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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왜 그랬습니까 (51/121)

50화. 왜 그랬습니까

제이크 콤튼. 얼굴도 모르는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매들린을 수렁에 빠트려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는 고귀한 남자겠지. 그럴 거다. 이사벨처럼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훌륭한 사람. 그런 남자에게 매들린이 애정이 아닌 호감을 느꼈다고 해도 질시 때문에 목이 졸릴 것 같았다. 

질투는 언제나 이안 노팅엄의 추한 면이었다. 그는 제 친동생조차 질투로 미워했으니 어쩔 수 없다.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안은 환자들에게까지 질투했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온유한 손길과 배려를 느끼는 그들을 남몰래 질시하면서, 제 붕대를 갈아주길 원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신사라기보다는 구울에 가깝지 않은가 의심했다. 

이사벨. 에릭.

이안 노팅엄은 그들이야말로 노팅엄 가문에 걸맞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해맑았고 이사벨은 이지적이었다. 이안 노팅엄은 이지적이라기보다는 이해타산에 밝았고 해맑기보다는 음울하니 천박했다. 물론 그 천박한 기질이 가문을 부흥시키고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사실 회계사나 경제고문으로서 더 적합한 자질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이안 노팅엄은 막대한 부를 부패한 관료들과 정치인들에게 헌납했다. 애초에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귀찮게 느껴지진 않았다.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손쉬운 일이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를 위해서라면 더 큰 수치도 겪을 수 있었다. 

무엇을 바란 것일까. 

머리가 아팠다. 두통은 언제나 일상적이었다. 약해진 육신은 그의 정신을 같이 끌고 내려갔다. 

여자가 힘든 상황에 처한 것보다 그녀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거란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내 곁에서 괴로워해. 내 곁에서 슬퍼하고 울어. 나는 당신을 놔줄 생각이 없으니까.’

집무실은 고요했다. 너무나도 고요한 나머지, 이안은 자신이 지옥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지옥은 장소가 아니었다. 로엔필드의 부재가 그의 지옥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은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손바닥의 모래처럼, 이번에도 그녀는 남자에게서 빠져나갔으니까.

* * *

“왜 그랬어. 왜 그랬나.”

이안 노팅엄의 에메랄드 빛 눈은 어둠 속에선 짙은 고동색이었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이 올수록 흐려지는 인상.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 빛 없는 눈. 유령 같은 남자의 앙상하고 큰 손바닥이 매들린의 어깨를 쥐어챘다. 

앙상함과는 별개로 놀라울 정도로 강한 손아귀 힘이 매들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덩굴처럼, 사냥감을 옥죄는 올가미처럼. 

“그를 사랑해?” 

상처 입어 죽어가는 짐승처럼 울부짖는 것 같다. 남자는 그저 추궁을 하고 있을 뿐인데 어찌 그리 들리는지 모르겠다. 

매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가증스럽게 보일 거란 걸 알면서도 전처럼 똑같이. 그렇게, 독살스럽게. 

“…….”

그 순간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나. 사랑한다고 대답하면 뭐라도 달라질까.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에게 상처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더라면 이안은 용서했을 것이다. 고통스러울지언정 용서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결코 매들린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코. 결코.

그런데, 그래서 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수 없다. 남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길은 단 하나였다. 

입이 살짝 열린다. 그리고는 고운 입꼬리가 순식간에 독살스럽게 뒤틀린다. 꿈속에서는 얼굴 근육조차, 성대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녀가 해맑게, 동시에 악독하게 말한다.

“당신이 역겨워.”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그의 어깨가 들썩인다. 온 저택이 진동하고 전율한다. 

매들린이 그를 내버려 두고 뒤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한다. 이내 끝이 없는 복도를 내달린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죽어도, 내가 죽어도.”

“이 빌어먹을 흉가가 무너져내려도.”

“너는 이곳을 못 벗어날 거야.”

‘아악!!!’

매들린이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헌팅 트로피들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비웃는다. 

* * *

눈을 뜨자 어둠이었다. 매들린의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었다. 다행히도 자면서 소리를 지른 것 같진 않았다. 사람들이 자는 숨소리가 시계 초침처럼 규칙적으로 들렸다. 

“하… 하….” 

매들린이 색색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흉중이 열리면서 차가운 실내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H.B.여성교화소에 수감된 지 6개월. 오늘이 그녀의 출소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꾸는 악몽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한동안 지난 삶의 꿈은 꾸지 않았는데. 

과거의 꿈을 꿀 때면 매들린은 각본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처럼 꼼짝없이 이전의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꿈속에서 그녀는 여지없이 이안에게 상처받고 이안에게 상처 준다. 그 외의 선택지는 고를 수조차 없다. 

제 입으로 과거의 말을 반복하는 기분은 언제나 끔찍했다. 후회스러운 말들. 괴로운 말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발설해버린 말들이 있었다. 

