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지하실의 남자(2)
“결국, 당신은 진짜 전쟁을 몰라. 여기서 환자들을 돌보는 건 대단해. 인정하지. 하지만 당신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버림받는 사람들의 심정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나라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는지도.”
남자의 말은 매들린의 인생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형형한 눈을 마주 바라보며, 매들린은 무연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전의를 상실했다고 해야 할까. 그와 말다툼을 시작했다가는 승산이 없었다.
이사벨과 그녀의 친구들은 다 한 말솜씨 하는 모양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전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아무튼, 연락책을 알려달라고요.”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서로 좁혀지지 않는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남자의 거친 북부 말투와 매들린의 나긋나긋한 악센트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말해요.”
이사벨의 안위, 그리고 이안의 평안. 매들린에게는 지금 그 둘만이 중요했다. 나머지는 그리 깊이 관여할 주제가 못되었다. 아니,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가 어떤 대의를 추구하건 간에 그녀가 참견할 일도 아니었고.
그러니, 남자가 귀족과 이안을 비방하는 말을 한다고 해서 화나진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남자의 말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을 거라 봤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안은 끔찍한 사람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까지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들린에게 있어 이안 노팅엄은 외로움에 고여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많은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잔뜩 뒤틀려 깨진 렌즈 알처럼 그녀는 자신이 이성을 잃었음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래, 자신의 손이 닿을 때마다 사시나무 떨리듯 떠는 남자를 떠올리면 가슴께 깊은 곳에서 뜨거운 뱀의 혓바닥처럼 타오르는 충동이 있었다. 그 격정을 어찌 부정하랴.
눈앞의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을 깜빡이더니 입으로 쯧쯧 소리를 냈다.
“젠장. 여기 집주인 나으리에게 단단히 반하기라도 했나. 당신의 그 순진무구한 눈을 보니 내 마음이 약해지는군.”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내놔요. 연락처.”
“당신을 어떻게 믿고?”
“…말을 돌리시네요. 그렇담 지금 저는 당신을 믿어서 이렇게 도와주고 있나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일리가 있군.”
남자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철컥.
그때였다. 철컥, 하는 소리에 매들린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남자, 제이크가 총의 잠금장치를 거는 소리였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날 못 믿겠으면 이거라도 가져가. 하지만 연락처는 못 줘.”
그가 피스톨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발끝으로 툭, 차서 매들린 쪽으로 미끄러트려 보냈다.
매들린이 어두침침한 바닥을 더듬자 바로 앞에 차가운 총신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뱀을 만진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물건. 총. 이 발명품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매들린은 그것을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품 안으로 가져갔다.
“날 못 믿겠다고 하면서 총은 또 주는 건가요.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요.”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나는 날 도와준 사람을 쏴버리는 쓰레기는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지. 일종의 보증수표라고 해야 할까.”
“이런 걸 내게 떠넘기고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매들린이 총을 등 뒤로 숨겼다. 이 무시무시한 물건을 그냥 넘겨주는 남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마음대로 해. 버려도 괜찮아.”
“총인데 쉽게 버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눈앞의 남자는 제멋대로였다. 매들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누구 때문에 지금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지내는데! 이사벨의 행방도 안 알려준다고 하지. 총이나 주고 말이지. 고집을 부리는 남자에게 열불이 났다.
“게다가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는데요. 당신이 쓰레기건 아니건 뭐가 중요한가요.”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어. 자기소개가 늦었군. 내 이름은 제이크고 이사벨의 친구지.”
“장난하세요?”
남자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장난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갑자기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매들린이 무슨 바보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매들린의 분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 피에는 집시의 피가 흐르고, 우리 할머니는 주술사였어. 하지만 나는 용케도 런던에 있는 대학에 갔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어쩌란 말이에요. 당신의 과거 이야기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는데. 매들린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지금 사람이 하는 말이 말 같지도 않나.
남자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화난 건 알겠지만, 내 이야기 좀 들어봐달라고. 적어도 내가 왜 칼을 맞았는지 당신이 납득할 수 있게라도 말이야.”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덧 한 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시간을 잊은 지 오래였다.
