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덫에 걸린(1)
경감은 그녀를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왔다. 깨끗하고 격식있는 회사 중역의 사무실 같은 곳이었다.
“취조실은 춥고 축축하니까요.”
“감사합니다.”
푹신한 의자에 앉았지만, 전혀 아늑하거나 편안하단 느낌은 없었다. 경감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저택에서 꽤 놀랐습니다. 의외로… 노팅엄 백작 각하와는 꽤 가까운 사이신가 보더군요.”
“…글쎄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세요.”
“미리 알려두겠습니다. 매들린 로엔필드 양. 방금 먼친 경위가 흥미로운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거기에 무어라 적혀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은걸요. 본론부터 말씀해주세요.”
피곤했으나 그 이상으로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매들린은 능구렁이 같은 경감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피부 밑이 가려웠다.
“레이디 이사벨 노팅엄과 함께 ‘병원’을 시작한 초기 멤버더군요.”
“그렇죠.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으니까. 저는 로엔필드 남작의 딸이에요. 사교계에서 몇 번 본 사이기도 했고요. 제가 재정적 곤경에 빠져있을 때, 저를 도와주려고 제안해온 것뿐이에요.”
“재정적 도움일 뿐일까요.”
경감이 한숨 죽인 뒤 말했다.
“이 일이 확전되는 걸 원치 않아요. 귀족 가문의 고명딸이자 치기 어린 이상주의자가 제 혈기 때문에 국가 전복 세력과 어울리는 사건이라. 호사가들이 들쑤시기에 딱 좋지요. 그전에 이 일을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는 바 아닐까요?”
“그래서 저를 지목하신 거군요. 귀족의 고명딸 대신에 몰락 귀족의 여식을 잡는 편이 나으니까….”
“오.”
경감이 흥미롭다는 듯 매들린을 쳐다봤다. 그가 매들린을 향해 고갯짓했다.
“로엔필드 양. 나를 너무 몰아세우는군요.”
그는 자신이 지극히 합리적인 근거에 의한 추론을 내리고 있는데 매들린이 너무하다는 식이었다.
* * *
그곳은 ‘방’이라고 불렸다. 경찰서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고 그곳에는 범죄자들, 경찰들, 관료들, 타이피스트들이 있었지만 ‘그 방’에는 누가 있는지 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정확히는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 그 방에 서려 있었다.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한다는 게 두 번째 규칙이었다.
방에는 언제나 쇠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내음이 났고 어두웠다.
경사가 든 작은 랜턴에서 나오는 것 말고는 빛 하나 없는 그곳에 경감과 매들린이 들어섰다. 매들린은 기세가 꺾여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저택의 지하실에 들어설 때보다 공포스러웠다.
“놀라지 마세요.”
경감은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매들린을 달랬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들어서서는 안 될 장소에서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방의 한가운데에, 피투성이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온 얼굴이 피 칠갑이라서 신원을 알기 어려웠다. 흰자위를 빼고는 전면이 붉었다. 그 모습을 본 매들린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턱 가장자리가 힘을 받아 뻐근했다.
“…로엔필드 양.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작자는 아주 위험한 인간이에요. 제압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을 뿐….”
“당신들, 당신들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저자는 반란을 획책하고 폐하 암살을 모의했습니다.”
“네?”
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그제야 알아봤다. 제이크.
그는 지하실의 남자였다. 숱 많은 검은 머리는 피와 기름으로 떡이 되어있었고, 홀쭉한 얼굴은 더더욱 메말라 있었다. 입술은 불어터져 있었고 이야기를 할 때 반짝이던 눈은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피 냄새에 질릴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몸서리가 쳐졌다.
“제이크. 면회인이 왔어. 고개를 들게나.”
“…….”
남자가 비척이며 고개를 들었다. 이채 없는 눈과 마주하자, 매들린은 그가 이미 속으로 꺾여있음을 직감했다.
“이 여자가 맞지? 자네를 숨겨준 위인.”
“…….”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고문해서 증언을 받아내려 한 건가요?”
매들린이 격렬하게 경감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양쪽에서 경찰들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고문이 아니라, 정당한 제압이었습니다. 저자는 흉기를 들고 있었어요. 총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죠. 그 총은 이미 제 동지에게 준 모양이지만?”
경감이 입 끝으로 쯧쯧 소리를 내며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가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더니 피투성이인 제이크의 입가에 물렸다.
“제이크. 똑바로 보게나. 자네가 말했잖아. 로엔필드 양이 은신을 도왔다고. 전보도 부쳐줬다지?”
“…….”
“사실 우리는 정말 오랫동안 추적을 했답니다. 맹랑한 학생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이지요.”
