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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같이 가시죠 (47/121)

46화. 같이 가시죠

매들린과 경감은 응접실에 단둘이 마주 앉게 되었다. 경감이 한쪽 다리를 꼰 채로 손깍지를 꼈다. 

“우선, 너무 겁먹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건가요?”

매들린이 눈에 힘을 줬다. 주웠다고, 지하실에서 발견했다고 끝까지 잡아떼야 한다. 설득력이 있을지 없을지 따져볼 계제가 안 되었다. 당장 눈앞의 남자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게 중요했다.

“아니. 총에 대해서 당장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이 있지요.”

찰스턴은 유쾌했다.

‘뭔가 실마리를 잡았군. 그래서 나를 족치면 될 거라고 생각 중인 거야.’

“총의 소유주. J라는 사람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거라면, 그건 맞습니다.”

“…….”

“묵비권 행사는 아가씨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하실이 꽤 먼지 없이 깨끗하더군요? 거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모르겠네요. 부랑자들이 깃들어서 살다가 나가는 것까지 일개 간호사인 제가 어떻게 아나요? 총은 제가 근처에서 주운 거예요. 그 이상은 말씀드리고 싶어도 알지 못하니 어떻게 도와드릴 수 없네요.”

“이사벨 노팅엄 양과 가장 친하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고요?”

“노팅엄 양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인가요?”

“글쎄요. 무슨 짓을 한다기보다는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내란선동죄, 반란 모의를 도운 죄 등등으로 십수 년은 감옥에 썩힐 수 있겠지요.”

“…내란선동이라니….”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족속들과 한패잖습니까. 솔직히 터놓고 말하지요. 아가씨 역시 ‘그녀’에게 동조한 것은 아닙니까?”

“…….”

말할 수 없다. 무슨 말을 해도 눈앞의 남자가 설계해놓은 덫에 들어가는 꼴이니까.

“노팅엄 아가씨에게 보이는 충성심인지, 의리인지 모르겠군요. 입을 다물어봤자… 귀족들은 당신에게 덤터기를 씌울 뿐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위하는 척해도 그뿐입니다.”

경감이 혀를 찼다. 그가 진심으로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난 진심으로 아가씨를 가엾이 여기고 있어요. 이 거대한 가문은 당신을 이용하고도 남아요. 막내딸 대신 당신을 산 제물로 넘기고 입을 씻을 겁니다. 이사벨 노팅엄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경찰 된 본분을 다하고 싶어요. 범인을 잡고 정의를 실현하길 원할 뿐입니다.”

그가 한껏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귀족에 대한 해묵은 원한이 있는 건지,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인지.

긴장한 매들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젖혀졌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경감이 문 쪽을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응접실 안으로 들이닥친 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나서야 뒤늦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만. 

거대한 그림자. 베일에 싸인 귀족 가문의 수장. 이안 노팅엄. 

척척 방안으로 들어선 그가 경감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경감. 이곳은 취조실이 아니오.”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매들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요. 백작 각하. 취조실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방 아닙니까. 이곳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차를 마셨다지요. 확실히 지저분한 이야기를 할 장소는 아닙니다.”

경감이 너스레를 떨어봤으나 소용없었다.

“…알았으면 일어섰으면 하네.”

“그러지요. 그러지요, 각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중절모를 고쳐 썼다.

“하지만 로엔필드 아가씨는 저와 가야겠습니다.”

“이 저택의 주인은 나요. 저 여성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은 폐하지요. 이 땅도 그렇습니다. 저는 폐하의 명을 받았어요. 이미 위층에서 영장을 보셨을 텐데요.”

“수색영장이었지, 체포영장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경감이 싸늘하게 매들린을 돌아보더니 백작을 향해 공손한 척 말했다.

“약식 조사로 끝낼 예정이었습니다만, 이런 물건이 나왔습죠.”

그가 총 한 정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양의 방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매들린이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돼. 앉으시오.”

이안이 한 손을 들었다. 그가 천천히, 위엄있는 걸음으로 경감에게 붙었다. 목발을 짚어도 경감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였다. 그가 속삭였다.

“경감. 지금 신이 났군. 굉장히 기분 좋아 보여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야.”

그 말을 들은 찰스턴 경감의 한쪽 눈썹이 기묘하게 올라갔다. 그 역시 지지 않고 맞섰으나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를 못 하겠군요. 저는 최대한 백작 각하의 편의를 봐드리고 있습니다만.”

그 말에 숨겨진 함의를 단박에 읽어낼 수 있었다. 이사벨 노팅엄을 놔주는 대신 사용인 조무래기 한 명을 잡아간다는데, 왜 화를 내고 앉았냐는 뜻이었다.

