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미국으로
매들린은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 도심으로 향했다. 누추한 여자의 행색을 두고 곁눈질할 사람 따위는 없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차림새였으니까. 품팔이하는 여자들, 공장 휴식시간 도중에 술 한잔 걸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였다.
매들린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역으로 향했다. 급작스러운 수감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가 보관해둔 얼마간의 돈과 생필품이 전부 허름한 가방에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버밍햄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내내 가방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 안에는 그녀의 돈뿐만 아니라 편지가 한 통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감옥 동기인 수지가 써준 것이었다.
* * *
수지.
구류소에서 만난 수다쟁이 아일랜드 여성의 이름은 수지 맥도먼드였다. 매들린은 교화소에서 그녀와 재회한 후에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사기죄로 3년형을 선고받은 수지는 매들린을 다시 보자마자 무슨 오래된 친구같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리고는, 그녀의 양손을 꼭 붙잡으며 자신이 그녀의 뒤를 봐주겠노라 을러대는 것이었다.
수지 맥도먼드에게 있어 매들린 로엔필드는 나름 낭만적인 연애담의 주인공이었다. 감옥 안에서 매들린과 제이크의 연애담이 이미 퍼질 대로 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들린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동정을 사는 편이 그나마 편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녀는 수지와 함께 다녔다. 둘은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다. 수지는 넉살이 좋은 데다가 매들린의 ‘귀족 아가씨적 성향’을 놀리면서도 참아줄 줄 알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매들린은 그곳에서 한 달도 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수지 맥도먼드는 아일랜드인이었고 칠 남매의 막내였다. 그녀는 수다쟁이였고 허풍쟁이였으며 타고난 사기꾼이었다. 송아지같이 순한 눈과 주근깨 어린 볼을 가진 발랄한 여성이었다. 모두가 그런 그녀의 순진해 보이는 외양에 속아넘어간 게 문제였다.
“그래봤자 나는 체스 말에 불과했다고. 그 개놈의 새끼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으면….”
수지에 따르면 그녀는 결국 간악한 사기꾼에게 당한 또 다른 피해자에 불과했다. 그러한 그녀의 ‘나는 무죄요’ 레퍼토리는 조금씩 바뀌었는데, 문제는 수지 본인조차도 일관성이 없다는 걸 인정한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수지는 칠 남매의 막내였고 손위 형제들은 전부 미국에 가 있었다. 첫째인 찰스는 뉴욕에서 꽤 건실하게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었고, 둘째는 보스턴에서 하역장 일을 해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감옥에서 언제고 미국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미국 서부 해안가의 할리우드와 동부의 마천루에 대해서. 그곳에는 가난한 사람도 잘만 노력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며 눈을 반짝였다. 매들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곳은 그만큼 부자도 거지가 될 확률이 크겠죠. 총을 든 불한당들도 많고요.”
“자기야. 자기와 나는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까 그런 걱정일랑 내려놔.”
매들린이 출소하기 이틀 전, 수지 맥도먼드는 사납게 갈겨쓴 편지 한 장을 매들린의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비록 반년 정도였지만 자기를 잊지 못할 거야. 필요할 것 같아서 주는 거니까 거절하지 마.”
그것은 소개장이자 편지였다. 첫째인 찰스 맥도먼드에게 매들린 로엔필드를 추천하는 내용의 편지는 반은 애원조로, 반은 협박조로 쓰여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혹시나 해서 써주는 거야. 자기, 어차피 이곳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잖아.”
매들린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애써 무시하며 수지가 편지를 더 깊숙이 매들린의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나는 사람 얼굴만 보면 알지. 이곳에 진력이 난 사람의 얼굴이거든.”
기회의 땅으로 가는 거야. 생각해봐.
수지에게 추천장을 건네받은 이후로 매들린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장이 죄는 듯 두근거렸다. 다가올 출소의 흥분은 결코 아니었다. 감히 고국을 떠날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반역을 저지르는 것처럼 두려웠다.
하지만 결국에는 영영 이 나라를 떠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인 생각인 걸까. 내가 정말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수지 맥도먼드 때문에 이러는 게 맞는 걸까.’
아니다. 수지를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낯선 밤 피를 흘리는 손님이 그녀의 세상을 뒤바꾸었다. 그리고 이안의 배반당한 표정이.
그녀는 계속해서 악몽을 꾸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총을 숨기지 못한 자신을, 재판정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출소 후 숙소에서 또 며칠을 고민했으나 결론은 같았다.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보다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 * *
매들린 로엔필드는 도시의 싸구려 호텔에서 머물며 며칠간 동분서주한 끝에 어렵사리 뉴욕행 배편을 구했다. 그녀는 축축하고 추운 방 안에 웅크려 잠을 청했다.
영국에서의 마지막 나날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흐린 날씨, 추적추적 내리는 비. 너무나도 영국적인 풍경의 나날들.
그러던 중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에메랄드 빛 초록색 눈을 가진 큰 검은 늑대가 매들린의 목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그녀는 무력하게 제압당했다. 선혈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입을 열어 말을 해보려 해도 목에 난 구멍으로 목소리가 자꾸 빠져나가는 통에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뻐금뻐금. 무시무시한 늑대의 더운 숨이 그녀의 입가에 스친다. 매들린은 제 위에 올라탄 늑대의 붉은 주둥이를 쓰다듬으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녀의 푸른 눈이 무언가 가냘프고 안타까운 것을 보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안녕.’
