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별장에서(3)
매들린이 그런 무시무시한 남자를 올려다보며 씁쓸히 웃었다. 이럴 때의 그가 이제는 무섭지 않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절 위로해주시는 건 감사해요. 아까 전의 배려도 그렇고요. 물론 애초에 좀 제대로 차근차근 이유를 설명하셨더라면 좋았겠지만요.”
“미안합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전쟁 전에도 이안은 현란한 언변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살짝 강압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니에요. 사실 저 같아도 ‘내 친척들이 널 싫어할 게 분명하니 참석하지 마’라고 말할 순 없을 것 같거든요. 역시 제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였어요.”
하하. 매들린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안은 말없이 매들린의 너스레를 지켜봤다. 그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인 매들린이 하늘 속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처럼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별들은, 희뿌연 안개처럼 흐리고도 흐렸다. 잘 보이지 않는 별들은 그녀에게 있어 마치 불투명하고 흐릿한 자신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앞으로 며칠은 이곳에서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겠죠. 불평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자초한 일이니까요.”
“…돌아가고 싶습니까.”
당장이라도 그녀를 돌려보내기라도 할듯한 남자의 말에 매들린이 고개를 도리질했다.
“중요한 모임인데 제가 분위기를 깨뜨릴 순 없지요. 이안.”
한 박자. 남자가 숨을 들이쉬는 습윤한 소리가 들렸다.
“나갑시다.”
답지 않게 남자의 목소리에는 설익은 열렬함이 가득했다.
“네?”
“제가 견디기 힘들어서 그럽니다.”
남자가 매들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밤의 바다가 갑자기 보고 싶군요.”
* * *
전 생애와 현 생애를 통틀어서 밤의 바닷가는 처음이었다.
매들린 로엔필드는 폐부에 들이찬 짭조름한 공기에 전율했다. 가스등이 비추는 모래사장이 어쩐지 은색 융단 같았다. 운치가 남달랐다.
안개 때문인지 떨어진 시력 때문인지 주위가 몽롱하게 느껴졌다. 갈매기 우는 소리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만 아득하게 들릴 뿐이었다.
뜨거웠던 바람은 한결 열기가 가셨다. 미풍이 그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굽이치는 금발 머리가 가스등에 반사돼 백금처럼 빛났다.
이안은 한 발자국 뒤에서 걸으면서, 그 광경에 갈증을 느꼈다. 어째서일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와중에도 그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둘은 천천히 바닷가 옆 인도를 걸었다.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인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힐끔힐끔 두 사람을 곁눈질하는 것이, 밀회의 현장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매들린이었다.
“이안. 앞으로는 악역을 떠맡지 말아요.”
“그런 적 없는데, 이상한 일이군.”
남자가 픽.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악역이라니.
“제가 뭔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할 것 같으면 제대로 말해달라구요. 괜히 못된 말해서 제가 오해하게 만들지 마세요.”
“미안… 하오.”
이안이 비집어져 나오는 미소를 숨겼다.
“…사과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였고요.”
반 발자국 앞서가던 매들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남자도 제자리에 섰다.
“요즘 시력이 안 좋아진 것 같아요.”
“…….”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매들린이 멀리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저게 안 보이네요.”
“열 살 미만 수영 금지.”
“…큰일 났네.”
밤이라서 안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냥 시력이 안 좋은 거였어. 안경을 맞춰야 하나.
“…지나치게 열심히 공부하니까.”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매들린이 고개를 들어 뒤를 올려다봤다.
“일도 공부도 좋지만, 좀 쉬면서 하라는 거요.”
“제가 밤새워 가면서 공부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남자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가 간신히 이어졌다.
“이사벨이 그러더군.”
어쩐지 궁색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아하….”
매들린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이내 담담하게 바뀌었다.
“이번 한 번은 더 캐묻지 않을게요.”
남자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매들린이 큭큭거렸다.
“그나저나 이안. 병원에 대해서 고민 많을 것 같아요.”
“…….”
“편하게 결정해요. 이사벨도 알고 있어요. 이걸…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다는 거…. 아쉽긴 하겠지만, 각자 할 수 있는 다른 역할이 있을 거예요.”
