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선물 교환식
남자가 피를 흘리며 나타난 지 나흘이 지난 밤이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 눈이 퀭한 매들린은 그날도 남자를 위한 식사와 옷을 가져다줬다. 묵묵히 음식을 먹던 남자가 갑자기 졸음에 빠져 고개를 끄덕이는 매들린에게 툭, 내뱉듯 제안해왔다.
“로엔필드 양.”
“…….”
“당신의 제안을 생각해봤습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나도 그대가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
“난 곧 엑시터로 떠날 겁니다. 그 전에 이 쪽지를 여기 적힌 주소로 보내줘요. 전보 보내는 법은 알지요?”
* * *
매들린은 꼬깃꼬깃 구겨진 쪽지 하나를 목숨줄처럼 쥐고 있었다. 전신 주소가 적혀 있는 쪽지는 조직의 연락처였다. 아마 이사벨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안에게선 어떤 다른 메시지도 없었다. 런던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이 사실을 노팅엄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의 무게를 생각했다. 총과 남자. 남자와 이안. 이안과 자신에 대해서.
{ A는 3일 뒤 엑시터로 갈 예정. }
남자의 부탁대로 우체국에서 짧은 전보를 보내는 데에도, 긴장이 되었다. 이를 악무느라 관자놀이가 시큰할 지경이었다. 마치 자신의 얼굴에 대놓고 ‘위험한 사람을 몰래 숨겨놓고 있음’이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굴 수 있었다. 귀족 여성으로서의 고된 사교계 훈련이 이런 곳에는 쓸모가 있었다.
시내에 나온 김에 매들린은 방한용 외투를 하나 샀다. 그리고 이안을 위해 손목시계 하나를 맞췄다. 회중시계는 이제 그에게 불편할 테니까, 이렇게 손목에 찰 수 있는 게 낫겠지. 그녀의 벌이를 생각하면 제법 큰 지출이었으나 부담스러운 정도는 아니었다.
둥근 평범한 원형 시계에 검은 양가죽으로 된 스트랩은 이안의 뼈대 굵은 손목에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 상상만으로도 근래 그녀를 짓누르던 근심이 조금은 잊혔다.
매들린의 부드러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편하게 쇼핑을 즐기기에는 심사가 너무 복잡했다.
이사벨은 정말 괜찮은 거겠지. 연인을 구하러 동분서주하고 있는 걸까.
미국이라거나, 러시아라거나. 그런 곳으로 도망친 건 아니겠지. 아니다. 이사벨이 자신의 입으로 곧 돌아오겠다 했으니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마음속에 뱀처럼 똬리를 튼 불안감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었다.
이사벨 노팅엄은 지난 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여자였다.
그녀가 어떤 일을 감행할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
시내에서 돌아오자마자 매들린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남자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상상에서 만들어낸 존재가 아닐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러나 그곳에 그는 없었다. 안경을 고쳐 쓰고 랜턴을 이리저리 휘둘러봐도 없었다. 매들린이 종종걸음을 뛰며 그가 있었던 자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정말 사라졌어. 환상처럼. 수증기처럼. 열에 들뜬 목소리로 자신에게 역사에 대해서 말하던 사람이.
짚더미를 정신없이 뒤지자 꾸러미가 있던 벽 귀퉁이에 작게 분필로 글귀가 쓰여있었다.
{ 그동안 고마웠소. 동지. }
“허….”
동지라니. 웃기지 말라고. 매들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인 일일지도 몰랐다. 무척이나 허탈해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안전하게 가든지, 말든지.”
저도 모르게 그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깐 사이에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 * *
다음날 전보의 답신이 도착했다.
{ 알겠다. I는 잘 있음. 곧 런던을 떠날 예정. }
놀란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는지 가슴께가 닳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이사벨이 무사하다. 곧 돌아온다 했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게 후련해진 건 아니었다. 지하실의 남자는 무사할지,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총을 계속 가지고 있는 건 괜찮은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만 계속되었다.
‘불길해.’
아무래도 총은 은밀한 장소에 버려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실탄은 이미 도랑에다 버렸지만, 총은 어디에다 잘못 두었다가는 도리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버리려면 아주 먼 곳에다가-적어도 강에다가-빠뜨려야 할 것 같았다.
* * *
전보는 사실이었다.
이사벨은 노팅엄 일가와 함께 돌아왔다. 백작부인은 피로한 얼굴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이사벨은 그보다 더 창백한 안색을 한 채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챙이 긴 모자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
가솔들은 이 소동과 수치에 대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이미 사교계나 런던에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노팅엄 일가의 여식이 남자 한 명 때문에 가출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차라리 그런 가십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 뒤에 얽혀있는 어마어마한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날 테니까.
이안은 가장 마지막에 차에서 내렸다. 그는 특별히 더 피로해 보이지는 않았다. 원체 평소 염세적인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중 나와 있는 매들린을 보더니 주춤했다. 목발을 손에 쥐고 삐걱거리면서 매들린에게 다가왔다.
