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에릭의 초대
그 후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매들린이 한창 식사 자리를 치우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하 하인용 식당은 그녀 외에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리고 돌연 인기척이 들렸다.
매들린이 반짝거리는 식기에서 시선을 떼 고개를 들었다. 에릭 노팅엄이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흰 셔츠는 소매까지 걷어붙인 채였다. 제대 후 테니스를 하느라 살갗이 살짝 그을려 무척 건강하고 생기 넘쳐 보였다.
그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매들린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 무슨 용건이라도…’
“매들린, 요새 통 안 보이네요.”
“일이 바빠서요.”
“그 사진 때문에 그래요? 걱정 마요. 단단하게 경고했으니까 다시는 허튼수작 못 할 거예요.”
“…그래야겠지요.”
매들린의 목소리가 어째 침울하자 에릭 쪽에서 다급해졌다.
“완전 혼쭐을 내줬다니까요?”
“……”
여전히 매들린의 안색이 어두웠다.
에릭이 혀를 찼다. 그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매들린이 고개를 들자 에릭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곧 우리 일가친척이 가문 별장에 모인다는 거.”
“아…그래요?”
매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팅엄 일가친척들이라.
전 생애에서는 얼굴조차 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어차피 그들을 맞이하는 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노팅엄 가문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언제나 유령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매들린이 처음으로 호기심을 보이자 에릭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일가친척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원래 우리 집안은 방계였는데… 이 이야기를 하려면 복잡하네요. 재산과 작위에 얽힌 지저분한 역사가 있었고, 우리 쪽이 승리했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돼요.”
그 덕분에 친척들의 절반은 절연한 상태라고 해야할까. 에릭이 살짝 윙크하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매들린은 문득 눈앞의 젊은이가 도대체 왜 제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가 싶었다.
“대서양 너머에 있는 친척들과 우리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의 사업가들이 별장에 모여 오찬을 열곤 합니다. 전쟁 때문에 중단이 되었지만.”
“그렇군요.”
처음 듣는 전통이었다. 나름 매들린 ‘노팅엄’으로 6년을 살았으나 한 번도 그런 오찬이 있는 줄은 몰랐다. 물론 별장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제 전쟁도 끝났고, 논의할 일도 많으니… 곧 사람들이 별장으로 올 겁니다.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겠지요.”
“무엇을 확인한다는 건가요?”
“오, 매들린. 그야…”
아무도 없는데 그가 매들린 가까이에 속삭였다.
“우유에 차를 넣느냐, 차에 우유를 넣느냐 정도의 이야기겠죠. 별 이야기겠습니까.”
“…….”
그녀가 바람 빠진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자, 에릭이 머쓱한 듯 웃었다.
“아무튼! 제가 매들린을 부른 건 이유가 있어요.”
“…….”
매들린의 푸른 눈이 다시 의구심으로 반짝였다.
이제 정말 본론을 말해야겠군. 에릭이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목청을 가다듬고 속삭였다.
“같이 별장으로 갈래요?”
“네?”
“모처럼 가족과 친구들이 별장에 모여서 만나는데, 매들린도 같이 가면 어떻겠냐는 거죠.”
그 말을 내뱉는 에릭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매들린은 반대로 심장이 철렁였다.
“하지만 저는 병원에 할 일이 있는데요.”
“안 그래도 오츠 부인께 물어봤어요. 듣자 하니 한 번도 휴가계를 낸 적이 없다면서요? 이번 기회에 일주일 푹 쉬죠.”
“그렇지만…”
“매들린 로엔필드 양. 이번에 가면 혹시 모릅니다.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요. 가령 병원 이야기가 테이블 위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병원 이야기가 나오자 매들린의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평소에 차분한 매들린이 호기심을 보이자 좋았는지 에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매들린이 속삭였다.
“그렇다면, 병원에 대한 일들도 그분들이 결정하는 건가요?”
“결정이라. 저희는 합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긴 합니다만.”
“아. 죄송해요. 그렇다면 그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요? 에릭. 노팅엄 저택을 계속 병원으로 둘 수 없단 건 알아요.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
“염치없는 건 알아요. 죄송해요. 이곳을 어떻게 하든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닌데 말이죠.”
매들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가듯이 힘을 잃었다.
