런 고민들 속에 이안 노팅엄도, 런던의 화려했던 사교계도, 전쟁도,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점점 사라져간다. 기억의 저편으로….

그녀는 큰 눈을 한번 깜빡였다. 

‘아. 정신 차려야 한다. 오늘은 호텔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날이니까.’

맥도먼드 씨의 이종사촌이 뉴욕 호텔 지배인의 운전사였다. 그런 인연의 인연이 연결되어 매들린은 최상층 로비의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다. 

“잘해야 하는데.”

이번엔 악센트가 그녀를 도왔다. 매들린의 얼굴과 억양을 본 호텔의 부지배인은 그녀의 ‘영락한 귀족’다운 악센트가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그녀의 응대를 받는 미국인들이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 무척 좋아할 거라며. 다만, 안경은 쓰지 말라는 당부는 잊지 않았다. 너무 학구적인 티가 나서 좋을 게 없다나. 

매들린으로서는 안경을 포기하고서라도 꼭 잡고 싶은 기회였다. 

식료품점에서 일한 시간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돈을 더 모으고 싶었다. 그동안 병원 일을 하며 모은 돈은 대부분 아버지에게 두고 왔으니, 잃어버린 세월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더 벌이가 좋은 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다. 

그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상처를 잊을 수는 없다. 그것들은 영영 낫지 않으리라. 저택과, 남자와, 자신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언제고 가슴 아파할 거란 건 분명했다. 역시 완전히 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계속 살아나가야 했다. 그녀도 인간이었으므로. 

매들린은 립스틱을 입술에 칠하기 시작했다. 

* * *

저녁이었다. 

백화점의 최상층 로비에는 사람들이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있었다. 원래는 밤에 술을 팔기도 했으나, 금주법이 시행되면서 저녁까지만 운영하게 된 공간이었다. 매들린은 저녁이 되기 전까지 차를 내리는 일을 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호텔을 돌아다니며 지리를 익히고 손님들의 얼굴을 익히느라 바빴다. 그래도 영국의 복잡한 사교계 에티켓에 비하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지상으로 내려온 그녀를 맞이한 것은 정장을 입은 엔조였다. 그는 호텔 정문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매들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중절모를 삐뚜름하게 쓰고 쓰리피스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꽤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었다. 

그럴싸했다. 아니,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늘 장난꾸러기에다가 친한 남자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던 그가 지금은 제법 남자답지 않은가. 

“엔조.”

매들린이 가까이 다가오자 엔조의 심각한 얼굴이 풀어졌다. 선 굵은 미청년은, 아직 앳된 기운이 완연했다. 매들린보다 두 살 정도가 어린 이였다. 

“매들린.”

“오늘 멋지게 입었네.”

“그야.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첫 출근이기도 하고… 또…”

엔조가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우물우물 얼버무리는 것이, 말하지 못할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뒤통수를 긁었다. 

“그래. 오늘은 비싼 곳에서 한 턱 낼게. 사실, 너에게 줄 선물도 있었어.”

미국에 와서 이모저모를 도와준 엔조와 마리아, 그리고 맥도먼드 씨에게 각각 선물을 나누어줄 참이었다. 

맥도먼드 씨에게는 모자를, 마리아에게는 구두를, 그리고 엔조에게는….

* * *

레스토랑에는 재즈 선율이 흘러나왔다. 곧 크리스마스였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니 노곤한 몸이 더욱 풀리는듯하여 매들린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프랑스 음식이라니. 거참.”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엔조는 적잖이 불편한듯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어색한 티를 냈다. 

“나도 성공했네요. 이런 레스토랑에 다 와보고. 영국 귀족이 된 것 같아요.”

“…….”

그 말에는 아이러니가 있었다. 매들린이 피식 웃었다. 

“영국 귀족이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 못 먹어. 거북이 등딱지를 먹겠지.”

“하기야.”

둘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음식이 들어가자 긴장했던 엔조도 제법 식당 안 분위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최근 가족 사업이 번창해서 그런지 엔조는 어린 나이에도 능수능란한 사업가의 느낌이 났다. 다만,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것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여전했다. 허례허식이 싫다고 했다.

“고기 부드럽고 맛있네. 어디서 받은 걸까.”

매들린이 혀끝으로 맛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에이. 아직 고기 맛을 모르시네. 뒷맛이 너무 비리잖아요.” 

엔조의 가족 사업이란, 동북부 일대에서 소고기를 떼다 파는 일이었다. 미국 내 육류 소비가 늘면서 최근 현금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이스트 사이드의 부촌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눈앞의 엔조에게서는 거들먹거리거나, 졸부라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비싼 옷을 두른 미청년임에도 수더분한 기색이 있었다. 

“그래도 그 이상으로 소스 맛이 좋네요. 매들린, 고마워요. 이거 내가 사야 하는 건데. 대신…”

엔조가 양복의 안주머니를 더듬더니 작은 가죽 상자를 꺼냈다. 

“음?”

매들린 역시 엔조를 위한 선물을 내어줄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선수를 뺏기고 말았다. 엔조가 가죽 상자를 매들린의 손안에 넣어줬다. 남자의 단단하고 거친 손과 매들린의 얇은 손가락이 스쳤다. 

“뭐야…?”

매들린이 지체 없이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시계가 있었다. 옅은 하늘색 가죽 스트랩으로 된 원형 시계였다. 

“지금 차고 있는 시계가 너무 낡아 보여서요.”

“미안하지만, 엔조. 이건 받을 수 없어.”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됐네요. 이미 사버렸는걸. 게다가 이걸 줄 사람이라고는 매들린밖에 없어서.”

“하….”

매들린이 한숨을 쉬었다. 거절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지금 차고 있는 것도 꽤 고급으로 보이긴 하지만, 모서리가 깨져있잖아요. 이걸로 바꿔요.”

엔조가 약간 입술을 삐죽였다. 남자에게 애교라는 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매들린은 제 왼 손목을 확인했다. 이안에게서 받은 손목시계. 옥살이를 하기 전에 맡겨두었건만, 얼마나 험하게 보관했는지, 모서리가 금이 간 채 돌아왔다. 돌려받고는 무척이나 서럽고 화가 났다. 그래도 그대로 계속 끼고 있었다. 

안경과 함께 진작 버렸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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