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별장에서(1)
이사벨은 이사벨의 친구들을, 이안은 이안의 친구들을 데리고 도착하기로 했다. 차 한 대가 이미 있어서 1등은 아니란 게 분명했으나 일찍 도착한 편이었다.
매들린이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가늘게 뜨자 에릭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 부드러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외관은 이래 보여도 안에는 방이 꽤 많으니까. 모두가 다 머무를 공간은 충분히 됩니다.”
에릭이 가슴을 살짝 두드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매들린이 그저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기 전 자신의 복장을 살폈다.
오늘 매들린이 입은 하늘색 드레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금발과 어울렸다. 또한, 그녀가 걸친 크림색 스카프와 남색 모자 역시 보기 좋았다. 전체적으로 수수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초라하지만은 않은 차림새였다.
그렇게 차려입은 매들린이 에릭과 내리자 별장의 게이트가 열렸다. 문 앞에 별장관리자와 가족들이 나와서 둘을 맞이했다.
“잘 도착하셨습니다. 큰 마님과 주인님은 이미 여장을 풀고 계십니다.”
“그래요. 여기는 내 친구 매들린 로엔필드 양입니다. 로엔필드 남작의 외동딸이죠.”
별장관리자는 매들린의 얼굴을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훑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무뚝뚝한 성정의 그는 전쟁에서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둥, 아름다우시다는 둥 흰소리는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둘을 내부로 인도했다.
골베인은 겉으로는 석조였지만 내부는 목조 골재로 이루어진 집이었다. 음울한 고딕 분위기를 내는 노팅엄 저택과는 딴 판으로 화사한 느낌의 인테리어였다.
1층의 중앙 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보이는 방이 매들린의 방이었다. 그녀가 방문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기 직전, 에릭이 속삭였다.
“틈나면 같이 바닷가도 가요. 콘월의 바닷가가 아주 아름답습니다. 물론 스페인의 해변에 비할 건 못되지만요.”
“…….”
“언젠가는 스페인의 해변도 다 같이 가죠!”
매들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문을 닫고 나서야 깊은 한숨이 나왔다. 다행히도 이안 노팅엄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대거리 이후로 그녀는 그가 너무나도 미웠다. 그러나 마냥 증오스럽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보다는 갈무리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석연찮은 감정들이 있었다.
매들린이 잠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즐거운 여행의 시작에서부터 어쩐지 느낌이 안 좋았다.
* * *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만난 건 저녁 식사 때였다. 이사벨은 여태 도착하지 않은 채여서, 선대 백작부인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별개로 이안의 친구들인 조지 콜하스와 헨리 멈포드는 매들린을 무척 살갑게 맞이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안만이 그녀를 무연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멀뚱함에 저도 모르게 흠칫한 매들린이 더더욱 정답게 굴었다.
“이렇게 다시 뵈어서 너무 반가워요. 콜하스 씨, 멈포드 씨. 런던에서 만났던 게 지난 생의 일 같네요.”
“정말이지 오랜만입니다. 지난 생의 일은, 무슨 기원전의 일 같군요. 로엔필드 양.”
콜하스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 멀쩡한 모습이 의외긴 했다. 이안이 그를 구하고 다쳤기에 남자도 많이 다쳤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멈포드 역시 겉으로 별 외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관망하는 듯한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지가 한참 매들린의 근황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목청을 가다듬더니 돌연 선언하듯 말했다.
“그나저나 저는 곧 약혼을 하게 될 것 같네요. 이런 소식을 갑자기 전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물론 로엔필드 양처럼 아리따운 숙녀는 아닐지도 몰라요. 그래도… 제 눈엔 가장 아름답습니다.”
“아, 정말 축하드려요.”
매들린이 진심을 담아 축하를 건넸다.
상대는 유명 미국 은행가의 여식이라 했다. 은근히 그 사실을 자랑하는 듯한 말투가 있긴 했으나, 조지는 진심으로 약혼자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가 한참 약혼녀 자랑을 늘어놓았다.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여성이죠. 그나저나 로엔필드 양. 에릭이라니.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라서. 곧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건가요?”
“…….”
그가 그 말을 내뱉은 때였다. 테이블 위의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선대 백작부인은 헛기침을 해댔고 나머지 사람들은 테이블만 쳐다볼 뿐이었다.
매들린이 입을 달싹이며 대답을 하려 했으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삼초 간의 침묵이 지나고 난 때였다.
“아. 내가 너무 넘겨짚었나. 불쾌한 발언이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행히도 꼬마 에릭과 로엔필드 양은 친구 사이군요.”
다행히도 조지 콜하스는 눈치가 빨랐다. 그가 다소 능청스럽게 상황을 모면했다.
“그나저나 이사벨은 늦게 오는 건가.”
에릭이 뒤이어 중얼거렸다.
아. 이사벨. 어쩐지 근래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녀에겐 어쩐지 선뜻 다가가기 힘든 절망감이 뿜어져 나왔다. 매들린조차도 그녀에게 쉽게 말을 걸기 어려웠다.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선대 백작부인이 덤덤한 투로 말했다.