“…….”
“저자가 당신의 이름을 발설한 순간부터 진즉 끝난 일이었습니다. 로엔필드 양. 전 단지 기회를 한번 드리고 싶었어요.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진실을 밝혀,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기회 말입니다.”
“더럽혀진 명예라.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팬 당신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군요.”
“상황 파악을 못 하는군. 안 됐어.”
경감이 제이크가 물고 있는 담배를 다시 채갔다. 그가 그것을 제 입에 물며 슬며시 웃었다. 그가 처음 보여주는 미소였다.
“당신은 이미 갇힌 몸입니다.”
* * *
이안 노팅엄이 벌써 여자에게 칙선 변호사를 붙였다는 이야기에 청장은 진노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위세 좋은 노팅엄 가문의 딸을 재판에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윗선에서는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로엔필드? 그래봤자 오래전 파산한 귀족 나부랭이 이름에 불과했다. 그리고 요즘 같은 시기에 파산한 귀족이란 실업자보다 못한 천둥벌거숭이였다.
적어도 경감은 그리 판단했다.
이사벨 노팅엄이란 대어 대신에 피라미라도 낚아올렸다. 제이크 콤튼을 내란죄로, 매들린 로엔필드를 방조죄로 같이 엮으면 그림도 좋다.
몰락 귀족 출신의 여성이 집시 사회주의자와 사랑에 빠져 그의 범죄를 돕다. 지나치게 멜로드라마 같지만 나쁘지는 않다. 그림이 어느 정도는 된다는 거다.
이사벨 노팅엄과 그 잔당들은 이를 교훈 삼을 수도 있을 테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른 무리들도 스스로 몸가짐을 단속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감은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이안 노팅엄이 여자에게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부인가? 경감은 그런 이유라면 더더욱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찮은 애인 따위에 칙선 변호사라니.
지체 높은 가문이 그런 범죄에 엮였다는 것 자체가 추문이요, 불명예인데 말이다. 물론 그의 추락을 바라는 사람들은 이미 많았다.
백작은 부유한 만큼 친구도 많았고, 적들도 많았다. 미국인들과-심지어는 그곳의 유대인들과도!-손을 잡아 엄청난 부를 일궈내고 있는 노팅엄 가문에 대한 견제와 질시도 심했다.
전쟁 전 번성하던 세력들은 쇠퇴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노팅엄 가문과 그들의 미국인 친구들은 몹시나 성가신 존재들임이 분명했다.
일이 어떻게 되건 간에 경감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왕의 얼굴에 낙서를 한 풍자 포스터를 시내 이곳저곳에 붙여놓은 건은 세간의 분노를 일으켰다. 누군가는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스토크온트렌트에서의 파업. 그 일을 수습하는 데에도 또 다른 한 명분의 피가 더 필요할 것이었다.
한 사람은 부족했다.
그리고 산 제물을 바치는 데에 있어서는 언제나 하나보단 둘이 낫다.
* * *
매들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익숙했던 모든 것이 불가해했고 발을 딛고 선 땅조차 믿을 수 없었다.
저택과 병원만을 알던 그녀에게 거대한 사법행정체계는 미궁과도 같았다. 디킨즈의 소설에 나왔던 모습처럼. 그것은 탐욕스러운 포식자여서 한번 눈독 들인 표적은 좀처럼 놔주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전격으로 기소된 것이 아니었다. 예비심문을 거치고 나서야 기소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과 무관하게도 독방에 수감 중이었고, 그것이 부당한지를 따지기를 앞서서 무척이나 두려웠다.
제이크는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사벨과는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저택은 보지 않아도 풍비박산이 났을 게 뻔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경감이며 누구며 악을 쓰며 주장한다 해도 내란선동죄라는 거대한 혐의를 입증할 도리는 없었다.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고문을 통한 자백 하나와 방에서 찾은 총 한 정뿐이었다.
기껏해야 방조죄 정도겠지. 멋모르고 위험한 사람을 도와준 정도의 벌을 받을 것이다. 벌금? 집행유예?
그러나 차분하게 사고를 진전할 수가 없었다. 일단 지나치게 추웠다. 춥고 축축하고, 썩은 환부처럼 소름 끼치게 퀴퀴한 냄새가 그녀의 후각 신경을 마비시켰다. 한참을 오들오들 떨던 매들린은 떠는 것도 지친 나머지 몸에 힘을 풀고 구석에 앉아 웅크렸다.
예심이 언제 열리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녀는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녀가 그동안 믿어왔던 관념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제이크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 말이 맞지? 이 세상은 다른 사람의 피로 유지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