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안의 약소한 선물
매들린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있었다.
저택에 도착하자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가지 말고 일이나 할걸….’
그래도 이안과 산책을 한 일은, 뭐, 나쁘지 않았다. 음, 나쁘지 않았어.
“매들린. 정말 어땠어요? 사교계의 유명 신사 숙녀분들이 다 모였잖아요.”
동료들이 그녀에게 물어볼 때마다 매들린은 애매하게 둘러댔다.
확실히 토레스 후작부인의 드레스는 아름다웠다. 스페인의 휴양지에서 직접 맞춰온 거랬나. 홀츠먼의 커프스링크에는 다이아몬드가 달렸었고…, 폴리 제이 딜린저의 프랑스어는 너무나도 완벽해서 매들린은 감히 따라 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듣던 대로 대단하고 멋진 분들이었어요. 하하하.”
물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 허례허식에 찌든 작자들이 병원을 없애자고 하네요.’ 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눈을 반짝이는 동료들을 보노라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병원이 사라진다 해도 그리 놀라울 건 없었다. 한때 병상을 가득 채웠던 환자들도 차차 퇴원하기 시작해 남는 병상이 늘었다.
이제 남은 건 중상을 입어 회복해야 하는 환자들, 그리고 정신적인 내상을 크게 입은 환자들이었다.
간호사들도 차차 그만두거나, 다른 병원으로 떠나는 이들이 있었다.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와서건, 좀 더 견문을 쌓고 싶어서건, 매들린은 떠나는 모든 이들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주고 싶었다.
물론 끝을 예감하는 것과 별개로 막상 병원이 문을 닫으면 퍽 속상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에는 언젠가 끝이 있다.
매들린은 묵묵히 일했고 공부했다. 얼마 안 되는 돈도 모이니 거금이 되어서 앞으로 어디서든 정착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런던에 갈까….’
런던에서 간호학 공부를 좀 더 해보고 싶기도 했고 다른 병원에서 일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있으니 희망이 있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 무기력하기만 했던 지난 세월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또 그렇다고 모든 게 상쾌하고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안 노팅엄에 대한 갈무리 되지 않은 감정들이 있었다.
물론 그를 계속 붙잡고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바닷가에서 고백했던 말들은 전부 사무치는 진심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했다.
전쟁 중 이안과 편지를 통해 소통했었듯이 그와 멀리서도 계속 인연을 이어나가며 먼 거리에서라도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게 매들린 로엔필드가 과거와 제대로 화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왠지. 이번 생애의 이안은 망가지지 않을 것 같아.’
이안 노팅엄은 꽤 안정된 상태였다. 지난 생애의 그는 복귀 후 많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복도에서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벌벌 몸을 떨기도 하고, 사람들과 일절 말을 섞으려 하지도 않았다고.
지금의 그 역시 지난날과 완벽히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몸을 떨거나 쇼크에 빠지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아마도 동생들이 살아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거다. 그뿐만이 아니라 병원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친척들 앞에서 그리 말했다. 병원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아마도 진심 어린 말이었을 게다.
홀로 빨래를 하던 매들린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한참 창백한 손으로 옷감을 주물주물 매만지고 있을 때였다.
“매들린.”
“…앗, 깜짝이야.”
수건의 물기를 짜던 매들린이 살짝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뒤챘다. 뒤에 선 거대한 그림자가 바짝 얼었다.
“…놀라지 않았어요. 이안.”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호흡이 가파른데.”
언제부터 매들린을 지켜봤던 것일까. 세탁실의 문간에 이안 노팅엄이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그에게는 유머 감각이 생겼다. 전쟁 전의 장난기가 살짝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에요… 제가 그 정도로 새가슴은 아니고요…”
매들린이 스툴에서 일어섰다.
“아, 아무튼…,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어인 일인가요?”
“…세탁을 직접 해야 할 필요가 있나 궁금했습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그가 세탁실을 둘러봤다. 회벽칠이 된 작고 누추한 방은 아마 이 반짝이는 저택에서 가장 초라한 장소일 터였다.
아마 이안 노팅엄은 한 번도 자의로 이 방을 방문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귀족적인 모습이었다.