불쌍한 여자. 매들린 로엔필드는 병원에 애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필사적이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참전 군인들조차 빨리 잊고 뒤안길로 보내고 싶어하는 상처를 계속 되짚고…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저 역시 매들린과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더더욱 같이 모임에 가자는 거예요. 매들린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뜻을 바꿀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괜히 참석했다가 가족 모임에 누를 끼치는 건 아닌가요.”
“다들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걸요. 매들린도 우리 집안의 친구고.”
에릭이 몇 번이고 안심시키고 나서야 매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참석하는 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갈게요.”
“잘 생각했어요. 콘월의 해변이 코트 다 쥐르는 아니지만 아름답다고요. 같이 테니스를 치죠.”
* * *
병원 일을 잠시 손에서 떼야 한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쩌면 오츠 부인의 말대로 일에 중독이 되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부르트고 상처 난 손바닥을 보면서 갖은 상념이 몰아쳤다.
‘에릭의 친구로서 참석하는 게 맞을까.’
내심 가족 모임이 기대가 되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별장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고 사람들도 보고 싶었다. 병원 일을 어떻게 설득할지 막막했지만 말이다.
‘노팅엄 일가….’
전 생애에서는 이안이 거의 보여주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영국과 세계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사람들.
사실 늘 아쉬웠던 것 같다. 왜 제게는 그 잘난 친척들을 소개해주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나를 부끄러워하는가 생각했지.’
어리고 미숙한 부인이 부끄러워서 제 사람들 곁에 가까이 두지도 않는 거라 그리 생각했었다. 아무튼 곧 궁금증은 풀릴 터였다.
이번 기회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원의 향방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설득하면 좋을 텐데.’
그래도 무리하지는 말자. 나로 인해 뭐가 바뀔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자고.
매들린은 이불을 입까지 끌어올린 다음 노곤한 눈꺼풀을 감았다. 수마에 빠져들 시간이었다.
* * *
휴가계를 받아든 오츠 부인은 별말이 없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마땅히 쉬어도 된다는 식이었다.
휴가 짐을 싸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에릭의 초대도 초대였지만, 이안과 마주하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는 불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쳤다. 매들린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잡념을 몰아냈다.
별장에서 입을 옷을 정하기 위해 옷장부터 열었다. 최신 카탈로그의 기준에 따르면 참담했다. 전쟁 전에 샀던 얼마 안 되는 옷들은 전부 유행을 한참 넘긴 구닥다리였다.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입을 만한 옷들은 전부 작업복이었다. 19년도식 신식 드레스는 없었다.
‘결국 새 옷을 사야 하나.’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모은 봉급으로 약간의 여유로운 사치를 부려보는 것도. 소비가 죄악은 아니지 않은가.
매들린은 시내로의 쇼핑을 계획했다. 드레스와 모자, 숄을 사면 될 것 같았다.
* * *
그때의 어색한 마주침 이후로 이안을 다시 만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매들린은 부러 먼저 이안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수치심이 크기도 했거니와 괜히 남자 앞에서 해명해봤자 오해만 커질 것 같았다.
그런데, 이안이 먼저 매들린을 찾아왔다.
그는 돌격대처럼 매들린을 불시에 기습했다. 병동 교대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는 때였다. 하인용 계단을 올라가던 매들린을 남자가 붙잡았다. 정확히는 불렀다.
“매들린.”
그 부름에 매들린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평소의 창백하던 얼굴과 달리 옅은 조도의 불빛 아래에서도 남자의 얼굴이 제법 상기되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의아했다.
술을 마셨나. 하지만 이안이 술을 마시고 매들린을 찾아올 사람은 아니었다.
매들린이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이안이 거두절미했다.
“왜 그 청에 응했습니까.”
“네?”
매들린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녀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이안이 재차 그녀를 채근했다. 갈급한 목소리가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매들린을 마구 몰아쳤다.
“우리 가문을 너무 얕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기. 이안….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어요.”
“별장에 가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에릭이 희희낙락하더군요.”
아. 에릭의 청을 받아들인 일을 가지고 하는 말이구나. 매들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노팅엄 가문 사람들만의 모임이었다면 저도 부러 참석하는 폐를 끼치진 않았을 거예요. 단지… 에릭이 친구로서 참석해달라고 해서 응했어요.”
“지금이라도 거절하세요.”
단호한 명령조의 말에 매들린이 살짝 몸을 뒤로 물러세웠다.
“당장 거절하란 말입니다.”
당황스러웠다. 그저 친척 모임에 참석한다는데도, 남자는 잔뜩 날이 서서는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