그가 매들린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다른 감정들도 있었다. 눈가에 둘린 불그스름한 기운, 억지로 미소지으려는 듯 뒤틀린 입매, 그리고 규칙적으로 경련하는 한쪽 손.
“오랜만이에요.”
“그렇군… 정말 오랜만….”
남자가 고개를 돌려 기침했다. 그가 비틀거렸다. 남자에게 생겼던 용기와 안정감은 며칠 사이에 전부 연기처럼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 광경에 몹시도 불안해진 매들린이 선수를 쳤다.
“이안. 이사벨이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다행인지는 두고 봐야겠지. 그나저나….”
매들린이 미약한 죄책감으로 주저하는 바로 그때였다. 이안의 성마른 얼굴이 갑자기 풀어지며 그곳에 미약한 온기가 깃들었다. 그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누구보다 강건한 강철로 만들어진 복잡한 장미 같은 인상.
“매들린. 보고 싶었소.”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남자에게는 놀라우리만치 솔직한 발언이었다.
매들린의 심장이 낙하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남자가 며칠간의 고생으로 지친 건 분명했으나, 그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는 매들린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이안 노팅엄의 입꼬리가 완만하게 올라갔다. 무언가 지나치게 연약하며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사람처럼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꺼풀 속에서 명멸하는 초록색 눈빛을 받아, 매들린의 가슴께가 말랑말랑해진 것 같았다.
이안이 그의 거친 손끝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매들린의 손등을 쓸었다.
“정말… 보고 싶었소.”
“없는 동안 심심했어요. 이안.”
이안이 어찌나 솔직하게 구는지, 도리어 매들린 쪽이 민망함을 가시려 노력했다.
“거 참. 이상하군. 내가 그리 재밌는 사람은 아닌데…”
뒤늦게 이안이 말을 흐리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거대한 날개로 감싸듯 그녀를 인도했다.
“바깥이 추우니, 이만 안으로 들어갑시다.”
* * *
이사벨은 근신 처분을 받았다. 그녀는 저택 맨 위층에서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노팅엄 일가는 응접실을 걸어 잠그고 몇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벨의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위험한 무리들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을 것인가. 단순히 치정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이미 지나치게 사건이 커졌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응접실에서 나온 이안은 지쳐 보였다. 그러나 절망적인 기색은 없었다. 응접실 밖으로 나온 그는 곧장 매들린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손바닥 속으로 슬쩍 무언가를 건넸다.
손목시계였다.
초록색 가죽이 스트랩으로 달려있고 금색 타원형의 시계로 이루어져 있는 물건. 매들린이 산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우아했다.
금속성의 시계는 남자의 손바닥 온기로 뜨끈뜨끈했다. 매들린은 제 손에 들린 것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런던에서 그 사달을 겪으면서도 기어코 매들린에게 무언가를 사다 줄 생각을 한 게 대단했다. 게다가 그가 고른 물건이 하필이면 매들린이 산 것과 똑같은 손목시계란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쩐지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왠지 자신이 산 조악한 손목시계와 너무나도 비교가 돼 부끄러웠다.
“…이안. 이 와중에 제게 이런 값비싼 물건을 주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선물입니다. 일로 바쁜 와중에 일일이 시계를 확인하기 힘들 것 같아서.”
그가 서둘러 단서를 붙였다. 나름 실용적인 물건이니 사줬다는 식의 변명.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비싼 물건이었다!
슬몃슬몃 화롯불처럼 지펴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네요.”
그녀가 제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시계를 꺼냈다.
“저도 이안을 위해서 시계를 샀거든요.”
확실히 비교가 되었다.
매들린이 나름 사재를 털어 산 시계는 이안이 준비한 수공예품에 비하면 싸구려였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막상 두 선물이 차이가 나니 민망했다.
하지만 그런 민망스러움도 잠시였다.
“매들린. 정말 고맙소.”
예상치 못한 놀라움이었다. 남자가 달라졌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했다고 해야 할까. 그가 순순히 매들린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늘 특유의 방어기제로 호의를 거절해 버릇한 남자였다. 전쟁 전에도 약간 꼬인 구석이 있는 이였는데….
일주일 못 보는 사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걸까. 매들린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매들린이 얼떨떨해하는 와중에 이안은 그녀가 건넨 선물을 망설임 없이 가져갔다. 그 와중에 서로의 손끝이 다시 한번 스쳤다. 짜릿한 전기 스파크가 손끝을 간지럽히는듯했다.
“우…우리 방금… 시계 교환식이라도 한 건가요?”
“…그렇게 느꼈다면.”
그가 살풋 다시 웃었다. 강철로 이루어진 꽃이 차분하게 피어나는 모습. 남자가 웃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런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남자는 가고, 매들린은 홀로 남아 그가 선물한 시계를 두 손으로 한껏 모아 심장 가까이로 당겼다. 그녀는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옥죄기 전까지 한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