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징조도 없이
이사벨의 일로 병원 분위기는 심란함의 극치였다. 정신적 지주인 그녀가 흔들리자 모두 불안해했다. 그 와중에 존이 위독했다. 호흡기가 약해진 통에 약한 감기에도 맥을 못 추렸다. 매들린은 단단한 베개를 여러 개 구해 그의 허리 밑에 끼웠다.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차도를 살피는 데 열심이었다.
“…이런. 의사 선생님이고, 간호사 선생님이고 다들 수선이야….”
농담을 던지는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환자들은 이제 거동이 불편한 사람, 돌아갈 곳 없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얼마 없었다. 빈 병상이 주는 허전함이 있었다. 그 공허감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의료진들까지 느끼고 있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허무함이라고 해야 할까.
“존. 기운을 내요.”
“글쎄. 내 운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비집어져 나왔다. 남자의 명운이 다해가고 있는 게 너무나도 분명했다.
“존.”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린다.
“매들린. 지금의 삶은 덤 같은 것이었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전쟁터에서 죽는 게 맞았어요.”
“…….”
“그래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덤으로 얻은 시간 동안 되돌아볼 수 있었거든요. 나의 과거. 지난 세월들….”
“…기억나신 거예요?”
매들린이 서둘러 수첩을 가져오려고 몸을 일으키자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었다.
“매들린, 그럴 필요 없어요.”
“하지만 가족을 찾아야-.”
“변호사를 불러주시오. 그뿐이면 됩니다.”
유언장을 만들고 싶소.
* * *
“…….”
“침울해 보이는군.”
“…당신에게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뭔가 잘못된 건 분명하네요.”
매들린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목에 걸려있는 가느다란 손목시계는 어둠 속에서도 윤이 났다. 마찬가지로 남자의 손목에도 그녀가 준 시계가 보란 듯이 걸려있었다.
“…그 환자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그런 것도 있고….”
둘은 땅거미가 지는 중앙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는지라 꽃들의 싱그러움은 덜했다. 쓸쓸하고 축축한 영국의 가을 공기는 무겁게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매들린이 어깨를 떨었다.
“이사벨은…”
“그 이야기는 미안하지만, 어떤 질문이 되더라도 확답 못 하겠군.”
이안이 즉답했다. 단호했다.
“…….”
“당신을 신뢰하는 만큼,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있소. 가족의 일이니 이해해주면 좋겠어.”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이사벨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
침묵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남자와 매들린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가둬지지 않는 불타는 영혼이죠, 이사벨은.”
“그런 것 같군.”
이안이 입을 꾹 다물다가 갑자기 멈춰서, 매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살짝 상체를 기울이자 그림자가 여자의 몸을 덮었다.
“당신도 비슷한 과요.”
매들린을 바라보는 이안의 시선은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쩐지 아쉬워 보이기도 하고,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은근하고 모호한 눈동자.
“…이사벨에 비해서는 그래도 길들어진 새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대체로 사람들에게 지시받는 데 익숙하거든요.”
“…….”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제 두 발로 이 땅을 딛고 서고 싶어요. 이 세상 누군들 그렇지 않겠어요? 용기가 부족한 게 문제죠….”
민망한 나머지 괜스레 너스레를 떨게 된다. 그러나 남자는 진지했다.
“내 곁에…”
“네?”
매들린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둘은 서로를 가까이서 마주 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자줏빛이 된 땅거미가 잿빛 풍광 사이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 황혼 속에서 남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하는 건지 들리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속삭였다.
“내 곁에 있어도 날 수 있소. 내 곁에 있어도 자유로워질 수 있단 말이요.”
그 두어 마디 말을 내뱉고야 만 남자의 볼이 노을처럼 익었다. 그가 아무 말 하지 않은 척 서둘러 자리를 떴다. 매들린만 뒤에 남겨진 채였다.
어리둥절했다.
몇 초가 지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단전에서부터 열기가 올라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빨갛게 익혔다.
‘방금… 저이가 고백한 거야?’
설마, 정말 고백이냐고.
이미 마음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다. 청혼은 여차저차 흐지부지된 게 분명했고 그게 유감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둘은 격이 맞지 않는 상대였다. 엇갈린 마음이 아팠으나 이안을 위해서는 충분히 단념할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했던 고백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남자의 행복을 빌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가 다른 좋은 상대를 찾길 바랐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러면 안 되지. 당신이 이렇게 나를 흔들면… 나는….’
시곗줄이 둘린 손목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뭐야.’
조금 더 산책을 해서 열기를 식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열에 들떠 중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 * *
어쩌면 그녀는 괜한 고민을 한 건지도 모른다.
대답을 돌려줄 시간 따윈 없었다. 그다음 날 저택은 쑥대밭이 되었으니까. 불행은 언제나 징조도 경고도 없이 모두를 덮치는 법이었다.
대낮부터 저택으로 검은 차들이 도열해 들어섰다. 중절모를 쓴 건장한 체구의 중년 남성이, 경찰들을 양옆에 끼고 저택 대문 앞에 섰다. 세바스천과 사용인들이 막아서자 그가 능란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 일을 소란스럽게 하고 싶진 않군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환자들이 당황합니다.”
