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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이상야릇한 감정 (41/121)

40화. 이상야릇한 감정

안경점을 나선 둘은 잠시 런던 시내를 활보했다. 

매들린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연보랏빛 숄을 두른 차림이었다. 수수한 하늘색 모자에는 새가 수놓아진 비단이 리본처럼 묶여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네요.” 

매들린은 안경을 쓴 후부터 시종일관 재잘거렸다. 

그녀로서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전 생애에서도 이렇게 선명하지는 않았는데. 어찌 그랬을까. 시력이 안 좋아지는 것도 모르는 채로 갇혀 살았기 때문일 테다.

그때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을 놓쳤는지 생각하면 씁쓸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선명한 시야를 가지게 되니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한결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보였다. 런던 시내를 장식하는 네온사인, 턱시도를 입은 신사들, 그리고 단발머리를 한 숙녀들까지. 도시의 미추가 그녀 앞에 그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매들린은 전율했다. 

* * *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어 둘은 이안이 예약해놓은 호텔의 레스토랑에 당도했다. 

이안과 매들린은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긴긴 프랑스어가 붙은 요리였으나 간단히 말해 단 과일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였다. 깔끔하니 입맛에 맞았다.

곁들인 와인 역시 무척이나 훌륭했다. 살짝 지친 몸을 훈기로 데워주는 듯했다.

노곤한 삭신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즐거운 하루였다. 지금 눈앞의 남자와 나누는 대화도 좋았다. 이안이 장갑 낀 한 손으로 와인잔을 들었다. 

“어떤가요. 음식은 입에 맞습니까.”

그의 낮은, 침윤된 목소리에 무대의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곁들어졌다. 매들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후후 웃었다. 

“맛있네요. 런던에서 이렇게 즐긴 지도 백 년은 족히 넘은 것 같아요.”

“고작 5년 정도입니다. 백 년이 아니라.”

“그렇네요. 사교계 시절로부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네요. 그런데도 참 많은 일이 있었어요. 마치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았어요. 지난 5년의 세월이 저에게는 일종의 교육이었지요.”

와인 몇 잔이 들어가자 남자는 한결 나른해진 기분이었다.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악단이 연주하는 스윙. 주위의 사람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 얇고 섬세한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과 잘 맞춰진 양복을 입은 남자들의 춤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매들린이 있었다. 홀의 모든 조명을 삼킨 것처럼 제 눈에 너무나도 밝게 빛나는 여자. 계속 지켜보고만 있어도 즐거움을 주는 여자였다. 

정말이지 다시 살아갈 가치가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는 한 점의 비아냥거림 없이 생각했다. 

* * *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둘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리 일등칸이라지만 뒤에 앉은 승객들이 전부 자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리로 말을 해야 했다. 그 통에 매들린은 이안과 마주 앉지 않고 그의 옆에 앉았다.

이안으로서는 제 심장 소리가 여자에게 들릴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모르는지 매들린이 목소리를 낮춰 수다를 떨었다. 

“어렸을 때 점쟁이 집시가 우리 집으로 온 적이 있었어요.”

“…….”

“꼬부랑 할머니였는데, 카드들을 늘여놓더니 점을 치는 거예요. 그때 저는 아직 어렸답니다. 어머니가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게 생각나네요.”

매들린이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올려 둔 뒤 눈을 감았다. 

“신기한 건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그 노파의 얼굴만큼은 생생히 기억난다는 거죠.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억세게 운 좋은 아이라고요.”

“…….”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긴장감이 역력한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는 정말이지 억세게 운 좋은 여자예요. 비록 재산도 작위도, 그렇다 할 만한 능력도 없지만요.” 

차마 남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되었노라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진심만큼은 전해지길.’

매들린은 창문 너머 숨 막히게 빠르게 변하는 밤 풍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창에 비친 남자의 옆얼굴까지. 

* * *

{ <런던 텔레그라프>, 1919년 11월 18일

폭력적인 방직 공장 파업, 군이 나서서 진압

어제 스토크온트렌트의 방직 공장에서 폭력적인 파업 사태가 일어나 공장 두 개가 전소되고 노동자 세 명이 사살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조지 로이드 수상은 사태 이후 즉각 성명을 통해 민간인 사상자는 없다고 발표했다. 또한 파업의 모의자들이 현재로선 러시아 공산주의자 측인지 자생적인 조직인지 명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으며 추후 수사를 통해 밝혀나갈 것이라 하였다. }

에릭 노팅엄이 아무렇게나 제 머리를 흩트렸다. 다소 어려 보이던 얼굴에는 이제 완연한 사내의 태가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에는 여전히 치기가 역력했다. 

그는 온통 짜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에릭이 예상하던 것과는 일이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들린을 직접 대동하고 모임에 나타나서 인정받고 싶었다. 어르신들에게 눈도장도 찍고 말이다. 

