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덫에 걸린(2)
“아가씨.”
경찰 한 명이 떨떠름하게 매들린에게로 다가갔다. 묘하게 그녀를 어려워하는, 앳된 태가 나는 젊은이였다. 붉은 머리에,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쓰는 그의 이름은 콜이었다.
그가 쭈뼛쭈뼛 매들린이 수감되어 있는 쪽으로 바싹 다가갔다.
“…무슨 일이죠?”
또 진술을 받아낸다느니 하면서 취조실로 데려가는 것일까. 제이크의 입에서 재차 매들린의 이름이 나오자 처음의 정중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용의자 신분으로 전환되었고 그러자 주위의 모든 것이 매들린을 옭아매는 족쇄로 전락했다.
적어도 눈앞의 콜은 그녀를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대하는 축이었다. 매들린은 도대체 그가 왜 저렇게 정중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락한 귀족도 귀족이라는 건가. 아니면 명색이 ‘신사’처럼 ‘숙녀’를 배려해주는 건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경찰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를 신경 쓰기에 그녀는 너무도 지쳐있었다.
“저, 아가씨. 나오셔도 됩니다.”
아가씨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다시 취조실로 가라는 이야기죠?”
매들린이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더더욱 흩뜨리며 중얼거렸다. 이틀 사이에 수사관들이 어찌나 지긋지긋하게 그녀를 불러대는지,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판결 없이 사람을 구금해도 되는 건가?
‘괴로워. 이안이 보고 싶다. 그가 옆에 있다면 조금은 안심할 텐데.’
매들린은 스스로의 생각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약할 뿐만 아니라 경멸스러운 의존적인 생각이었다.
이안 노팅엄에게 기댄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없어야 했다. 고통을 의연하게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그녀는 상체를 곧추세웠다. 상대가 아무리 직급이 낮은 경찰이라 하더라도 저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매섭게 어린 남자에게 쏘아붙였다.
“제가 할 말은 다 한 것 같은데요? 취조실로 다시 보낼 바에야 차라리 고문을 하시지요. 그런 것 잘하시잖아요?”
매들린이 강경하게 나오자 콜이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쇠꼬챙이처럼 마른 어린 경찰이 휘청이며 손사래를 쳤다.
“그,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당신 상관이 날 얼마나 마녀사냥 하고 싶은지 잘 알겠는데요.”
“…변, 변호사가…!”
“……?”
그것은 예기치 못한 도움이었다.
오랜 친구를, 예기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 * *
변호사 접견이라니. 매들린은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부랴부랴 머리를 정돈했으나 여전히 엉망진창 흐트러져서 전혀 정돈되지 않았다. 간밤에 제대로 눈 붙이지도 못했다. 경찰들은 새벽에 그녀를 불러대서 윽박을 질러댄 것이었다.
머리통 안에 벌레가 있는 것 같았다. 그 벌레 때문일까. 매들린은 제 눈앞의 사람을 거의 못 알아볼 뻔했다. 비현실과 현실의 가장자리가 희미해졌다. 흐릿해졌다.
“…당신이 왜 여기….”
조지 콜하스였다. 갈색 머리를 매끈하게 넘기고 쓰리피스 슈트를 입은 남자였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매들린을 바라봤다.
“왜 놀라는 거예요? 제가 변호사란 걸 잊기라도 한 것처럼. 최연소 칙선변호사라는 직함은 괜히 다는 게 아니지요. 로엔필드 양.”
“…그래도. 저는 수임료를 낼 돈도 없고.”
“이쯤 되니 정말 속상하네요. 뭐.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피차 낯 가릴 이유 없어요. 내가 당신을 돕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흠흠. 조지의 살짝 느물거리는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가 고개를 숙여, 밖에서 안 들리게 속삭였다.
“이안의 친구인 당신이 걸려있는 문제인 만큼, 내가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없었지요.”
“…아.”
매들린의 혼란스러운 얼굴이 마침내 밝아졌다. 이안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마법처럼 작용했다. 혈색이 돌아온 매들린을 보며 변호사는 심히 착잡했다.
이안이 거의 반 협박조로 굴지 않았다면 굳이 맡지 않을 건이었지. 조지는 그 말은 굳이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눈앞의 매들린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안타깝다. 조지 콜하스는 눈앞의 여성을 진정으로 연민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과 엮였는지 정녕 모르는 눈치였다. 경찰과 언론이 사바나의 독수리 떼처럼 그녀를 산 채로 물어뜯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지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했다. 변호사의 기본 소양이었으니까. 그는 고객에게 감정적인 거리를 두는 데 익숙했다. 그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눈빛을 발동했다. 남자의 그 소년 같은 눈빛은 의뢰인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재판정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에 특효약이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죠. 일단 저들은 당신을 어떻게든 예심일까지 여기 붙잡아두려고 할 겁니다.”
“네? 기소되지도 않은 사람을 이렇게 붙잡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매들린의 새파란 입술이 달달 떨렸다.
“보통 예심판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면서 계속 구금해두는 전략을 사용할 거란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그네들이 방식이니까요.”
