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새로운 시작
대서양은 광활하고도 험준했다. 배 위에서 몇 번의 구역질과 곡기를 끊은 위장의 요동이 있었는지 셀 수 없었다. 밤마다 갑판에서 술주정을 부리는 선원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승객들은 필사적으로 품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멋진 모습으로 새 나라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국 심사는 허드슨 강 하구에 있는 앨리스 섬에서 이루어졌다. 여권법이 통과되기 직전이었으니, 매들린은 무척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앞으로는 전과자가 해외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끊길지도 몰랐다. 쏟아져 들어오는 아일랜드, 중국 이민자들에 대한 볼멘 목소리도 높았으나 기업들은 여전히 철로와 마천루를 지을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에 앨리스 섬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긴 행렬을 따라 배에서 내리자 매들린은 눈앞의 풍광에 심장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꼈다. 광활한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다. 그녀 주위의 이민자들이 전부 하늘을 올려다봤을 정도였다. 그들의 얼굴은 희망과 경이로 반짝였다.
다른 공기, 다른 바람.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정말 다른 대륙이었다. 평생을 영국의 한 주에서 보냈던 그녀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도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단절을 의미했다. 영국의 우중충한 하늘과 다른 맑은 푸른 광경을 보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이제 정말 자유로워진 거야. 완전히.
네가 그토록 원했던 일이잖아. 남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 저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옛날의 일일랑 잊어버리는 것.
너무도 멀리 온 걸지도 몰라.
아냐. 들이마셔 봐. 네가 그렇게 염원하던 자유의 공기잖아.
아아…
그녀는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이민자들을 심사하는 그레이트홀로 걸어들어갔다.
* * *
신체검사를 받고 나서 긴 서류를 작성했다. 경찰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이민자들을 노려봤다. 결국, 절차를 다 통과하는 데만 해도 반나절이 족히 걸렸다. 짐을 돌려받고 나서야 모든 것이 끝이 났다는 실감이 났다.
엄청난 무리와 함께 앨리스 섬에서 벗어나 맨해튼에 도착하자 콘크리트와 철로 된 웅장한 마천루들이 시야를 나누었다. 그것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비석 같았다. 그 모든 부와 권세에 압도되어, 매들린을 포함한 이민자들은 잠시 주춤했다.
“…….”
정신을 차린 매들린이 품 안에서 꼬깃꼬깃 접힌 추천서를 폈다. 앨리스 섬에서 나누어준 뉴욕 지도가 그사이에 접혀 있었다. 브루클린. 브루클린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지도를 들여다보는 순간, 어떤 거센 힘이 그녀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매들린이 쓰러지자 웬 젊은 남자가 그녀의 품 안에 있는 가방을 그대로 들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픔도 잠시였다. 극심한 공포가 그녀를 뒤흔들었다.
“안 돼!”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지만, 소매치기는 군중 속으로 사라져 찾을 수 없었다. 매들린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필사적으로 도둑을 쫓았지만 무리였다.
“도둑이에요! 도둑!”
그녀가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를 누군가 들은 것일까, 앞에서 우당탕탕 흙먼지 나는 소요가 일었다. 사람들이 비켜서느라 웅성거렸고 매들린의 눈앞에는 멱살이 잡힌 채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는 소매치기가 보였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있었다.
“너 이 개자식아. 돈 없는 이민자의 돈을 털어? 굶어 죽으라는 거야!”
두껍고 약간 통통 튀는 이탈리아어 악센트. 소매치기의 멱살을 쥔 남자는 억센 몸을 가진 이였다.
결국, 소매치기로부터 가방을 빼앗아 들은 남자가 매들린에게로 척척 걸어왔다. 사냥꾼 모자를 쓰고 셔츠에 조끼를 입은 그는 가까이서 보니 무척이나 소년 태가 났다. 매들린보다 어릴 수도 있었다. 짙은 눈썹에 둥글고 예쁜 눈, 그을린 피부, 그리고 장난기 어린 소년다운 입매를 지녔다.
남자가 가방을 매들린에게로 들이밀었다.
“여기, 아가씨 가방이죠?”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들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자 남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친척이 왔다길래 마중 나왔는데 저런 거지발싸개, 아니 나쁜 놈이 있어서 마땅히 사람이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이탈리아인 맞아. 느물거리면서도 밉지 않은 말투였다. 매들린이 가방을 열어 감사비를 지불하려고 하자 남자가 화를 냈다.
“아가씨, 그러지 마세요! 저를 무슨 파렴치한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네요! 이런 일로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둘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뾰로통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처럼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 다부진 체격을 지닌 젊은 여성이었다.
“엔조, 아무리 도움이 필요한 분이 나타났다고 해도, 만리 타역에 온 사촌 누나를 이렇게 방치하는 법이 어디 있어? 네 어머니에게 일러야겠어.”
“아. 마리아. 거기 있었구나. 정말 미안해. 아니, 내가 사정이 있어서…!”
“걱정 마. 저기서 사람들과 함께 네 멋진 활약을 다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감사의 뜻인데 돈 몇 푼 받는 게 대수야?”
그녀가 은근히 눈짓하면서 남자에게 매들린의 돈을 받으라고 종용했다. 엔조의 얼굴이 붉게 익었다.
“아 됐어. 마리아, 여기서는 고향에서처럼 돈을 아낄 필요가 없다니까. 우리도 먹고 살 만하다고! 그나저나 아가씨, 아가씨의 이름이…?”