하지만 일이 틀어졌다. 별장에 도착한 이후로 매들린은 부쩍 이안과 가까워졌다. 둘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되었다. 생각보다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음을 공표한 꼴이 되어버렸다. 

선대 백작부인조차 매들린을 탐탁하게 보기 시작하자 에릭은 조급해졌다. 

그러나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매들린 로엔필드가 이안과 런던에 간 지금은 더더욱이. 그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타닥타닥 장작이 지펴지는 소리가 벽난로에서 났다. 그는 제 복학원을 그 안에 넣을까 하다 포기했다.

“젠장….”

결국, 그 종이를 어찌하지도 못한 채 움켜쥔다. 

* * *

안경을 쓴 매들린이 나타나자 간호사 친구들이 열띤 반응을 보였다. 다들 손뼉을 치며 재잘거리며 매들린을 새떼처럼 에워쌌다. 

“너무 노인 같아 보이지는 않나요?”

매들린이 수줍게 웃자 친구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네트는 매들린의 안경을 쓰자마자 어지럽다며 이마를 짚는 시늉을 했다. 

“매들린! 옥스퍼드 법학 교수 같아요. 아니, 고전 그리스어 선생님 같기도 하고.”

“역시 노인 같은 거잖아요!”

“아니, 명석해 보인다고요. 똑똑한 아기 다람쥐 같기도 하고요.”

꿀색 머리를 한 아기 다람쥐요. 아네트가 매들린의 머리칼을 꼬며 장난을 걸었다. 

“똑똑한 아기 다람쥐라뇨.”

매들린의 흰 뺨이 빨갛게 익었다. 그런 매들린을 보며 사람들이 꺄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역시 매들린은 우리 병원의 설치류예요.”

“그런 소리 말아요. 그나저나 다들 런던에 새로 개봉한 루돌프 발렌티노 영화는 봤어요?” 

“영화를 볼 시간은 없었네요.”

“그건 그렇고, 매들린… 다음에 런던에 갈 때는 나랑 꼭 같이 가요.”

* * *

그녀는 잰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다들 바빴다. 환자들이 얼마 없는 윗 병동을 비우고 그 자리에 예전처럼 소규모 응접실과 연주회장을 마련해놓느라 일거리가 많았다. 

환자들을 1층으로 옮기는 난리 법석을 피우게 된 건 마뜩잖았으나, 그것도 결국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나쁘지만은 않았다. 전쟁은 점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히고 그 자리에는 미래와 호황을 향한 단꿈이 자리할 것이다. 이곳이라고 해서 다를 이유는 없었다. 

우선 지금 눈앞에 사용인들을 지휘하며 담소를 나누는 이안의 모습을 보면….

런던이 매들린에게만 마법을 부리진 않은 게 확실했다. 요 근래 이안은 한결 이완되고 안정되어갔다. 늘 날이 잔뜩 선 표정에서 어느덧 차분한 안정감이 느껴졌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행동거지에는 단단한 위엄이 있었다. 

걷다가 휘청거릴지언정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디서나 타고난 우아함을 잃지 않는단 이야기였다. 말보다 행동으로 다정함을 보이는 건 여전했다. 

그런 태도에는 무언가 존경할 만한 구석이 있었다. 더불어 완숙함에 접어든 남자의 외연을 보면 가슴께가 뻐근한 것이, 뭔가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침 이안이 난간을 짚고 새로 들어온 풋맨인 케이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그녀의 눈에 보였다. 한참을 쳐다봤을까, 그가 제게 고정된 시선을 느낀 듯 매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매들린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와 한껏 눈을 맞추며 함박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그녀가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제 당신의 얼굴이 잘 보이네요.’

“…….”

남자의 얼굴에서 잠깐 얼이 빠졌다. 이안 노팅엄으로서는 드문, 무방비한 순간.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남자가 번듯한 입꼬리를 트며 마찬가지로 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그 시원한 광경에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누구 하나가 먼저 볼이 발그랗게 변해 고개를 돌렸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 * *

사람들에게 조잘조잘 런던에 있었던 일들을 읊고 나니 정말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런던을 돌아다니느라 삭신이 쑤셨다. 여독을 풀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얼굴과 손발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일기를 쓰려고 의자에 앉았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녀의 문을 누가 노크도 하지 않고 열었다. 

“이게 무슨…!”

‘쉿.’

이사벨이 매들린의 입을 막았다. 가까이 선 그녀에게서 특유의 제비꽃 향수 냄새뿐이 아닌, 비린 피 냄새가 났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매들린이 이사벨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사벨. 이사벨. 진정해요.’

이사벨의 몸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떨리고 있었다. 불길함이 그녀의 흉중 깊은 구석까지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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