* * *

매들린 로엔필드는 가방을 챙겼다. 6개월 전에도 이미 낡은 가방이었다. 진갈색 소가죽으로 된 가방에는 생필품 몇 가지와 노트가 있었다. 

수형소에서의 반 년은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짧았다. 누추하긴 했으나 감옥도 사람 사는 곳이라 죽으란 법은 없었다. 흉악범보다는 잡범을 잡아 교화시키는 곳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배운 것도 있었다. 재봉질, 식당에서 조리하는 법, 쥐를 잡는 법 등. 

가치 없는 배움은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배웠다. 귀족이 아닌 사람들과 말이다. 병원에서 동료들도 전부 귀족 아가씨는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잘 배운 집안의 여식이거나 최소한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감옥은 달랐다.

매들린의 악센트는 조롱거리였으며 그녀가 끼는 비싼 안경 역시 놀림거리였다. 게다가 온갖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공간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죄수들이 하나같이 매들린에게 적대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개중 몇몇은 동정과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기도 했다. 침대보를 기우는 방법을 모르는 매들린에게 손수 시범을 보여주기도 하고, 열이 올라 끙끙대는 그녀를 걱정하며 돌봐주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받은 상처로 인해 겉으로는 가시가 돋쳐있는 이들이었으나 그네들의 세상에도 의리와 인정은 있었다. 

결과적으로 매들린은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사실들을 배워갈 때마다 그녀는 자신 안에 무언가가 조금씩 덜어지는 걸 느꼈다. 공평한 교환이 으레 그렇듯이 그녀는 세상을 알게 된 만큼 노팅엄 저택을 잊어야 했다.

그녀는 기꺼이 망각을 선택했다. 

푹신한 침대의 감각을 잊고, 소탈한 동료들의 웃음을 잊고, 병든 환자의 파리한 안색을 잊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한 남자의 반쪽 얼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곳이 아닌 흉터만이 기억에 남았다. 

슬펐다. 흉터가 무섭거나 괴기해서가 아니라 어루만질 수 없어서. 가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면 아팠다. 

그렇게 아플 때면 매들린은 베개에 그녀의 한쪽 얼굴을 묻고 조용히 울었다. 뜨거운 눈물은 버석한 베개를 적셨다. 

그리고 석방을 앞둔 어느 날, 그녀는 남자의 불덩이 같은 품을 기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6개월은 짧은 시간인데, 단념과 절망, 수치심은 모든 행복한 기억들을 망각의 수렁으로 끌어내렸다. 게걸스럽게 삼켜버렸다. 

그녀는 덧없는 상념들을 몰아내기 위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재판을 받을 때만 해도 차가웠던 바람은 어느새 넉넉한 훈풍으로 바뀌어있었고 거짓말처럼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중이었다. 우산이 없는 매들린은 고스란히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누더기 같은 코트에 대충 땋아내린 머리카락, 낡은 가방을 든 그녀의 차림새는 영락없는 출소자의 모양새였다. 

푸석푸석해져 광채를 잃은 금발과 살이 내려 오목해진 뺨으로 미적지근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물기로 점점 무거워지는 옷의 무게를 느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본 곳에는 언덕 위 H.B 탬플턴 여성교화소가 그대로 있었다. 회반죽을 칠한 벽, 퀴퀴한 냄새, 그리고 왁자지껄한 여성들의 목소리로 기억될 곳.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곳의 여자들이 그리울 것이다. 그녀는 노팅엄 저택과 다른 방식으로 교화소를 기억하리란 걸 직감했다. 

매들린이 안경을 벗었다. 안경코가 살짝 휘어져 삐뚜름하게 쓸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렌즈에 묻은 물방울 때문에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안경을 도랑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계속 걸어갔다.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 * *

6개월 동안. 남자는 매들린에게 편지를 한 통도 쓰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불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매들린 역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그 편지 외에 더 쓰지 않았으니까. 

노팅엄과의 연은 이것으로 끝이라는 직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면회는 수감되자마자 단 한 번 있었다. 매들린은 교화소의 거친 옷을 입은 채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이안은 차분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회계사처럼 사무적이었다. 그가 한 말은 딱 한 마디였다. 

“왜 그랬습니까.”

아아…. 매들린은 입을 벌렸지만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빠져나왔다. 무저갱에 빠진 듯 끔찍한 상실감이 그녀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여자는 눈앞의 남자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중이었다. 매들린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가득 고인 시야가 흐려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를 실망시켰다. 남자가 애써 마련해준 각본에서 일탈했다. 배신이었다. 그를 모든 사람 앞에서 곤란하게 했다. 남자가 모욕감을 느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도 이안이 그것마저 이해할 의무는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멍청한 행동이었다. 알량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남자의 신의를 배신한 셈이었다.

이안의 얼음장 같은 표정이 아팠다. 더 괴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을지언정,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몇 번이고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둥근 눈초리는 거짓을 말하지 못했다. 이안은 그녀의 부드러운 손끝이 떨리는 걸 눈치챘을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모든 것이 그렇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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