“매들린 로엔필드예요.”
“…론필드 …로엔필드 …멋진 이름이네요. 아, 제 이름은…”
“말썽꾸러기 엔조 라오네 2세예요.”
뚱한 얼굴의 마리아가 훅 치고 들어왔다.
“아, 마리아. 진짜 그만 좀….”
엔조가 진심으로 짜증 난다는 듯 짙은 눈썹을 구겼다. 그는 퉁명스러운 사촌을 대하랴, 매들린에게 환심을 사랴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었다.
둘이 대거리를 하는 것이, 꼭 만담꾼들의 공연 같았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야기를 할 때에 제스처가 컸다. 이사벨조차 소심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니 매들린은 즐거워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비집어져 나왔다.
“누나 때문에 우리가 웃음거리가 됐잖아.”
“무슨 소리야. 네가 멋진 남자인 척하는 게 꼴불견이어서 그렇지.”
“…됐고. 로엔필드 양, 가는 길이 어떻게 되나요? 이것도 인연인데 같은 방향이라면 동행하지요.”
매들린이 쪽지를 넘기자 엔조가 그것을 유심하게 지켜봤다. 그의 눈빛이 빛났다.
“이거 참, 우연의 일치네요. 우리가 가는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당연하지. 아일랜드인이나 이탈리아인들이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잖아. 맨해튼 같이 뻐기는 곳에서 살겠냐고.”
사촌 마리아가 중얼거렸다.
* * *
엔조가 택시를 잡았다. 마리아가 가지고 온 짐이 꽤 되어서 그런지 택시기사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엔조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압도된 듯 입을 꾹 다물고 운전만 했다. 덕분에 세 명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리아는 영어가 살짝 서툴렀지만, 말이 빠르고 재치가 있었다. 엔조는 영어를 완벽히 구사해서 그녀의 말을 재빨리 번역해주었다. 매들린은 최대한 거만하게 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입에 밴 악센트를 지울 순 없었다. 어찌 됐든 이탈리아인들은 그녀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인 아일랜드인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가씨가 가는 곳은 안전한 편이지만 언제나 조심해야 해요. 각 나라 사람들마다 구역이 있거든요. 중국인들이 사는 곳, 유대인들이 사는 곳, 이탈리아인들이 사는 곳이 있고 그 구역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각자 있어요.”
엔조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가령 제가 사업을 하고 싶어도 아일랜드 거리에서 함부로 못 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고 싶으면 꼭 그 거리의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죠.”
사람들…? 매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엔조가 에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도착하면 여기로 연락해요. 이건 우리 가게 전화번호고요.”
“오호. 우리 가게에 전화기가 있었어!”
마리아가 감탄했다.
“그래. 마리아. 내가 거짓말한 게 아니야. 우리는, 우리는…구멍가게 수준이 아니라고.”
그가 번호와 주소를 휘갈겨 쓴 쪽지를 다짜고짜 들이밀었다.
‘정말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구나….’
매들린은 쪽지를 받아 가방 안에 소중히 넣었다.
택시는 매들린을 먼저 내리고 떠났다. 엔조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밤거리에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 것,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지 말 것, 친척도 너무 믿지 말 것(이 대목에서 마리아가 어이없어했다), 등등.
“그리고 꼭, 나중에 전화 줘요.”
아일랜드인 거리에 홀로 남겨진 지금, 두 사람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점점 노을이 지고 있었고, 엔조가 말한 ‘위험한 밤’이 시작될 참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간신히 맥도먼드 식료품점을 찾을 수 있었다.
* * *
“뭐야. 그 애가 보냈다고?”
찰스 맥도먼드 씨는 수지 맥도먼드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편지를 받아든 남자의 얼굴은 의미심장했다.
“젠장. 수지의 글씨체가 맞구먼.”
그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매들린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오. 수지가 무사하다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아>가 연상되었다. 다른 점이라면 매들린 쪽이 탕아에 가깝다는 것이었지만.
수지가 작달만하다면 맥도먼드 씨의 키는 껑충했다. 근면 성실함이 체화된 사람이란 게 그의 거친 손바닥과 마른 볼에서 드러났다. 붉은 머리만 아니었더라면 수지의 오빠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터. 한참의 기도 끝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가 매들린을 보더니 혀를 찼다.
“마침 여급이 필요하긴 했는데… 참. 아가씨를 내가 모르니… 이거 참. 곤란하군. 게다가 자네는…”
자네는 여기서 일하기엔 너무 곱게 자란 티가 나. 그가 흐린 뒷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고생이라고는 모르는 채로 이안 노팅엄의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 인생을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한다 해도 그녀의 유약함은 사라지지 않을 지문처럼 유순한 얼굴에 남아있을 모양이었다.
매들린의 낙담한 표정을 본 찰스가 난감해했다. 그가 사환들을 시켜 식료품점의 문을 닫게 했다.
“아가씨, 일단 여사환들 숙소에 남는 방이 있으니, 그곳에서 잠을 푹 자. 내 여동생의 친구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지.”
사람들은 수지 맥도먼드더러 거짓말쟁이 사기꾼 여자라고 비난했으나, 그녀가 매들린에게 준 초대장에는 한 치의 거짓부렁도 없었다. 3층짜리 맥도먼드네 식료품점은 정말이지 번듯했으며, 찰스 맥도먼드도 인정머리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