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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별장에서(2) (37/121)

36화. 별장에서(2)

매들린은 점차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해나갔다. 

노팅엄 가문 사람들은 전쟁 중에 미국 채권을 사 재산을 불렸다. 또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매기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애국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애국심과 이해타산은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들에게 사업이면서 의무였다. 

그들이 어째서 귀족의 황혼 시대에 몰락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허영과 실속을 동시에 챙기는 부류였던 것이다. 모두가 돈을 쫓는 시대에 비난할 거리는 아니었지만, 매들린은 그들의 그런 냉정함이 조금 무서웠다.

노인이 백작부인을 향해 마지막 질문을 날렸다.

“혹시 그렇게 하면 그 살인적인 상속세 면제가 됩니까? 그러면 나도 내 집을 잠시 헌납하고 싶군요.” 

이안이 앉은 지 처음으로 말을 먼저 꺼냈다. 그의 얼굴은 석고상 가면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종의 불투명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제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모두가 우려하시는 바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저 자선사업을 위해서 병원을 운영하는 거라면 오해라고밖에 할 수 없군요. 일단 제가 거동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병원은 제 치료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이안이 자신의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며 어머니를 보호했다. 그가 재떨이에 얇은 담배를 꽂아 거꾸러뜨렸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해서는 그만하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홀츠먼이 가만히 그 모습을 보다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자. 우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다 같이 게임이나 하지요.”

손님들이 자아내는 분위기에는 지독한 구석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순진한 우월의식이 있었다. 마치 흙 위의 개미를 죽이는 아이들 같은……. 

매들린은 종잡을 수 없는 불편감을 안고 브리지 테이블에 앉았다. 

사람들은 브리지 카드게임을 하기 위해 여덟 명씩 나누어 테이블에 앉았다. 다행스럽게도 매들린은 이안과 다른 자리에 배정되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홀츠먼이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어쩐지 전혀 호감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매들린을 곁눈질했다.

“로엔필드 양. 에릭과‘도’ 친구라고요.” 

“아… 네….”

“이사벨이랑 친하다고도 들었어요.”

“네.”

“의외네요.”

매들린은 그 말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저이가 왜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웃는지도. 그가 갑자기 보이는 관심이 무척 껄끄러웠다. 

“저는 당신의 부친을 잘 압니다.”

버터 같은 미국식 억양이 광고표어처럼 들렸다. 그래서인지 매들린의 대답이 한 박자 느렸다. 

“네.” 

이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안다는 걸 놀라워해야 할까. 매들린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그와 말을 섞을수록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손끝에서 착착 카드를 섞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의뭉스러운 말 한마디를 던졌다. 

“유럽 본토에 투자한 건 전쟁이 아니었더라도 큰 손실이 날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죠. 유감을 표해요.” 

저 사람 뭐지. 매들린은 제 불행을 비꼬는 듯한 그의 말투가 적잖이 거슬렸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저 같았으면 석유에 베팅했을 겁니다. 록펠러라는 유망한 젊은 기업인이 있어요. 그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똑똑한 사람이니까요.”

그 말을 하며 남자가 카드를 스르륵 펼쳤다. 부채꼴처럼 펼쳐지는 카드가 마치 그의 손 밑에서 살아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죠.” 

그가 매들린의 말은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굴었다. 

“시간을 놓친 사람은 모든 승부에서 질 수밖에 없어요. 한번 거절한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

말에는 작은 가시가 돋쳐있었으나 말투 자체는 석유처럼 능글맞았다.

* * *

실전이었다면 굉장히 많은 돈을 잃었을 것이다. 이미 기분이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매들린은 결국 게임을 기권했다.

그녀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아무도 없는 발코니에 나가자마자 억눌린 한숨이 비집어져 나왔다. 오랜만의 ‘사교계’인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병원에서 환자들과 하던 떠들썩한 파티보다 재미있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어쩐지 숨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방에 들어가야겠다.’ 

남은 시간 동안 꼼짝없이 이 별장에서 손님 행세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몰래 제 방으로 들어가려던 매들린이 흡연실에서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에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한둘이 아니라 여러 명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뒷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참 부적절하군.”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부적절하다니? 매들린이 귀를 쫑긋 세워 대화의 내용에 집중했다. 