“…흐음….”

경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무언의 이해가 그의 기민한 두뇌를 스친 모양이었다.

“백작 각하. 걱정 마시지요. 혐의를 벗는 순간 이분은 자유의 몸이 될 겁니다. 그동안 숙녀의 안위에는 그 어떤 위험도 없으리라 약조하지요.”

그가 품 안에서 종이 한 쪼가리를 내밀었다.

“제게로 바로 연락되는 전화번호입니다.”

백작이 그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의 차가운 눈이 선연하게 불타올랐다. 창백한 불꽃 같은 눈빛이 경감에게 꽂혔다.

“찰스턴 경감의 명성은 잘 알고 있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탁월한 수사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감사…”

“하지만 당신이 선 위치를 아시오. 출세욕이 그대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

음산한 이안의 읊조림에는 경멸과 적의가 가득했다. 마치 전생에서 대치하던 때가 떠올라 소름이 돋는 한편으로, 이상하게 의지가 되었다. 

이안이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그가 노골적으로 깔보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폐하니 왕실이니 다시는 나불거리지 마시오. 참으로 역겨우니까.” 

둘 사이에 엄혹한 냉기가 도사렸다.

경감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저는 사법 집행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불운하게도 숙녀의 방에서 총이 나온 것은 사실이니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더 파고들 수밖에 없단 걸 이해해주셔야 합니다.”

이안이 매들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첨예한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하고 있다. 매들린은 그런 이안의 시선을 회피했다. 차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안은 겉으로나마 완벽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협박에 의해서였거나, 우연히 습득한 것일 수도 있소.”

“그렇지요. 그것은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일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로엔필드 양은 용의자 신분도 아니에요. ‘참고인’일뿐입니다. 수사를 돕기 위함이지요.”

“…….”

“이사벨 노팅엄 양 주위에 맴도는 불온한 ‘학생’무리에 대해서는 백작 각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로엔필드 아가씨가 그 사람들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매들린, 가기 싫다고 말하시오.”

이안은 경감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가 매들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찌나 눈빛이 선연한지, 매들린은 시선만으로도 제 두개골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

“백작 각하.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

“가기 싫다고 말하면, 내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막을 테니까.”

“각하. 지금 방금의 말씀만으로도 공무집행방해입니다.”

둘 사이의 대치는 점점 극에 치닫고 있었다. 경찰들이 노팅엄 병원을 포위한 지금, 이건 위험했다. 

“마스터 노팅엄.”

매들린이 차분하게 미소지었다. 그녀가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로 자신을 부르자, 이안이 숨을 멈추었다. 

“…당당하게 조사를 받겠어요. 경감님 말씀이 맞아요.”

“매들린, 다시 생각해.”

이안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찬 서리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으나 다급함도 엿보였다. 그의 주먹 쥔 손이 통제되지 않는 분노로 떨리는 게 보였다. 

매들린은 그의 시선을, 그의 덜덜 떨리는 주먹을 외면했다. 이 이상 이안과 얽혀서는 좋을 게 없었다. 공무집행방해라는 무서운 단어까지 나왔다. 차라리 자신이 곤궁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안까지 엮이게 해선 안 되었다. 

그녀가 경감에게 시선을 보냈다.

“경감님. 같이 가시죠. 수사를 최대한 돕겠습니다.”

매들린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걸어 나갔다.

* * *

총구에 새겨진 일련번호는 경찰들이 추적하고 있는 총기들의 것과 일치했다. 러시아 적색군으로부터 흘러들어온 물건들이었다. 

매들린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공산당이 버젓이 공식 인가를 받아 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세상이었으나, 그렇다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곱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규모 파업을 획책하고 왕의 초상을 태운 범죄자를 도왔다는 건 무척이나 심각한 혐의였다.

차에 탄 매들린은 수갑을 차진 않았으나 그녀의 양옆에 무장한 경찰이 앉아있었다. 쇠 곤봉을 허리춤에 차고 제식총까지 있는 진짜 경찰 말이다.

사태가 심각했다. 매들린은 생각해야만 했다. 지혜를 짜내서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손끝에서 헝클어지는 실타래처럼, 머릿속의 생각이 꼬여만 갔다. 

이사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녀는 괜찮은 것일까. 아니, 사실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중요한 건 당장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사벨을 빼내면서, 동시에 자신도 걸리지 않게. 하지만 경감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매들린은 기꺼이 이사벨을 구할 터였다.

어디로 가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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