매들린이 뭔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일손이 부족하니까요. 일주일 전에 카밀라와 앤써니가 그만뒀잖아요.”
지금은 그 후폭풍을 수습하는 중이죠. 다들 무슨 일이든 나서서 하지 않으면 병원이 돌아가질 않을 거예요. 아니, 병원뿐만이겠어요. 그동안 백작님이 입은 옷도 다 여기서 빤 거라고요.
매들린이 빨랫감을 추스르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조잘거림 폭격을 맞은 남자는 머쓱해진 것 같았다.
“시급을 올려서 사람을 구인해봐야겠군요.”
그의 말에 매들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환자들도 줄었잖아요.”
“…….”
남자는 매들린이 세탁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리도 아픈 양반이 왜 저러는지. 매들린은 빨랫감을 정리하는 내내 신경이 쓰여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빨래까지 반듯하게 맵시 좋게 갠 매들린이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고 남자를 추궁했다.
“무슨 용건이에요. 빨리 말하세요.”
별장을 다녀온 후 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정작 당사자들은 의식 못 하는 일이었다.
이안이 매들린이 곱게 갠 옷감에 시선을 두었다. 그가 잠시 주저하더니 눈길을 다시 매들린의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곧 런던에 갈 생각인데, 당신도 가는 게 어떻습니까.”
“…….”
매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력이 나빠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근방의 안경점도 있지만, 제대로 된 곳에서 맞추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 같고….”
그가 답지 않게 중언부언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매들린이 대답했다.
“진짜요? 좋은 안경점을 소개해주시면 정말로 감사하죠. 하지만 값은 제가 지불할 거예요. 그 정도로 돈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면 내가 같이 가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예요.”
매들린이 남자를 위협하듯 버럭 성을 냈다. 그래봤자 작은 새가 짹짹거리는 정도의 위협이었지만 말이다.
“약소한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까.”
“무엇에 대한 약소한 선물이요?”
“…열심히 이 병원에서 일해준 것에 대한 것이라고 치지요.”
남자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너무 뜻밖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런던에 가서 안경을 사주신다니, 너무 갑작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요….”
매들린이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와 사이가 회복된 건 안심이다만, 애써 마음을 정리한 상대와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싶었다.
그런 주저함을 알아차린 듯 이안이 선수를 쳤다.
“나도 런던을 구경하고 싶던 차였습니다. 보다시피 이 몸으로 혼자 어딜 쏘다닐 순 없잖습니까. 도시가 워낙 불친절해서 말입니다.”
“아.”
그 말은 결정적이었다. 이안은 매들린의 약한 지점을 요술처럼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러면 같이 가요. 런던 구경이나 시켜주세요. 대신… 안경은 제 돈으로 맞출 거예요.”
매들린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어코 원하는 대답을 받아내고 만 이안이 붉어진 뺨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역시 비집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지난 생에서 런던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게 늘 후회스러웠다. 물론 런던에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사교계는 지루한 데다가 끝도 안 좋았고, 가출을 해서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기억뿐이다.
이안에게는 이 도시가 다르게 다가오리라. 전쟁 전에 런던의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던 남자가 아니었는가. 게다가 전쟁 후에도 사업차 방문은 꽤 했으니 도시에 익숙할 터였다. 그런 남자가 여전히 도시가 낯선 매들린을 위해 직접 가이드를 해주는 것뿐이었다.
전쟁 전 같았으면 남녀 둘이 런던을 방문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제 그 정도의 외출은 데이트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새삼 몇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구나 싶었다. 자유연애가 일상화되고 남녀 사이의 관계도 모호해졌다. 매들린으로선 여전히 어리둥절한 세계였다.
* * *
기차를 타고 당일치기로 시내를 구경하다 돌아오는 일정. 부담스럽지 않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마냥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사벨이 걱정스러웠다. 근래에 그녀는 침울해 보이는 데다가 기운까지 없었다. 그런 이사벨을 두고 외유를 나가자니, 눈치도 보이고 미안하기까지 했다.
매들린은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그걸 먼저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오빠들에게 치근덕거리는 꼴사나운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이사벨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진 않겠으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해명하는 것도 이상했고, 매들린은 그저 그녀가 빨리 기운을 차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상념과 기대를 접어둔 채로 런던 방문 날짜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