“참… 에릭의 친구라니요. 외모는 봐줄 만한데 좀 뻔뻔스럽지 않나요. 교육도 받은 여성이 어쩜 그리 낯이 두꺼운 거예요? 에릭도 그렇고… 어떻게 이안의 청혼을 거절해놓고 저럴 수 있어요?”

이번에는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였다. 매들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이 성토하고 있는 ‘뻔뻔스러운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에릭은 어린 마음에 그런 분별없는 행동을 한 거겠지. 형이 건드렸으니 다 좋아 보이는 거야. 그리고 요즘 젊은 여성들은 독살스러운 데가 있으니까 당신이 이해해.”

형이 건드렸으니 다 좋아 보이는 거라니….

“그래도 눈살이 찌푸려지네요. 한몫 잡아보겠다는 심보인지…. 귀족으로 길러졌다는데 그것도 거짓말 아니에요? 전 역시 마리아나를 이해할 수 없어요. 어째서 저런 여자를 보고 놔둘 수 있는 건가요.”

“하긴 너무하지. 이안이 그렇게… 되어 돌아왔으니 둘째에게라도 손길을 뻗어보겠다는 생각인가 봄세. 마리아나도 병원 놀음을 하기보다는 내부 단속을 하는 게 좋겠어.”

‘……’

“이안이 불쌍해요….”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어두운 복도 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림자 속으로 침잠한 몸이 사후경직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피가 차갑다 못해 얼음이 되어 그대로 혈관에 멈추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처음의 충격이 가시자 이내 담담해졌다. 내용은 너무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아무런 연줄도,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젊은 여성이 가문의 차남과 함께 나타난다면 누군들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젊은 여성은 이미 장남의 청혼을 거절한 전력이 있다. 아무리 순수히 ‘친구’임을 강조해봤자 노림수가 있는 걸로밖엔 보이지 않을 테다. 

이안의 상태를 보고 차선책을 잡아챈 그런 여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앞서 조지의 오해를 떠올렸다. 직설적인 조지라서 그망정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이 보기 싫었을까 싶었다. 오랫동안 일만 하느라 타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건가.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별수 없었다. 

[이안이 다쳐서 돌아왔으니 둘째에게라도 기대보려는 거야.]

그 말은 대못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자기연민보다는 이안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뭐라 책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도 없는 곳으로 피신하고 싶었다.

아무튼 지금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찾으러 갈 수도 있었다. 그전에 돌아가야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단단한 몸과 마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며 고개를 살풋 숙였다. 뒤로 자빠질 뻔한 그녀의 허리를 뜨겁고 단단한 손이 지탱했다. 

어둠 속의 그림자가 낮게 속삭였다. 

“여길 나가죠.”

이안. 매들린이 고개를 들자, 자신 앞에는 남자가 있었다. 어쩐지 훨씬 커 보이는 이안 노팅엄. 

남자가 묻지도 않은 채로, 매들린에게 손짓했다. 

별장은 겉보기에는 수수하지만 굉장히 미로처럼 복잡한 곳이었다. 다행히 남자를 따라가자 별장의 후원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매들린은 신선한 바깥 공기와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며 다시금 숨을 쉴 수 있었다. 

옆에 선 이안은 아무렇지 않게 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고 있었다. 매들린이 그 모습을 보다가 이안의 손목을 잡았다. 

“이안.”

“…무시하세요.”

“……”

“원래 가십을 좋아하는 치들입니다. 내가 당신을 말렸던 건 그들이 원래 저열한 작자들이기 때문에…” 

“아니에요. 사교계를 너무 오랫동안 외면했더니 분별력도 눈치도 없어졌나 봐요. 조금만 생각해봐도 오해를 살 만했죠. 제가 모자랐어요.”

“…….”

“저는 당신 가문의 뭣도 아니잖아요.”

그녀가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지극히도 비참한 상황이었으나 그럴수록 씩씩하게 보이고 싶었다.

“…당신이 왜 아무것도 아닙니까.”

성난 어조였다. 남자의 답답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달빛이 그의 형형한 한쪽 초록 눈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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