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비밀 (42/121)

41화. 비밀

바르르 몸을 비트는 이사벨을 침대에 억지로 앉혔다. 그녀의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무슨 일-.”

“매들린. 당신밖에 없어요. 도와줘요. 제발…”

이사벨이 비틀거리는 몸으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매들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매들린을 이끌었다. 

“…한 번만요….”

도와달라는 이사벨의 청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그녀는 파산한 매들린에게 구조의 손길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우기도 했다. 

일단 사태의 급박함을 눈치챈 매들린이 묻지도 않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둘은 몰래 저택의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구간 옆의 헛간으로 향했다. 이사벨의 한 손에 들린 램프가 불안스럽게 흔들렸다. 자욱한 안개 덕분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기억에 의존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노팅엄 저택은 원래 그런 곳이었다. 

헛간으로 다가갈수록 매들린은 너무나도 무섭고 떨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무엇이 안에 있을까. 

이사벨이 문 앞에서 작게 속삭였다. 

“제이크. 나예요. 친구랑 들어갈게요.”

이사벨이 문을 열자 끼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짚더미 냄새, 피 냄새가 났다. 

매들린이 주춤하는 것을 놔둔 채로 이사벨이 안으로 들어갔다. 가스등이 더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 있는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얼굴에 피가 흥건한 사람이 짚단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의식이 없는 듯 미동이 없었다. 짙은 색 머리칼과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로 보아 집시 계통인지도 몰랐다. 

이사벨이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매들린도 군말 없이 그녀의 처치를 도왔다.

대충 지혈해둔 헝겊을 벗겨내자 단단한 품 안에 세로로 그어진 자상이 눈에 띄었다. 

칼은 아니더라도 날카로운 곳에 찔린 게 분명했다.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고 남자의 상태를 기민하게 살폈다. 이사벨이 중요한 작업을 하는 동안 그녀는 계속해서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눈꺼풀을 열어 동공을 확인하고 심박수와 호흡을 체크했다. 

‘다행이다.’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낸 매들린이 이사벨을 쳐다봤다. 한숨 돌릴 때가 되어서야 추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벨.”

“매들린. 나 한 번만 도와줘요.”

“일단 저분은…, 누구죠?”

당신의 애인은 아니네요. 안경알에 묻은 핏방울이 거슬렸다. 그 안경알 너머 이사벨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매들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고하고 아름답고 당차던 여성은 거대한 압박에 짓눌려 있었다. 

“경찰들이 재커리를 체포했어요. 모든 게 끝장이 났어요.”

“이런….”

끝장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 

“남은 건 저이뿐이에요. 제이크가 넘어가면 우리의 모든 게 끝나요.”

“우리의… 모든 거라뇨?” 

사실 알고 있다. 이사벨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고귀한 것이었으나 위험한 길이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이사벨. 너무 위험해요. 너무 무모해요. 이대로 날이 밝으면 병원으로…”

“이곳이 병원이잖아요. 매들린.”

“하지만 이곳은 상이군인 병원이에요. 경찰이 들이닥치면 이곳에서 이뤘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거예요. 잘못하면 당신도 위험에 처해요. 이사벨. 제발….”

그때였다. 이사벨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릴 따름인 것이었다. 

“일주일. 딱 일주일만요.”

“…….”

“일주일이 지나면 저이는 떠날 거예요. 그때까지만 나를 도와줘요.”

“…그렇다 해도 있을 곳이 있나요?”

매들린은 지나치게 무른 자신의 마음을 책망했다. 오츠 부인이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친절한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단호하고 사나운 전사였다.

매들린에게는 그런 단호함이 부족했다. 

“…저택 지하에 방이 있어요.”

“네?”

‘지하실 방?’ 물론 있기야 하겠지만, 저택에서 장장 몇 년을 안주인으로 살았었음에도 매들린은 알지 못했던 공간이었다. 

“방치된 지하실이 있어요. …매들린. 사정을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져요. 일단 날 좀 도와줘요.”

* * *

아무리 두 사람일지라도 건장한 남자를 부축한 채로 먼 거리를 가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거꾸러지려는 것을 참아내 가며 이를 악물었다. 

헛간의 근처로 돌아가자 작은 문이 달린 폐가가 있었다. 

“예전에 이곳이 성당이었거든요. 포도주 저장실이랑 창고가 지하에 있었어요.”

숨을 허덕여 꺼억꺼억 하는 소리가 나오면서도 이사벨은 말을 이어나갔다. 폐가의 문을 열자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를 막은 나무 덮개가 있었다. 이사벨이 나무 덮개를 열자 가파른 통로가 보였다. 

