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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35/121)

34화.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제가 당신의 그 잘난 모임과 격이 맞지 않아서인가요?” 

“그따위 이유가 중요합니까.”

그가 성마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얼굴을 구긴 남자가 노기를 가라앉히며 가까스로 숨을 골랐다.

“당신이 알아서 좋을 것이 하등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반대겠죠. 그 사람들이 저를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거 아니에요?”

매들린의 서늘한 질문에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래.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지. 매들린의 심중 속 어두운 심사가 마구 분출하기 시작했다. 음험하고도 음험했다. 

전 생애에서도 친척들로부터 자신을 꽁꽁 숨겨둔 이유가 있었을 테다. 어디 내놓기 송구했겠지. 하자 있어 보였겠지.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웠다. 

“노팅엄 씨는 제가 부끄러운 거 아닌가요? 지체 높고 부자인 당신의 가족들에게 저를 소개하기도 싫은 걸 수도 있겠군요.” 

“……” 

이안의 얼굴에 진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가 말을 잃은 사이 매들린이 쏟아냈다. 

“가진 것도 없는 데다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이니, 당신 눈에는 얼마나 하찮아 보였을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당신이 아니라 에릭의 초청을 받았어요. 친구로서요. 그러니 당신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 멋대로 논리를 짜 맞추어내는군. 그래. 좋습니다. 매들린 로엔필드. 당신의 말이 맞다고 쳐요.”

이안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는 건 안 돼. 휴양이 가고 싶습니까?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 어디든 보내줄 수 있습니다. 말만 하세요. 하지만 별장은 안 됩니다.” 

“모욕적이네요.” 

“…….”

이안이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병원을 없애려고 하신다면서요? 이야기 들었어요.”

“……!”

어둠 속에서도 남자가 동요하는 건 분명했다. 그의 전신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집안의 주인이면서도 초대받지 않은 유령 같았다.

“그것 자체를 나무라려는 건 아니에요. 전쟁도 끝나고, 다들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죠. 유감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병원을 대표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하고 싶어요. 고맙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고요.”

5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남자가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진초록색 눈동자가 어두웠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좋을 대로 하세요. 로엔필드 양. 에릭의 친구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랍니다.”

“……”

“그나저나 그대의 아버지가 굉장히 흥미로운 발언을 하더군요.”

이번에는 매들린이 동요할 차례였다.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주욱 당겨올렸다. 

“맞는 말 아닙니까. 다리 없는 병신인데, 돈은 썩어 넘칠 정도로 많죠. 얼마 안 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유산까지 남겨주니 참으로 훌륭한 신랑감 아니겠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남자의 언사는 매들린의 마음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들린에게만 칼을 꽂는 게 아니었다. 

그는 그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었다. 

“…매들린 로엔필드, 내가 당신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

“난 당신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습니다. 동정심을 구걸했지만, 그조차도 아닐까 봐서. 나는 기만당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괴물 주제에 남에게 이용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니. 참으로 쓸데없는 고집이 아닙니까?”

남자가 이죽였다.

“당신 아버지의 빚이 얼마라 했던가요?” 

“…….”

충격을 받아야 했을까. 모욕감을 느꼈어야 했을까.

그러나 마음은 이미 고통에 둔감해진 상태였다. 매들린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아주 잠시간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지만 어두침침한 전기등 아래에서는 어떠한 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안이 아니라 그림자 귀신일지도 몰랐다. 

남자가 살짝 목례한 후에 다시 비척거리며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매들린은 난간을 짚고 있었다.

매들린이 다시 꿋꿋이 섰다. 온몸이 충격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힘이 잔뜩 풀린 다리로 계단을 오르는 게 힘에 부쳤다.

[난 당신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있습니다. 동정심을 구걸했지만, 그조차도 아닐까 봐서.]

남자는 솔직했다. 자신의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건 고통스러웠다. 매들린이 폭발할 듯 뛰는 가슴께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울음보다는 토가 나올 것 같아 두려웠다. 속이 안 좋았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뚱어리를 이끌고 방으로 향했다. 

* * *

매들린은 침대에 누워서도 콩닥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열패감 때문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전생의 업보를 이렇게 받는다면 억울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속이 상하다 못해 문드러지는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단순히 호의를 거절당한 것이었다면 이리 속상하진 않았을 거다.

