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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안녕히 (50/121)

49화. 안녕히

“간단해요. 그가 당신을 협박했다고 진술하세요.”

변호사, 조지 콜하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

제이크는 어디까지나 제 총을 스스로 넘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안이 장관과 합의를 본 상황이에요. 그러니 그대로 진술하세요.”

“…….”

매들린의 핏기 없는 얼굴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어디까지나 당신은, 저택에 찾아온 부랑자에게 겁박을 당한 것뿐입니다. 그걸로 이야기가 됐어요.” 

“…….”

“총을 증거물로 제출할 일도 없어졌으니 걱정거리도 하나 덜었군요.”

“하지만 경감이 중요한 증거물이라고 했는데요.” 

“그 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증거물은 원래 그렇게 바뀌는 거예요.”

조지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이사벨과 당신을 수사망에서 제외하는 조건으로 이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그걸 봐서라도 일관된 진술을 해야 해요.” 

“…어떤 노력을 했는데요?” 

“당장 여기서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군요. 지금은 이 빌어먹을 시궁창에서 나가는 데에 집중합시다.”

“하지만요.”

매들린이 용기를 냈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이안의 막역한 친우가 아니라 맞춤형 정장을 입은 고관대작으로만 보였다. 낯설었다. 

“하지만 저는 협박 같은 건 당하지 않았는걸요.”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당신은 협박을 당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니잖아요.”

“매들린. 정말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제 증언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요.”

제이크. 그의 기존 혐의에 협박죄까지 추가되면. 중형을 선고당할 게 분명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매들린도 그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공산주의자라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젊은 친구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구호를 외쳐도 당장 잡아가지 않아요. 하지만 공장을 불태우고 왕실을 모독하는 건 죄가 될 수 있어요. 그 정도는 이해하지 않습니까.”

“…….”

매들린의 입이 꾹 다물렸다. 조지 콜하스는 상식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을 뿐인데도 거부감이 위장에 얹히는 듯했다. 

“그간 좌익 운동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의원들도 이번에는 몸을 사리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이사벨도 아마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아요. 이곳 사교계는 소문이 빠르게 도니까요. 특히 안 좋은 소문이라면 더 빨리요.”

“이사벨을 내쫓는 게 이안의 의지인가요.” 

“그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죠? 말했잖습니까. 이안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막대한 대가까지 치렀어요.” 

“…….”

할 말이 없었다. 

“이사벨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잖은가. 

* * *

1차 예심일 날, 재판정에는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사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연애담은 좋아했고 귀족 여성과 빈털터리 혁명가의 연애담에 반응했다. 물론, 그렇다고 매들린에게 상황이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은 여자 피고인에게 박하지.’ 

조지 콜하스는 생각했다. 

수많은 변론을 통해 다져진 감이었다. 하지만 동정심을 자극할 수는 있었다. 매들린 로엔필드의 수려한 외모, 커다란 푸른 눈은 상황을 반전시킬 촉매제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매들린을 이 난장에서 구해내야 했다. 이사벨의 건은 이안이 해결했으니, 매들린의 건은 조지가 매듭지어야 했다. 

물론 이안이 이미 판을 짜놨다. 이미 변호사도 배심원단들도 이안의 의도에 맞게 꾸려졌다. 정말 의외의 경우만 아니라면 매들린은 기소되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 몸이란 이야기였다. 

조지 콜하스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고는 클럽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텔레그래프지를 들고서.

* * *

경찰 측 사무 변호사는 누가 봐도 어색했다. 베테랑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증인석에 앉은 경감은 분통이 터졌다. 이미 이안 노팅엄이 전부 판을 깔아놨다. 배심원단도, 판사도, 옆의 동료도 그의 손길이 미쳤다. 

경감은 재빨리 바글바글한 청중을 훑어봤다. 그곳에 이안 노팅엄은 없었다. 하긴, 그가 있어봤자 의혹만 가중될 뿐일 터.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다. 

상부에서 매들린 로엔필드를 기소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것은 권유가 아니었다. 명령이었지.

그나마 대서특필된 기사가 아니었다면 매들린 로엔필드는 유유히 구류소 밖으로 걸어 나갔을 것이다. 이 예심이 이뤄진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재판 내내 매들린 로엔필드의 변호사는 능숙하게 판을 주도해나가고 있었다. 버벅거리는 경찰 쪽 사무 변호사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음…그러니까 매들린 양은 스토크온트렌트에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단 것이지요?”