“차라리 그게 낫다. 그 아이가 저번 모임 때는 소동을 일으켰잖니… 아, 다들 시장할 텐데 먼저 식사부터 들죠.”
백작부인이 서둘러 식탁 위의 벨을 울렸다.
곧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의 화려한 코스 식사라기보다는 전채와 한 그릇 요리로 이루어진 평범하되 맛있는 한 끼였다.
일행이 전채를 마무리할 때였다. 딩. 딩. 바깥에서 투박한 차임벨 소리가 났다.
나타난 사람은 이사벨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짝다리를 짚은 채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잘 재단한 쓰리피스 슈트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키가 컸다. 온화한 다갈색 눈과 머리칼 때문일까, 젊게도 보였고 중년의 나이로도 보였다. 미남이라 할 만했다. 무엇보다 밝은 에너지가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마리아나. 하지만 저는 미국인이잖아요. 아무리 몇 번을 왔어도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지라 찾아오는 데 고생을 한답니다. 택시 팁으로 얼마를 지불했는지 들으면 놀랄 겁니다.”
남자가 내뱉는 미국 억양이 비단뱀의 비늘처럼 매끈했다. 그가 이안과 악수를 하며 친한 척을 했다. 이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안에게 작게 속삭이는 걸 의도치 않게 들었다.
“이사벨은 오지 않았나 보네.”
“그런 것 같군.”
‘이사벨이라니, 가족과 꽤나 막역한 사이인가.’
그러나 매들린은 그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에 부부의 연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매들린은 이안에 대해서 몰랐다. 의도적인 무지였다.
손님은 그뿐이 아니었다. 뒤이어 사람들이 더 들어왔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부인, 어쩐지 표독스러워 보이는 중년의 부부, 카랑카랑한 노인, 귀족인 사람들,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변호사, 학자 등등 면면이 다양했다.
모습은 다양했으나 하나같이 지체 높고 부유한 이들이었다.
노팅엄 가문 비밀 집회의 구성원들을 보며 매들린은 제 모습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지금 아무런 보석이나 장신구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별장에 모인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화려했다. 남자들은 비싼 시계를 찼고 여자들은 무거운 보석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연이은 손님들의 등장으로 인해 저녁 식사는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결국, 식사는 중단되었고 모두가 흡연실에 모여 차를 들게 되었다. 매들린은 그들의 이름조차 다 외우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한창 사교계에 있을 때에는 그런 능력이 발달했는데, 병원에 있다 보면 환자들 이름 빼고는 도통 외워지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긴 귀족식 이름이나 칭호 따위를 기억할 수 있을 리 없다.
다행히 매들린에게 신경 쓰는 사람들은 없었다. 에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던 것이다.
거북스러운 건 그들의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대화의 주제는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했다. 화목한 가족회의를 예상했던 매들린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곧 파리에서 협상이 이루어지겠군요.”
미국에서 온 홀츠먼이 능글맞게 웃었다. 그 말에 성마르게 생긴 노인이 반응했다.
“우리 몫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겠죠.”
‘우리 몫.’ 이런 자리에서는 그저 방긋방긋 미소 짓는 게 최선이었으나 어쩐지 껄끄러운 단어선택이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미국 정부는 아마 배상금 협상에 소극적일 겁니다. 이미 빈털터리가 된 독일을 더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건 그들의 사정이죠. 미국 자유국채를 우리가 얼마나 사줬는데. 두고 봅시다. 윌슨 대통령도 언젠가는 우리네에게 진 은혜를 갚아야 할 겁니다.”
노인이 다시 일갈하자 사람들이 이리저리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은혜.’
매들린이 차를 마시며 곰곰이 발언을 되뇌었다. 그들이 내뱉는 단어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매들린은 이안이 자신을 흘깃흘깃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제 모습이 눈에 띄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남자들은 연신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댔다. 그들이 내는 담배 연기로 온 방이 자욱했고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다.
얇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점찍어 닦아냈다. 그때 누군가가 백작부인을 향해 친근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마리아나. 저택이 병원이 되었다니요.”
“아.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했어요.”
백작부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자신감이 없었다.
“제 의견을 묻는 거라면 역시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죠?”
“일단 마리아나, 당신답지 않아요. 집안에 병원이라니 통제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주저하며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이건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부인, 차라리 재단을 설립하는 게 나아요.”
“그들이 어떻게 돌변해서 해코지를 할지 압니까. 빨리 당장 내보내세요.”
“환자들도 사회로 돌아가야죠.”
그렇게 한참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굴었다. 매들린은 끼어들지도 못할 정도로 비판적인 분위기였다.
종지부를 찍은 건 존 벨린저 노팅엄이라는 이름의 사촌이었다.
“애국자가 응당 할 멋진 행동이긴 하지만 이제 끔찍하고 괴로운 전쟁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도 할 도리는 다했지요. 우리 가문 젊은이가 이렇게 다친 걸 보면 마음이 얼마나 아픈데요. 하지만 감상적인 자선사업가처럼 굴 일은 아닙니다.”
감상적인 자선사업가.
‘…….’
매들린은 멍했다. 지금 나오는 날것의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 뒤 그녀가 받게 될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