“병원이 없어지면.”
“…….”
“떠날 건가?”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걸음은 점차 느려졌고 매들린이 먼저 멈춰 섰다.
“떠날 건가?”
“…….”
그대로 멈춰선 매들린은 잠시 생각했다. 사실 생각할 게 많지도 않았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애달픈 미소를 지었다.
“떠나야지요.”
매들린은 흉중 깊이 우러나오는 온유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어쩌면 필사적일 정도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당황이 역력했다.
안타까워진 매들린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안.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바라고, 앞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기를 바라고요.”
어쩐지 후련하고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청혼했을 때에는… 솔직히 ‘제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어요. 사람은 누군가에게 구원받을 수 없어요. 또 다른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구원할 수도 없죠…. 더군다나 저 같은 사람이 당신을 구원한다니. 말도 안 되죠. 우리는 그저 서로를 조금씩 도와나갈 수 있을 뿐인 거예요.”
이전과는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나가고 다른 실수와 다른 성공을 반복해가며 항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또 다른 실패여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사람은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자신이 이안을 구한다거나, 이안이 자신을 구하는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서로에게 호의를 베풀며 축복을 기원해준다면 그걸로 괜찮다. 그 기억들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그녀가 두 번째 생을 살아오면서 느낀 첫 번째 깨달음이었다.
매들린은 진심으로 이안 노팅엄의 행복을 빌었고 그 감정이 그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그녀가 목발을 쥔 이안의 손을 감쌌다. 작고 부드러운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남자의 투박한 손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도하듯 그렇게 양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내 인생에 나타나줘서.
남자는 자신이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인지, 울고 싶은 기분인지, 아니면 하다못해 웃어버리고 싶은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셋 다 정답일지도 몰랐다.
분노일까.
그것도 맞다. 매들린 로엔필드가 자신을 떠난다는 데에서 느끼는 분노.
웃기는 일이다. 자신이 무슨 권리로 그녀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심지어 매들린 로엔필드는 성녀라도 되는 듯이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마치, 이안 노팅엄이 자신 없이도 알아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성녀 나셨군.’
허탈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어쩌면 분노의 방향은 여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향한 걸지도 몰랐다.
처음 그녀가 자신에게 장난스레 청혼했을 때 기회를 낚아채야 했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그녀의 치기 어린 제안에 응했어야 했다. 여자의 동정심을 이용해야 했다. 이기적이건, 비신사적이건 말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동정심조차 아닌, 이해타산에서 우러나온 청혼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해타산이야 제 전문분야 아니던가?
화가 난다.
지금 자신을 붙잡고 있는 부드럽고 따뜻한 손 때문에 화가 난다.
오로지 그 손을 만지기 위해서라면, 남은 반절의 몸뚱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비참하다.
별장 안의 사람들이 매들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데에 화가 난다.
이해타산이 뭐가 나쁜가. 매들린 로엔필드를 돈으로 붙잡는 게 뭐가 나쁘냐는 말이다.
이안의 한쪽에서 사악한 목소리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수지맞는 장사 아냐? 서로에게 넘치는 걸 맞바꿔 부족한 걸 채워주는 게 뭐가 나빠?’
‘그녀는 돈이 없고, 나는 돈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지. 나는 모든 곳이 고장 나있고, 그녀는 아름답지.’
‘우리의 결합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거야.’
이해타산에 능한 이안 노팅엄이 세운 대차대조표는 어딘가 기괴했지만, 상관없었다.
목소리가 계속 그를 충동질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병원 놀음에 죽을 때까지 장단을 맞춰 준다고 말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매들린 로엔필드가 떠나지 못하도록 해.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하란 말이야.’
‘그녀가 너를 벗어날 수 없도록 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이안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하게 될 얼굴이 매들린의 것일지, 제게 사악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악마의 것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적요를 채우고 있었다.
“이안. 피곤해요? 돌아갈까요?”
걱정하는 목소리가 그를 깊은 마취 상태에서 일깨웠다. 결국,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웃어 보였다. 자신의 미소가 친근하기보다는 기괴해 보일 거란 열패감을 애써 잊으려 노력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