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지하실의 남자(1) (43/121)

42화. 지하실의 남자(1)

밤이 깊어졌다. 어둠이 지고, 환자들은 잠을 청한다. 오로지 몇 명만이 깨어있는 시간이었다. 

매들린은 조용히 먹을 것을 챙겼다. 돼지고기 조림 요리와 거친 식사 빵, 그리고 포도주 등을 광주리에 넣고 위에 헝겊을 덮었다. 당직 간호사를 피해 몰래 발걸음 소리를 숨기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늘 오가던 하인 층 창고 뒤에 자하실로 가는 층계참이 또 있었을 줄이야. 하긴, 이 저택에 몇십 년을 살아도 모든 통로를 알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만큼 넓고 복잡한 곳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전생에 악명이 자자했던 저택과 관련된 소문에는 다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저주받았다느니, 귀신들렸다느니 하는 소문 말이다. 

‘어쩌면 내가 새 삶을 얻게 된 것도 이 저택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녀가 광주리를 들고 지하실로 가자 그곳에는 랜턴을 한켠에 둔 채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누워있던 남자는 매들린의 발소리가 들리자 소스라치듯 상체를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총구. 그래. 총이었다. 매들린을 향해 총을 겨눈 남자의 턱 가에는 벌써 까슬까슬하게 수염이 올라와 있었다. 살짝 탄 피부였으나 어떤 혈통이라 특정짓기에는 애매했다. 곱슬기 있는 갈색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고 눈썹은 굵었다. 

꼬질꼬질한 누더기를 걸친 것 같은 행색과 사나운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꽤 호감형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게다. 물론 남자에게 좋은 감정을 품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부터가…. 

‘품 안에 총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어.’

마음 한쪽이 싸늘하다 못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안일했다. 그의 품 안을 먼저 살폈어야 했다. 매들린은 광주리를 바닥에 내려둔 채 두 손바닥을 보이며 들어 올렸다. 

“당신을 여기까지 애써 끌고 왔는데 총에 맞아 죽으면 억울할 것 같네요.”

물론 빈정거리는 건 잊지 않았다. 두려움보다는 분노가 올라왔다. 저 남자 때문에 이사벨과 자신이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데!

남자의 입매가 조심스럽게 일그러졌다. 그가 주저하며 물었다. 

“…당신. 이사벨의 친구인가.”

“이사벨의 친구긴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친구까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일단 총부터 내려놓으시죠?” 

“…….”

살이 빠져 푹 패인 남자의 볼이 민망함에 붉어졌다. 그가 총을 내리자 매들린이 광주리를 다시 집어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일주일이에요. 딱 일주일. 그 이후에 여길 떠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진심이었다.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그 말을 내뱉은 남자가 갑자기 윽, 소리를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매들린이 서둘러 그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간호사로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가 남자를 천천히 짚단에 눕힌 다음 품 안을 열었다. 

당황한 듯 옷으로 살갗을 가리려는 남자의 손을 야무지게 쳐냈다. 

“방해하지 마세요.”

그녀가 지체 없이 치밀한 눈빛으로 환부를 살폈다. 흉기로 찔린 자상이 벌어져 있었다. 그날 이사벨이 진작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과다 출혈로 저승에 가고도 남았다. 그녀는 광주리에서 새 붕대를 꺼냈다. 

붕대를 교체하는 손놀림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서, 남자는 그대로 넋 나간 듯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간…간호사인가….”

“아니라면 또 어쩌실 건데요. 그렇다면 또 어쩔 것이고.”

그녀가 무뚝뚝하게 응수하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붕대를 다 갈아준 매들린이 광주리에 덮인 헝겊을 거두었다. 그녀가 팔꿈치로 남자에게 음식을 들이밀었다. 

“먹어요.”

“…왜 나를 돕는 거지?”

남자의 눈에 잔뜩 서린 경계심이 마치 덜 길들어진 맹수 같았다. 허기질 텐데도 저렇게 의심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쫓기는 사람이다. 매들린은 확신했다. 

“딱히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사벨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예요.” 

매들린에게는 이사벨 노팅엄을 지켜내야 할 책무가 있었다. 이사벨이 그녀를 병원으로 불러준 덕분에 매들린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매들린이 개입해서 이사벨은 죽지 않고 이 현실 속에서 살아있다. 그러니, 매들린은 끝까지 그녀를 책임져야 할 나름의 의무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전부 낯선 남자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매들린은 그를 빠른 손길로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돌아선 그녀를 뒤에서 남자가 불렀다. 

“이름이 뭐지.”

“…알아서 좋을 게 있나요?”

“제발….”

어쩐지 갈급한 목소리. 다급하고 혈기 넘치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목소리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봤다. 

“매들린 로엔필드.”

“…매들린… 내 이름은 제이크요.”

제이크.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아는 게 독이었다. 매들린은 착잡한 심정으로 뇌까렸다. 

“일주일이에요. 그 뒤에는 꼭 여기서 나가야 해요.”