“고귀한 노팅엄 가문의 이미지에 먹칠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 이 말부터 했어야 했겠군.”
그가 한 손에는 배지를, 다른 한 손에는 서명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찰스턴 경감입니다. 런던 중앙경찰청에서 여기까지 달려왔지요.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수색영장은 보다시피 제 손에 들려있습니다.”
경감이 나타났다. 그것도 런던 중앙경찰청에서 온 경감이었다. 온 병원 사람들이 동요할 만했다. 간호사들은 경찰들을 곁눈질하느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경찰들은 소파나 의자에 아무 데나 앉아서 대접받은 차를 홀짝였다.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 안절부절못할 때 이안이 층계를 내려왔다. 그는 평소의 살짝 구부정한 자세가 아닌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낯선 침입자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마치 상처받은 우두머리 사자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살짝 압도가 됐는지, 경감이 중절모를 벗어 인사했다. 그가 초반의 허세는 접어둔 채 공손하게 응수했다.
“백작 각하.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일어난 일로 상의를 드리고자 왔습니다.”
이안이 살풋 웃었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좌중의 경찰들이 성가시다는 듯이 그가 고개를 기울여 경감을 안내했다.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하지 않도록 미리 전신을 부쳤으면 좋았을 겁니다. 올라오시죠.”
순간만큼은 어정쩡하게 선 에릭도, 이 모든 소요에서 비껴선 듯한 무심한 알링턴도 아닌, 이안 노팅엄이 진정한 저택의 주인으로 보였다.
그렇게 이안은 능숙하게 경감을 데리고 서재로 올라갔다. 병원 사람들은 그런 그의 태연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에 한결 안도한 것 같았다.
매들린만 덜덜 손이 떨렸다. 그것까지는 어떻게 통제할 수 없었다. 생리적인 반응이 이성을 압도했다.
‘이사벨을 잡으러 온 건가?’
정황은 매들린도 모르지만, 이사벨이 공산… 주의자들과 연관돼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 남자 제이크와… 재커리…. 어떡하지. 이사벨이 잡혀들어가면….
이안이 어련히 잘 해결해주기를 바랐지만, 이사벨이 벌인 일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매들린으로서는 모든 게 두려웠다.
매들린이 방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경감이 서재에서 빠져나와 경위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경찰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경찰 중 한 명이 휘슬을 불었다. 그가 우렁차게 경고했다.
“자. 여기 수색영장이 있습니다. 다들 제 자리에 계시오.”
매들린이 움직이자 경위가 그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거 아가씨. 이리로 내려오세요.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다들 가만히 있으십시오. 지금부터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갑니다.”
“남김없이 샅샅이 뒤져라. 단, 소란은 내지 말고. 체포영장이 발부된 건이야.”
경감이 외쳤다. 그가 팔을 커다랗게 휘저었다. 경찰견이 짖었다. 그렇게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병원의 베개 커버까지 뒤졌다. 까슬까슬한 린넨의 밑으로 뭐라도 나올 것처럼 치밀하고 세심하게.
매들린은 숨이 멎은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네트와 오츠 부인과 함께 응접실에서 오들오들 떠는 것밖에는. 무력했다. 자신의 무력함과 바보 같음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방에 있는 총이 떠올랐다. 낡은 서랍장에 열쇠로 잠가 놓은 물건. 저들이 숙녀의 방까지 뒤질 정도로 악독하게 굴까 싶었으나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가장 먼저 수색할 장소였다. 낡은 서랍장의 귀퉁이는 원래 뭐든 숨겨놓는 곳이니까.
그녀는 왼 손목을 쥐었다. 손목시계의 서늘함이, 경찰견의 헐떡임이, 응접실 공기 중으로 부유하는 먼지들이, 그리고 청결한 소독약의 냄새가 오감을 포화했다.
이사벨은 맨 위층에 감금돼 있었다. 경찰들이 그녀를 사냥하러 왔다면 벌써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들이 찾는 건 그러니까-. 지하실의 남자. 제이크.
벌컥.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경감이 매들린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그가 묵직한 금속성 물체를 그녀의 손등에 올려놓았다.
그 무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금장치를 풀 때의 선연한 감촉을, 손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이 물건이 아가씨의 눈에 익지 않습니까.”
강건하고 네모진 얼굴의 남성은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박한 뱃사람 같은 얼굴에 치밀한 수사관의 눈빛을 지닌 이였다.
저건 사냥개의 눈빛이야. 피해갈 수 없어.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거야.
매들린이 달달달 떨었다.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뇌를 울렸다.
총이었다. 무거운 총. 그녀가 숨긴 총이었다.
“아가씨. 이름이… 로엔필드 양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긴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상호 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또, 정의를 위해서 협조해주셔야겠군요.”
남자의 혓바닥은 투박한 외양과 다르게 능란했다. 그가 뱀 같이 속삭였다.
“다른 분들은 모두 나가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