매들린은 어느덧 남자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총을 빼앗기지 않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가끔은 허술해질 정도로 남자의 이야기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가 겪은 불의와 운동에 투신한 계기까지. 불공평한 세상에 맞서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매들린은 숨죽여 듣기만 했다. 자신의 두 번째 인생보다 훨씬 역동적인 삶이었다. 무대가 파리였다가, 런던이었다가, 더블린이었다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남자 역시 자신의 이야기에 어지간히 몰입한 것 같았다.
“이 사회에는 거대한 불의가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걸 못 본 척 잠자코 있단 말이죠. 우리는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을 뿐인 겁니다.”
어느덧 남자의 말투는 자못 공손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업가나 지주가 악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들이 악하지 않아도 체제가 악하다는 게 문제예요.”
그 악한 체제를 깨부수는 게 중요하고.
“…….”
그의 말투는 어느덧 퍽 누그러져 있었다.
다만, 매들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평생을 귀족 아가씨로 살아와서인지 그녀로서는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아주 먼 세계의 일처럼만 느껴졌을 뿐이었다.
이사벨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사벨은 매들린에게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게 그녀 나름의 배려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난 매들린이 남자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당신은 참전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말에 따르면 그 전쟁이라는 것도 부르주아 나라들 간의 다툼일 뿐일 텐데요.”
“…….”
“참전했습니다.”
“…….”
“저를 위선자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단 겁니다. 지금은 버밍햄이나 다른 남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조합을 조직하는 걸 돕고 있어요. 아일랜드 노동자들도, 스코틀랜드 노동자들도, 유대인들도, 흑인 동지들도 전부 살 만한 세상에서 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소박한 목표 아닙니까.”
“…….”
소박한 목표. 매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쁜 이야기가 아닐 뿐이랴. 매들린 자신의 사고보다 진취적이지 않은가. 사회를 뒤바꾸려는 것일 진데…, 그녀는 자신이 그 앞에서 퍽 고리타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다친다면…”
“하.”
“그렇잖아요.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저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죽…”
“이봐요. 로엔필드 양. 우리가 폭력을 쓰는 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랍니다. 누가 제일 그 폭력이란 걸 쓰는 줄 알아요? 노동쟁의를 하면 짐승을 잡듯이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그 잘나신 자본가 나리들이 그럽디다.”
“…….”
“루드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비단 미국뿐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여긴 더 심각하다고 봐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은 그렇게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
“뭐…, 딱히 당신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는 아니에요. 훈계처럼 들렸다면 정말 미안…하고요.”
남자가 별안간 풀 죽은 매들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우리 중에서 제일 배우고 똑똑한 건 이사벨인데 말이에요. 그녀라면 더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내가 좀 말주변이 없긴 해…요.”
“…글쎄요. 그런 것 치고는 길게도 이야기하시던데요.”
매들린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빈 광주리를 들었다.
“오늘의 천일야화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그나저나 닷새 뒤에는… 약속한 대로 정말 가셔야 해요. 이사벨도 돌아와야 하구요.”
그녀는 계단을 올라갔다.
* * *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신문지 더미를 뒤졌다. 남자가 말해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건을 짜 맞춰 가니 그럼직한 사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스토크온트렌트에서 공장 두 채가 전소되고, 국왕을 모욕하는 전단지가 뿌려졌으며 경찰관 한 명이 상해를 입었다. 주모자는 부상을 입고 도주 중. 당국은 현상금을 걸 예정.
매들린의 푸른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 사건의 내용이 담긴 신문지를 난로에 전부 태웠다.
지하실의 남자, 제이크는 그 사건의 주모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무척이나 과묵했던 첫인상과 달리 남자는 쾌활한 성격이었다. 매들린과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자 한결 이완되어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까지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럴 때 남자의 얼굴은 상처받은 야수라기보다는 커다란 개 같았다. 웃을 때를 보면 에릭과 동갑으로 보이는 만큼 앳된 상이었다.
매들린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단 건 알았다.
남자가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아는데도 갈등하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배령이 내려진 남자다.
확실히 올바른 시민이라면 그를 신고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이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알렸을 텐데.
번뇌와 불면이 그녀를 괴롭혔다. 한 편에는 알량한 정의감과 연민,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상식’이 있었다. 그 둘은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그녀를 시험에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