* * *

낯선 사람이 지하에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평소처럼 구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사벨의 가출으로 인해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매들린 역시 바보처럼 지하실의 남자를 돕기만 할 요량은 아니었다. 이사벨과의 약속은 약속이었지만, 그가 돌변해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한마디로 그를 믿을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총을 생각하면 불안스러운 생각이 그녀의 척수를 타고 슬금슬금 타올라 왔다. 

어떻게 상황을 모면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극도로 위험하지 않았는가. 까딱하면 저택의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될 뻔했다. 

“매들린, 매들린.”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를 동료인 아네트가 불러세웠다. 

“무슨 일… 있어요?”

매들린이 화들짝 놀라자 아네트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팅엄 경이 전보를 보냈어요.”

“…….”

이사벨이 사라진 지 이틀째였다. 아네트가 매들린의 품 안으로 작은 쪽지를 집어넣었다. 

아네트가 복도의 저편으로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접힌 쪽지를 폈다. 그 안에는 단신이 적혀 있었다. 

{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 것. 당신의 I가. }

“…….”

동생을 찾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부러 전보를 보내다니. 게다가… ‘당신의 I’라는 표현이 가슴에 뜨겁게 스며들었다. 매들린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쪽지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

역시 이사벨을 말렸어야 했다. 그러나 매들린은 이사벨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녀를 말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곧은 나뭇가지를 꺾을지언정 휘게 할 수는 없듯이. 

결국, 답은 하나였다. 지하실의 남자를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서 알아낼 건 알아내야 했다. 그녀는 밤에 몰래 가져갈 메뉴를 고민하는 한편으로, 다시금 다짐했다. 

* * *

그날 밤, 매들린은 조심스럽게 층계를 내려갔다. 돌계단이라 삐걱이는 소리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녀가 광주리를 이고 오자 기척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등 아래로 남자가 웅크린 늑대인간처럼 매들린에게 기어오려 하고 있었다. 매들린이 작게 으르렁거렸다. 

“멈춰요.”

남자가 멈췄다. 매들린이 광주리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발로 그것을 밀었다. 

“드세요.”

남자는 잠시 주저했다. 이내 광주리 위의 천을 걷어내고 허겁지겁 빵과 치즈를 먹는 남자를 보며 매들린이 심호흡했다.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피차일반이야.”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이 장난으로… 들리나.”

남자가 음식을 우걱이며 위협조로 중얼거렸다. 우물거리는 모습 때문인지 위협은 실패했다. 그녀는 남자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 절박함이 앞섰다. 

“이사벨, 어디 있어요.”

“…그걸 나도 알면 좋겠군.”

남자는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전반적인 낙담한 분위기가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들끼리 소통하는 수단이 있을 거 아녜요.”

“…….”

그 말에 남자가 짐승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매들린을 노려봤다. 매들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안경알이 랜턴의 불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난 당신이 두렵지 않아.”

두렵지 않아. 정말로 두렵지 않아. 속으로 혼잣말을 되뇌고 되뇌며 매들린이 한 발자국씩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두렵지 않다는 혼잣말과 달리 손에는 어찌나 땀이 나는지 한 손에 든 랜턴을 떨굴 지경이었다. 

몸을 숙이고 남자를 향해 위협적인 눈빛을 보냈다. 마치 맹수와 대적하는 조련사처럼. 얼마나 같잖아 보일지는 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 역시 경계하는 짐승 같은 눈빛을 쏘아댔다. 그렇게 한참의 대치 상태가 흘렀다. 일각이 여삼추라, 무슨 세 시간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풉.”

느닷없이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어떻게 들어도 비웃는 소리였다. 

그리고 남자는 나자빠져 폭소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웃어대는지 나중에는 복부의 상처가 벌어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이 와중에 매들린은 그런 걸 걱정했다).

“… 뭐야….”

장난하는 건가. 자신이 장난하는 걸로 보이는 건가. 

“…내가 하는 말이 우스워요?”

“…딱 봐도 샌님 귀족 아가씨처럼 보이는데,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나?”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역력했다. 

‘죽어본 적은 있는데….’

매들린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동안, 남자가 계속해서 빈정거렸다. 

“간호사 양반. 먹을 걸 주는 건 고맙지만 연락책을 밝히느니 차라리 죽겠어. 목숨보다 소중한 거라고.”

“당신만 지킬 게 있는 건 아니에요. 내게도 목숨보다 소중한 건 있어요.” 

매들린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당신 때문에 이 집안사람들이 곤란에 처하면… 가만 안 둘 거예요.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죠.” 

“…이 집안이 당신에게 퍽 중한 것 같군요. 귀족 아가씨.”

남자가 혼자 뇌까렸다. 

“그렇다 해도 그들은 뱀 같은 인간들이요.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뭔 짓을 해도 이용당하다 버려질 뿐이라고.”

“…….”

“귀족을 믿지 마요. 아무도, 아무도 믿지 말라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