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와의 런던행
런던으로 향하는 일등칸 열차 좌석은 확실히 푹신하고 아늑했다. 매들린은 승무원이 내어주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구경했다.
마주 앉은 이안은 서류와 씨름하는 중이었다. 얇은 장갑을 낀 한 손은 서류를 뒤적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안. 가는 동안만 좀 쉬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일중독이 되셨을까. 100년 전만 해도 귀족들에게 있어 노동은 경멸의 대상이었는데 말이다. 매들린이 툴툴거리자 이안의 두 눈이 서류 종이 너머로 나타났다.
“도착하면 시간이 없으니까…. 당신과 있을 시간 동안은 일 생각은 안 하고 싶어서.”
“이안, 혹시 아는가 싶어서 말하지만, 지금도 나와 함께 있는걸요.”
매들린이 고개를 당긴 채 이안을 바라봤다. 그녀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봐요? 나 여기 있죠?”
결국, 이안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거 참.”
이안이 결국 서류를 책상 한쪽 끝으로 치웠다. 그가 두 손바닥을 살짝 보여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나와 무슨 정다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거죠. 매들린 로엔필드 양.”
남자의 여유만만한 모습에서 예전의 그 자신감 있는 풍모가 떠오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예전과 완전히 똑같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결…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와 비교해 어른스러워졌다. 침착해졌고.
살짝 가라앉은 면도 있었으나 매들린은 그의 그런 모습이 더 좋았다.
“글쎄요.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서로 추측하기 게임이나 할까요?”
“나는 별로 흥미로운 사람이 아닌데.”
“흥미롭지 않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추측하는 게 중요한 게임이라고요.”
“…….”
“그럼 저부터 시작할게요. 지금 당신이 하는 생각을 맞춰볼 테니까. 기다려봐요.”
그녀가 눈을 감았다. 용한 점성술사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카드를 펼쳐놓는 시늉을 하더니 눈을 화들짝 떴다.
“알아냈어요. 런던의 클럽에서 친구들 만날 생각하고 있죠!”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저 구석에 있는 서류 속 숫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가요? 어떻게 아귀가 안 맞는 숫자들을 요리할지 생각 중이죠?”
“틀렸습니다.”
“눈앞에 있는 매들린 로엔필드가 퍽 성가시게 군단 생각?”
“그것도 아닙니다.”
노팅엄이 보이지 않는 카드를 뒤집고선 매들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프랑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요?”
전쟁. 매들린의 청아한 하늘빛 눈과 남자의 음울한 초록빛 눈이 얽혔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곳에 있을 때는 지금 이 순간을 감히 그려보지도 못했는데 새삼스럽게 살아있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낯간지럽기라도 한 듯, 남자가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
매들린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작금의 분위기가 퍽 나른하고 좋기는 하지만, 이안의 입에서 ‘살아있기를 잘했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그런 순간들이 많을 거예요.”
매들린이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즐거운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요.”
그녀의 볼에 보조개가 폭, 파였다.
* * *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공기가 안 좋아진 것이 폐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앳된 소녀 같은 흥분이 매들린의 기분을 잔뜩 돋웠다.
“사람이 정말 많군요!”
“…런던에 사람이 많다는 소리는 바다에 물고기가 많다는 소리나 같-.”
“아니. 전쟁 전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지 않아요? 게다가 치마가 정말 짧아졌네요.”
다들 종아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매들린은 끊임없이 주위 경관에 감탄하면서도 세심하게 이안을 챙겼다. 그에게 거칠게 부딪쳐오려는 사람들을 미리 몸으로 막아내며 이안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했다. 이안으로서는 살짝 조마조마한 광경이었다.
“노동자에게도 정당한 권리를 달라!”
“30세 미만의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 새천년이 멀지 않았느니!”
런던은 파티장이거나 아수라장이거나, 혹은 둘 다였다. 여러 사람이 표어를 들고 역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경찰들은 이들을 단속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소매치기와 좀도둑들은 역시 번성했다.
도심에는 마차를 탄 사람들과 자동차를 탄 사람들로 뒤섞여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이안은 그 난장판 속을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능숙하게 헤쳐나갔다. 런던 길을 제 손바닥에 난 손금처럼 잘 아는 이이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는 매들린이 자신 앞에서 나서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녀를 뒤에서 나름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짝이 되어 순조롭게 도로를 걷는 두 사람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삐쩍 마른 얼굴에 낡은 사냥모를 쓴 남자였다. 그는 팻말 같은 것을 몸에 걸고 있었다.
“참전 용사이신 것 같은데 동료에게 한 푼 부탁드립니다.”
팻말을 자세히 보니 이렇게 쓰여있었다.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참전 군인의 생계를 보장하라 }
남자는 손등과 손목의 뼈가 다 도드라질 정도로 말랐다. 매들린이 당황하며 지갑을 찾기 시작하자 낯선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걸 본 이안이 그녀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일갈했다.
“비켜.”
“…같은 전우끼리-.”
“비키라고 했어.”
매들린이 뭐라 할 새도 없었다. 팻말을 목에 건 남자가 욕설을 중얼거리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웬 병신 새끼 때문에 재수가 없으려니….”