변호사의 질문에 매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저 여자가 정말 몰랐나 봐. 무죄인 것 같아. 

“정숙.” 

판사가 판사봉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경찰 측 사무 변호사의 차례였다. 그가 주춤주춤 일어나 품 안의 쪽지를 찾기 시작했다. 

젠장. 저 얼간이 같은 놈을 끌어내리고 싶어 경감의 좀이 쑤셨다. 

“매… 매들린 로엔필드 양. 당신은 콤튼 씨와는 일체의 사적인 안면이 없었군요. 그런데… 그를 도왔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일단 콤튼 씨의 진술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일단’이라니. 맥아리가 하나도 없었다. 저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그런데 그를 도왔다면… 어째서지요? 협박에 의한 게 아니었다고 콤튼 씨가 진술한 건 알고 계시나요?”

“…….”

“콤튼 씨에 의하면 당신은 모든 걸 알고서도 ‘자발적으로’ 그를 도왔습니다. 일단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매들린의 변호사가 손을 들었다. 

“지금 유도 신문을 하고 있습니다.”

“기각합니다.”

판사가 말했다. 그가 로엔필드를 향해 말했다. 

“그 정도는 피고인이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매들린 로엔필드가 자신은 순전히 협박에 의해서 그를 숨겨줬다고 말하기만 하면 게임은 끝이었다. 경감은 다가오는 패배에 눈살을 찌푸렸다. 

‘애국자들보다 귀족 나부랭이들이 더 대우받는 사회라니. 최악이군…’

“그는 저를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매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까?”

“네. 저는 협박당하지 않았어요. 이전에 그를 몰랐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를 어디까지나 제 의지로 숨겨주었습니다. 그에게 음식을 주었고 간단한 치료를 해주었지요. 제 자유의지였습니다.” 

그 말을 하는 매들린은 오래 준비한 답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만요.”

매들린의 변호사가 나섰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엎질러진 물이라기보다는… 방화였다. 재판정은 아수라장이었다.

“노팅엄 저택… 사람들 몰래 제가 단독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폭력이나 협박은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에 동의해서입니까.”

“저는 간호사입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다’고 선서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약속을 어길 순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간호사의 신념… 좋습니다. 치료는 어쩔 수 없었다 치죠. 나중에 신고는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것은….”

매들린이 처음으로 주저했다. 재판정의 소요와 혼돈 속에서 그림처럼 그녀는 그렇게 홀로 있었다. 경감은 그녀의 차분한 얼굴에 경악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재판정의 소요는 격해졌다. 모든 혼란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초연했다. 

* * *

{ 이안. 미안해요.

구체적으로 당신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모르지만, 모든 점에서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뻔하지요. 하지만 저는 정말 몰랐어요.

미안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제이크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그가 높은 형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당신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 많은 힘이라니. 당신의 친구들은 모든 걸 막후에서 조종하는 것 같아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예전에는 아는 게 없어서 당신이 밉기만 했지요. 지금은 아주 조금 무서워요. 당신은 나약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강한 존재예요. 어쩌면 나는 당신의 약점에 불과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 역시 여전히 유효하고요. 

나는 어떠한 후회도 하지 않으니, 나를 위해서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는 없어요. 

추신 : 이사벨의 행복과 존엄을 지켜주세요. 그녀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염치 불고하고 마지막 부탁을 드려요. 

안녕히. }

* * *

-- 과거의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저택을 맴도는 유령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녀의 마음속 미래가 봄 새싹처럼 돋아났다. 


우리는 시간에 묶여있는 존재들. 사고방식과 생활, 흥얼거리는 노래까지도. 강 속의 물고기가 물을 인지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갇혀있는 몸이다. 

* * *

그 여자는 언제나 이안 노팅엄에게 상처를 줬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여린 살을 헤집어놓듯 그렇게 상처를 줬다. 

기쁨은 기쁨대로 줬으나 그것이 상처를 완전히 없던 걸로 하진 못한다. 그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그 부드러운 몸을 곁에 둘 때에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그조차도 여기 없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먼 곳에, 아마도 차갑고 더러울 진창에 있다.

이안 노팅엄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드문 감각이었다. 전쟁터 이후로 처음이었다. 판세의 주도권을 잃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언제나 불유쾌했다. 모든 것이 그의 설계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매들린이 결부된 일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 지독하게 더러운 참호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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