조지 콜하스는 매들린의 떨리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매들린. 나는 이안의 위임을 받고 왔어요. 당신을 구할 겁니다. 아니, 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안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 * *
조지는 승리를 확신했다. 왕실의 인정을 받은 칙선 변호사인 자신이 경찰이 선임한 사무 변호사 나부랭이쯤은 쉽게 짓밟아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무변호사는 제대로 된 변호사도 아니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 경찰들이 무리하게 매들린을 잡아두려는 통에, 절차적인 허점이 드러났다. 어설프게 발부된 영장, 무리한 구속 수사 등등. 그녀는 손쉽게 풀려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류소에서 <뉴스 오브 더 월드>를 받아든 그는 사태가 기묘하게 굴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 충격! 귀족 아가씨의 탈선? 노팅엄 저택 지하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반란 모의! }
짧은 기사였으나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삼류 성인 소설다운 필치로, 매들린과 제이크 콤튼의 연애까지 암시하고 있었다.
저택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귀족들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렸다느니, 암살을 모의한 정황도 있있었다느니 하는 순 엉터리에다가 망상으로 가득했다.
“젠장. 골 아프게 되었군.”
이안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 * *
“거 아가씨. 아가씨 이야기가 여기 실린 것 같으네.”
새로 배정된 구류소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다들 하나 같이 행색이 초라했다. 길거리를 떠돌던 넝마주이, 구걸하는 여인들, 매춘부들, 그리고 불법 이민자들이 정처 없이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물론 매들린 역시 그들과 비슷하게 초라한 안경잡이 여자일 뿐이었지만.
까치집이 지어진 산발을 한 채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여성, 지금 매들린에게 자꾸 말을 거는 주근깨 가득한 아일랜드인 여성, 그리고 삐쩍 마른 채 덜덜 떨고 있는 노파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무척 무해해 보이는 노파는 소매치기로 열댓 번 구치소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아가씨. 귀먹었어?”
아일랜드 여자가 매들린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매들린이 눈을 감고 못 들은 척하자 그녀가 중얼거렸다.
“하긴. 댁 사정도 딱하지. 매들린 로엔필드라. 거 고급지기도 한 이름이요. 귀족 아가씨가 맞나 보네.”
“…….”
매들린은 여자의 쓸데없는 농지거리에 어울려줄 여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괴로운 마음을 쓸데없이 헤집어놓는 그녀가 미웠다. 노팅엄 저택에서 당당하게 나왔지만, 그녀가 마주한 것은 차갑고 춥고 모멸적인 현실이었다.
이안이 가지 말라고 했을 때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이번에도 옳았다. 언제나 옳았다. 내가 뭐라고, 이 일을 홀로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굴었나.’
매들린 로엔필드는 여전히 이전의 생처럼 철없는 아가씨일 뿐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죄를 내가 뒤집어쓰는 것도 나쁘지 않아.’
진심과 자조가 반반 섞인 푸념이었다.
사실 매들린은 이사벨과 제이크가 추구하는 대의 같은 걸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사상적인 것에 있어서는 감정이 동하기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이건 잘못되었다. 사람을 고문하고, 신분의 고하에 따라 달리 대우를 하고.
그동안 그녀를 감싸왔던 안온한 껍질 같은 세계관에 차차 금이 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일랜드 여자는 계속해서 나불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굉장히 넉살 좋고 친근한 사람이라 여겼을 법한 이였다.
“귀족 출신이 여기까지 오는 건 드문데. 난 또 남편을 죽인 여자인가 싶었어. 보통 여기 오는 치들이 다 그렇거든. 저기 저 혼잣말하는 여편네 보이지? 살인죄로 교수형은 따놓은 당상이야. 그 전에 넋이 나가서 다행이랄까. 적어도 죽기 직전에 무섭지는 않을 거 아냐.”
“…조용히 해주시면 안 돼요?”
“조용히 해주시면 안 돼요, 라니. 닥치라고도 안 하는구만. 거참. 억양도 고급지네. 그런 말솜씨로 배심원들의 환심을 사긴 좋을 것 같으이.”
“…….”
매들린은 입을 다물었다. 계속 저 수다쟁이 여자를 상대해봤자 정신 사납기만 할 것 같았다.
“나야 생긴 게 영 못난 데다가 입이 걸어서 예심판사의 호감을 사긴 글렀구만.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아가씨 정도면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는 눈물 연기도 가능하니까.”
“눈물 연기 따위 하고 싶지 않아요.”
매들린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저 여자와 말을 섞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흘린 눈물로 치맛자락에 둥근 물 자국이 생겼다. 갈아입은 구류자용 옷은 칙칙하고 뻣뻣해서 눈 밑 살갗이 아팠다.
제이크가 너무 걱정이 됐다. 피 칠갑을 한 남자의 모습이 꿈속에 나왔다.
그의 이야기는 대서특필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주목을 끌긴 했다.
기사들의 논조는 하나 같이 파업으로 공장이 불탄 것보다 그들이 범한 신성모독에 대해서 더 집중하고 있었다.
감히 국왕과 국가를 모독했다는 게 문제의 요점이었다.
한차례 세계적인 대전쟁을 치른 후라 애국심은 들끓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은 동요했다. 하지만.
‘…….’
모르겠다. 매들린은 이해력의 한계를 느꼈다. 주어진 상황을 제대로 명석하게 꿰뚫어 보지 못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사벨도 이해할 수 없었고 경찰들과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체스의 폰이었다. 주어진 상황과 감정에 휩쓸려 곤경에 처해버렸다. 몇 번을 되살아나도 그녀는 그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너는 나약한 존재야. 예나 지금이나.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