그가 욕설을 줄줄거리면서 그들을 지나쳐 사라졌다. 매들린이 뒤늦게 화를 냈다.
“이안, 괜찮아요? 저 사람 정말 너무하네요! 어떻게 같은 전우라면서 저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죠!”
“눈이 풀려 있었습니다. 매들린, 동정심도 좋지만 낯선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주의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가 당황하는 매들린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
“전쟁 중에는 옆의 동료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전쟁이 끝나고 가장 먼저 잊히는 게 바로 전우애라는 감정입니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였다. 매들린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좀더 잽싸야겠어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냅다 가방으로 후려쳐야지.”
“…….”
매들린은 아까 전 이안의 조언을 좀 이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남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둘은 잠깐 걷다가 카페에서 잠시 쉬어갔다. 전쟁 후 굉장히 화려한 양식으로 개축된 카페는 이제 젊은 남녀가 같이 앉아 한담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매들린이 재잘거렸다. 원래 여성은 티하우스, 남성은 카페였던 관습이 무너졌다는 것에 고무된 것이었다.
“전쟁이 나서 남자들이 전부 떠났으니 여자들을 손님으로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잘됐군.”
차보다는 커피가 더 좋으니까. 둘은 구석의 자리에 앉아 함께 커피를 마셨다. 매들린은 커피에 설탕을 탔고 이안은 타지 않았다. 두 잔째라 그런지 매들린의 기분이 들떴다.
모르는 사람들이 카페에 앉은 둘에게 드문드문 인사를 해왔다.
“노팅엄 백작 각하. 안녕하십니까.”
“런던에서 뵙는 건 전쟁 이후로 처음인 것 같군요.”
“숙녀분과 함께시네요.”
남자는 그럴 때마다 간단한 인사를 되돌려주며 악수를 건넸다. 그런 일이 한 세 번쯤 반복되자 남자가 조금 미안한 눈빛을 보냈다.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작님 명성도 대단하군요. 아무튼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소문이 날까 두려운데요? 웬 여자와 고매한 백작 각하가 함께 있다는 소문 말이죠.”
“당신만 괜찮으면 별로 상관치 않습니다.”
이안이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가 뭔가를 생각하듯 입을 꾹 다물더니 자리에서 대뜸 일어섰다.
“이제 안경점으로 가지요.”
* * *
안경점은 고급 상점가가 위치한 본드 거리에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노신사로, 이안을 보자마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둘을 맞이했다.
“미리 언질을 주셔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습니다.”
그가 갑자기 유리 진열대 안의 안경들을 이것저것 꺼내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들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일단 시력부터 측정하고 싶은데요….”
“아. 맞아요. 시력 측정. 시력부터 측정해야지요.”
남자가 호들갑을 떨면서 매들린을 이끌었다.
“로엔필드 양이라고 들었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이안은 탁자 위의 <뉴요커>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매들린을 기다렸다. 시력을 재는 몇 분의 시간이 어찌 이리 긴가 싶었으나 실제로 시계를 쳐다보면 고작 십분 여 남짓이 지났을 뿐이었다. 일각이 여삼추였다.
안경을 쓴 채 빙그르르 돌며 나타나는 매들린을 볼 때까지. 그렇게 시간은 지독히도 느리게 흘러갔다.
“…이 안경 어때요?”
매들린이 방에서 나오자마자 이안은 그 자리에 앉아 돌처럼 굳었다.
수만 겹의 꽃잎들이 겹겹이 펼쳐지며 화사하게 피어나듯,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가 너무나도 빛이 나서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얇은 테의 둥그스름한 안경은 그녀의 콧잔등 위에 아주 잘 어울렸다. 고급 안경답게 나비의 골조처럼 가느다란 뼈대로 이루어진 물건이었다.
지금 눈앞의 여자를 이루는 모든 것이 얇은 설탕 장식처럼 아름답고 섬세했다. 안경이 그녀 얼굴의 일부분을 가린다는 사실이 뒤늦게 아쉬웠다.
젠장. 눈물이 날 지경이군.
그저 여자가 빙그르르 돌며 나타났을 뿐인데 이렇게 감상적이 되다니. 이미 곤죽이 되어버린 마음이 더 물렁해진 게 아닐까. 이안은 자조했다.
“어때요? 이안, 제 모습 괜찮아요?”
매들린이 이안을 가까이서 살피며 물었다. 그녀가 멍한 이안이 걱정스러운 듯 가까이서 눈을 깜빡였다. 매들린이 안경을 벗었다.
“어울립니다.”
이안이 떨떠름한 듯 내뱉은 말에 매들린이 푸스스 웃었다. 실은 잔뜩 굳어 그런 경직된 어투가 나온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안경을 걸쳤다.
“금속이 가벼워서 무척 마음에 들어요.”
“그게 좋습니까. 다른 안경은….”
“이게 제일 가볍고 좋아요. 다른 안경은 좀 무겁더라고요.”
이안이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그가 코트 안으로 손을 넣더니 곧장 수표를 꺼내들었다.
“이안.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잠시간 계산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매들린이 졌다. 가게 주인 앞에서 품위 없는 대거리를 계속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이안이 사게 내버려 두다니.’
그나마 남자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