이안의 마음을 쉽게 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편집증적으로 타인의 호의를 의심하고, 자기비하적이지만 때로는 오만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증오하면서도 말이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각성된 의지와는 다르게 천근만근 무거운 몸은 점차 수마의 구렁텅이 속으로 모든 것을 끌고 내려갔다.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들면서 매들린 로엔필드는 오랜만에 과거의 꿈을 꾸었다. 

* * *

-- 스물일곱 살의 매들린.

평소의 차가운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알링턴은 다정하게 굴었다.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내였다. 

이제 더는 그와의 관계를 친구 사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워졌다. 딱 어느 순간부터라고 짚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링턴이 맞은편에 앉은 매들린의 손등 위에 제 손을 포갤 때였다. 돌연 한기를 느낀 매들린이 불쑥 손을 쳐냈다. 

“이제 그만 해요.”

주어를 생략했으나 많은 것이 녹아 있는 한 마디였다. 일순 알링턴의 푸른 눈이 선연하게 얼어붙었다. 

치밀하고 집요한 눈초리에 매들린이 공연히 몸을 움츠렸다. 따뜻한 얼굴이 자취를 감추고 냉정한 얼음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주위 사람들을 내친 겁니까?”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요. 게다가…그이에게 좋지 않을 거예요.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이안 노팅엄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알링턴이 일갈했다. 그러나 아닌 건 아니었다. 

매들린은 돌변하는 남자의 모습에 살짝 겁을 먹었으나 이왕 시작한 이야기였으니 매듭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 위험해요. 적절하지도 않고요.”

그때였다. 갑자기 알링턴이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매들린의 뒷골이 짜르르 울렸다. 이제는 무섭기보다는 화가 났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무슨 말이죠? 우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아니에요. 두 번째로, 만약 정말로 그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겠죠.” 

알링턴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치밀한 파란색 눈이 창백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매들린 노팅엄.”

“…….”

“그런 이야기를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불공평하단 생각은 안 드십니까. 그는 당신을 새장 속에 가두고 자기 멋대로 하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 말입니다.”

“…새장이라니-.”

“어때요, 날 전혀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일종의 복수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복수요? 이상한 이야기네요.”

알링턴이 툭. 사탕 과자를 던지는 마녀처럼 군 것은 그때였다. 

“그를 떠나서, 공부를 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 * *

노팅엄 가문의 별장인 골베인 저택은 콘월에 위치해있었다. 그리 ‘가깝다’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멀다고도 할 수 없는 거리. 자동차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그곳을 한 번도 방문해본 적 없어.’

당연했다. 전생의 백작은 웬만하면 저택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노팅엄 저택은 그의 요새요, 성채였다. 그렇기에 부부 동반 여행 같은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주가 방문하지 않는 별장이었으니, 전생에서 별장은 있으나 마나 한 곳이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채로 서서히 부식되어가는 건물,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깎여나가는 이미지가 그곳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던 매들린의 뇌리 속에 박혔었다. 

자동차에 타자 옅은 바람이 매들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태피스트리와 실크로 장식된 조수석은 매들린의 가냘픈 몸체를 부드럽게 지탱했다.

에릭은 운전석에 앉아 신이 난 채로 잔뜩 떠들어댔다.

“행정병이라고 해서 서류작업만 하는 건 아니에요. 이렇게 운전할 일도 많았죠.”

“…그렇군요.”

“그나저나 역시 요즘 자동차는 미국이 제일 잘 만드네요.” 

지금 그들이 타고 있는 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생산한 것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20년대를 예견하듯이 차체가 반짝였다. 휘황찬란한 광란의 20년대. 주식은 나날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고, 사람들은 술을 부어대며 바보 같은 짓을 벌였다. 그 뒤에 파국이 오건, 죽음이 오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들린으로선 어차피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차 앞 유리 너머 장밋빛 석조주택이 나타났다. 노팅엄 저택보다는 규모가 아담했지만, 훨씬 후대에 지은 태가 나는 자못 호감 가는 건물이었다. 부드러운 사암으로 지어진 멋진 집. 

차는 곧 별장 앞 마당에 도착했고, 에릭은 다시 중산모를 걸쳐 썼다. 그는 이미 주차되어있는 차 한 대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우리가 제일 늦게 도착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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