나의 가엾고 슬픈, 걸신들린 늑대.
* * *
-- 다시는 반짝이지 않을 거야
그 슬픈 과정은 다 끝났어
나는 보았어 차갑게 빛나던 태양의
마지막 빛이 사그라지는 것을
-에밀리 브론테 <상상력에게>에서 발췌,
선착장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저토록 많은 이들이 한 번에 대서양을 건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형선박을 처음 보는 매들린은 그 위엄과 장관에 몸을 떨었다. 저 철 덩어리가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데리고 물 위에 뜨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것들이 매들린의 이해와 무관하게 잘도 움직였다. 경이의 순간은 짧았다. 그녀는 서둘러 무리에 섞여 승선 길에 올랐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도 가방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달러로 환전해놓은 돈이 무사해야 했으니까.
입구에 도착할 무렵 숨통이 트인 그녀는 귓전을 울리는 배의 고동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사실은 검표원이 그녀를 재촉하는 통에 뇌리에서 사라졌다.
항해는 꼬박 일주일가량이 걸릴 예정이었다. 매들린이 들어선 여성 최하등 칸은 불결함의 극치였다. 더러움에는 이골이 난 그녀였으나 간호사로서 위생적인 결함은 참기 어려웠다.
그녀가 항해 동안 머물 객실은 6인실이었다. 말이 6인실이었지, 아이가 딸린 승객도 있어서 9명 정도가 작은 방에 구겨져 있는 셈이었다.
항해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토를 하기 위해 갑판으로 올라갔고, 내어주는 음식은 거칠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죽 같은 것에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데다가 비린 냄새가 났다. 온갖 우주의 악의를 담은 맛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식당에서 만난 아일랜드 남자가 이렇게 툴툴거릴 정도였다.
“영국 인간들은 아일랜드에서 먹을 거라곤 다 가져가면서 음식은 이렇게 맛대가리가 없으니. 이거 원….”
대꾸할 말이 없다.
아무튼 그런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먹으며 며칠을 버텨야 하니,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반 년의 옥살이로 인해 몸이 쇠약해져 매들린은 침대 위에서 몸을 말고 끙끙거렸다.
“저기, 아가씨. 아가씨.”
같은 칸에 탄 여자 승객 누군가가 기절하듯 몸을 말고 잠든 매들린을 흔들어 깨웠다.
“…음….”
매들린이 눈을 뜨자, 그 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승객들이 보였다. 다들 꾀죄죄한 몰골에 잔뜩 지친 얼굴들, 짐칸이나 다름없는 곳의 가장 싼 티켓을 산 사람들이었다.
“아가씨가 미동도 안 하고 계속 누워만 있어서 걱정돼서 그래.”
승객 중 두 아이의 엄마가 말했다.
“여기 송장 치울 일 생길까 봐 덜컥 겁이 났지 뭐야. 그런데 아가씨가 눈 감고 계속 누구 이름을 부르더라고.”
“아….”
매들린이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스코틀랜드 억양을 쓰는 여성이 그녀를 다시 눕혔다.
“곤란하면 이야기는 안 해도 좋아요. 그래도 우리는 나름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여기 앉아서 커피 마셔요.”
여자가 수통에 담긴 미지근한 커피를 매들린에게 들이밀었다.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이 세 명을 제외하면 매들린까지 해서 총 여섯 명의 승객들. 대부분 가난한 이들이었고 미국으로 가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왔는데 먹을거리가 없어서 미국으로 간다는 사람, 미국에 있는 사촌의 잡화점 일을 도우러 간다는 여성, 그리고 남편을 따라 연고도 없는 곳으로 간다는 여성까지. 매들린 역시 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친구의 추천서를 가지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간다며 얼버무리는 그녀의 말에 두 아이의 엄마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난 또… 애끓는 사랑의 도피를 하는 귀족 아가씨인 줄 알았지 뭐야.”
“에버렛 부인!”
“아니… 아가씨가 너무 곱고 처연해서. 괜히 몹쓸 상상력이 발동했어요. 미안.”
매들린은 속이 철렁, 뜨끔했으나 티를 내진 않았다.
이안 노팅엄. 그와의 인연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면서 완전히 결딴이 났다고 봐야 했다. 이제 어쩔 수 없어. 매들린은 커피를 홀짝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웃음은 곧 흐느낌이 되었다.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것을 전부 손에서 놓쳤다는 감각에 속이 허전해서 참을 수 없었다.
초점을 온통 놓친 사진에서처럼, 남자가 웃고 있는 모습이 뇌리에서 희뿌예졌다. 그녀는 그 사진에 계속해서 자신만의 회상을 덧칠했다. 그 통에 이안의 모습은 점점 사실과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가 아주 잠시 보여주던 소년 같은 미소는 그 물감의 더께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삶 속에서 또다시 유령이 되고 말았다.
당황한 에버렛 부인이 허겁지겁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부인은 연신 매들린의 등허리를 두드려줬다.
“괜찮아. 아가씨. 내가 또 괜한 소리를 했어. 괜찮아… 다 괜찮아….”
아가씨에게 상처를 입힌 일들도, 새로운 땅에서는 다 사라질 거야. 다정하지만 현실적인 말이었다.
그래. 결국에는 전부 사라질 것이다. 그도, 저택도, 지난 삶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