장정을 부축한 채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이고 헛발질을 해 그대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계단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는 매들린으로서는 가슴 철렁이는 일이었다. 이사벨이 든 랜턴에 모든 것을 의존하며 발끝으로 더듬어 걸어갔다. 석조 통로를 지나가자 다시 문이 나왔다. 

이사벨이 품 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기름칠을 꽤 최근까지 했는지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전쟁 참호처럼 나무로 덧대 만들어진 방이 나왔다. 한쪽에는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작은 침대까지 있었다. 

“여기는…”

“일단 눕히고 말하죠.” 

둘은 인사불성인 잭을 침대에 눕혔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매들린까지 휘청였다. 이미 온몸은 땀과 피로 절어있었다. 그녀가 색색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설명해줄 건가요. 이사벨.”

이사벨이 문득 무척 피로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팅엄 저택은 원래 수도원이 있던 곳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이후로 성당들이 몰락하면서 터만 남아있던 곳 위에 지어진 게 노팅엄 저택이었다. 

“그리고 그 성당들은… 보통 이교도들의 성지 위에 지어지죠.”

그러니 요는 그랬다. 켈트인들의 성지 위에 성당이 지어지고, 그 위에 또 노팅엄 저택이 지어진 것이었다. 

이곳은 성당의 수도사들이 와인을 저장해두던 장소로, 성당이 없어진 이후에는 구교도들을 박해하는 고문실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했다. 

“왕당파와 의회파의 내전 때에는 사령관들의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했죠.” 

이사벨이 한숨을 쉬었다. 

“이 저택에는 죽음의 역사가 서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역사의 무게가 이사벨을 온 힘을 다해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무척이나 지치고 힘겨워 보였다. 

“매들린 날 도와주기로 한 거예요. 여기까지 저이를 데려왔으니까.”

이사벨이 더러운 손으로 매들린의 손을 붙잡았다. 매들린이 한 손으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몸을 떨었다. 

“저는 잠시 이곳을 떠나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동안 잭을 돌봐줘요.”

“그건… 미안하지만 이사벨-.”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신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저택에 들인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말했듯이 딱 일주일간만이에요. 그 뒤에 잭은… 제이크는 떠날 거예요. 절대로 문제가 되지 않는….”

“이사벨. 됐으니까. 그저… 이곳으로 돌아올 거란 말만 해줘요.”

“돌아올 거예요.”

이사벨이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러면 딱 일주일이에요. 나는 저 사람을 딱 그때까지만 돌볼 거예요. 그 이후로 저이가 나가지 않는다면,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써서 쫓아낼 거예요.” 

“…고마워요.”

그 말을 들은 이사벨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많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병원을 만들고 사람들을 구한 대단한 사람이 지금은 한없이 연약해 보였다. 매들린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사벨. 고마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내게 해준 모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요.”

매들린이 눈을 감았다. 

“꼭 돌아와야 해요. 이건 부탁이 아니에요. 반드시 와야 해요.”

이안을 위해서라도, 이곳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요. 

* * *

다음날, 이사벨 노팅엄이 사라졌다는 소식은 저택을 뒤흔들었다. 그녀는 장문의 휘갈긴 편지를 어머니에게 남긴 채로 종적을 감췄다. 그녀의 방은 급하게 옷가지를 챙겼는지 난장판이었다.

가출이었다. 

모두가 아연실색한 와중에, 매들린은 조용히 할 일을 했다. 비밀은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한마디 한마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사벨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밝히지 않았다. 이사벨은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썼으나 돌아오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약속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병원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간호사들은 정신적 구심점인 이사벨이 사라지자 동요했다. 결국, 매들린이 더욱 씩씩한 척하며 그들을 다독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에릭, 그리고 선대 백작부인은 이사벨을 찾겠노라고 런던으로 출발했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느니, 사설탐정을 고용한다느니 말이 많았으나 일단 가족들이 직접 찾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경찰이 엮이면 안 된다는 것은 다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사벨이 전쟁 전에 어떤 이들과 어울렸는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런던행 열차를 타기 위해 떠날 때였다. 저택 문을 나서려던 이안이 돌연 매들린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매들린의 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가까이에 뚜렷하게 음영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합리적인 표면 밑에 들끓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이사벨의 정열과 똑 닮은 면이 있었다.

“…안전하게 다녀오세요.”

그 말을 내뱉는 자신이 가증스러워진 매들린이 입을 꾹 닫았다.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끝을 이안이 가볍게 감싸 쥐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손등에는 화상 자국들이 굳어 단단했다. 반대로 장갑을 낀 손은 너무나도 부드러워, 모든 일이 거짓말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